배명훈의 『첫숨』서평 시리즈 중 '사회학 파트'를 맡아 썼다. 


'각도의 정치학'이란 관점 아래. 


사람은 90도의 동물이다. 아니, 요즘엔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걸어야 하니 75도 정도의 동물이라고 하자. 땅이 있고 그 땅을 딛는 발이 만들어내는 각도를 통해 사람은 ‘수직적’이라는 이미지를 품어왔다. 물론 사람이 0도의 동물이 되는 시간도 있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새벽녘 깊은 잠을 청할 때 사람은 ‘수평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배명훈의『첫숨』을 읽으면서 ‘각도의 정치학’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간 이 소설을 두고, 미래 도시 첫숨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키는 ‘걸음걸이’의 특색은 자주 언급되었다. 허나 걸음걸이의 구분을 통해 형성된 계층 문제에만 주목한다면, 사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란 논의로 이 작품의 매력을 가둘 수 있다. 『첫숨』엔 사회에 대한 물음을 넘어 어떤 정치성이 보인다. 사람의 발과 지면의 구도가 자아내는 ‘각도’에서 비롯된.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하는 무용수 한묵희. 또 다른 축인 보안책임자 최신학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분류되지 않는 동작”에 주목한다. 지구에서 온 망명자인 최신학과 달에서 온 이주민 한묵희는 ‘중력비평가’가 되어 각자의 행성에서 느낀 이색적인 중력을 해석한다. 이 비평의 목표는 중력의 정치를 실감하는 것이다. 특히 한묵희는 공연을 통해 중력의 정치를 몸소 보여준다. 6분의 1 네이티브인 한묵희는 첫숨의 상류층으로 구성된 3분의 1 네이티브인 화성계 사람들, 이 중력이 부과하는 걸음걸이 등을 따라하며 상류층을 꿈꾸는 첫숨 주민 앞에서 중력을 ‘교란’한다.


교란이란 표현을 썼다고 해서 한묵희의 행동을 ‘전복’과 ‘전위’의 의미로 쉬이 해석하고 싶진 않다. 『첫숨』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소설이기 때문이다. 과감하게 지르기보단 과감함 이전에 나오는 세심한 모색에 에너지를 더 쓰고 있다. 가령 배명훈은 짧은 대목이지만 무용수의 상(像)에서 흔히 보이는 상처투성이의 발가락 대신, 발목에 주목한다. 한묵희의 발목은 지구 중력의 6분의 1(달)과 3분의 1(첫숨) 사이, 지면과 허공 사이, 도약과 착지 사이를 잇는 정치적 장치다. 한 곳만 챙기기에도 하중이 실리는 사람의 발목. 한묵희는 양쪽을 매개하며 발목에 스며든 무게를 견딘다.


이 무게는 어느 무용수의 고생담 같은 인간미를 우려낸 서사가 아니다. 중력을 교란하는 일은 곧 한 사회가 부과하는 걸음걸이의 분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며, ‘수직적’ 인간이란 일정한 각도의 이미지를 분열시키는 정치적 행위다. 방방 뛰어올라도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위축되어서도 안 되는 이도 저도 아닌 첫숨 사회의 보법(步法)을 떠올려보자. 무대에서 펼쳐지는 한묵희의 춤은 지면과 탈·부착하며 곧추세워 살아온 ‘90도의 인간들’이 받아온 부담을 폭로하고 위로한다. 90도의 인간들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어딘가를 정복하고, 높은 새 건물과 웅장한 기념비를 지으며 그렇게 자신들을 위무해왔다. 자신들의 발이 그 무엇보다 정직하고 성실하리라 믿는 가운데, 90도라는 각도는 문명과 진보의 척도가 되었다.


작품의 중후반부, 한묵희가 공연에서 선보이는 춤은 ‘상상력’이란 말에 갇힌 채 사람이 차마 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동작이 아니다. 문명이 도래한 이래, 사람이 사회와 관계 맺어온 90도라는 각도의 형식은 무대의 천장 유리가 깨지듯, 한묵희의 비행을 통해 신랄한 의문에 부쳐진다. 한묵희의 춤은 비판적 물음이 탈색된 아름다운 기예가 아니라 예술비평가들이 중요하게 언급해온 ‘비판적 무용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걸음의 사회학’은 퇴보해가고 있다. ‘만보객’ ‘산책자’의 정치성은 시끄러운 사회를 버티는 고요한 사색의 힘 따위로 변질되었다. 방방곡곡을 누비는 것이 자연스런 여행 시대. 걸음이란 라이프스타일을 꼬집는 비평은 고작해야 주말 등산객에 대한 불편함을 하소연하는 것에 멈춰버렸다. 그것은 ‘걸음의 사회학’이 사람의 발과 지면이 만들어내는 각도에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첫숨』은 문명과 사회를 지탱해온 인간의 문제는 발도 땅도 아닌, 그것을 잇는 중력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력은 그저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과학 교양이 아니다. 중력은 이 사회를 좌우하는 이데올로기이자, 투쟁해야 할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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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예술잡지 『F』18호 '전염'에 <사회문화사적 열병>이란 글을 썼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서브 컬처: 성난 젊음> 전을 다녀와서 남긴 쌉싸래한 리뷰. 데리다의 '아카이브 열병'을 떠올리며 썼다. 



"이 아카이브의 사운드는 과연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전시장을 살펴보면서 손짓하는 유령들을 미리 만나보았다. 다행히도 가장 식상한 유령이 먼저 다가왔다. 그 유령은 내게 공간 진입의 자격을 물었다. ‘이 기록이 서울시립미술관에 들어올 만해?’로 시작하는. 이내 그 질문에 성의가 없었다고 느꼈는지 예술관에 진입함으로써 얻는 상징자본 따위를 운운했다. 그리 마음이 움직이는 지적은 아니었다. 다음 유령은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는 사회문화사적 에너지가 과하게 분비되는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관심이 갔다. 그것은 요즘 내가 시각장(visual field)에 느끼는 불안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전시회에 가면 예술가들은 사회문화사 연구자가 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하나의 문서/문서고 이미지로 축약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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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에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 관한 서평을 썼다. 


<피로, 작가들의 건강법>(전문 링크)












글쓰는 사람이 쓰기에 대해 쓸 땐 두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해보자’의 글쓰기다. 야심이 넘실댄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보겠단 말엔 수줍음이 느껴지나 포부의 농도는 짙다. 다른 하나는 ‘해봤자’의 글쓰기다. 침울함이 뚝뚝 떨어진다. 뭐가 뭔지 모르겠기 때문에 이 생활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란 말엔 피로가 느껴지나 외려 건강의 수위는 높다. 각 작품마다 소재는 다르지만 대체로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물음이 겹쳐 있는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한겨레출판 2015)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후자다. 이 소설집에 참여한 열명의 작가들은 각자의 피로를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피로가 쌓이면 예민해진다. 간혹 선의는 비의가 되고 단어와 문장들엔 저의가 쌓인다. 피곤한 사람들은 이런 저의로 가득 찬 사회를 포착하는 눈이 밝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오늘날 ‘○○을 준비하다’의 동의어는 ‘놀(쉬)고 있다’이다. ‘불우하다’의 동의어는 ‘(다들 힘겨우니 그 정도는) 평범하다’이다. ‘월세’의 동의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의) 자세’다. 내가 보기에 작가들은 ‘잘 피로한’ 자들의 체질을 지녔다. 없으면 단련시켜야 한다. 그래야 버틴다. 해보자의 글쓰기를 얼른 ‘흑역사’로 부인하고 부질없음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찌질하진 않되 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들의 건강법이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까진 없다. 피로를 활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문장에 졸릴 틈은 없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을 관통하는 것은 ‘잘 표현된 피로’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 소설집은 열가지 색깔의 숙성된 피로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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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舊名

“유진보다 한발 앞서 태어난 것은 이름이었다.”

- 안보윤,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이름은 흐름이다. 내맡겨진 흐름. 우리는 그 흐름을 순응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이름은 늘 나보다 먼저 태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난 뒤 의료·행정 절차에 따라 생명으로 승인받고 이어 지도 한 장을 선물 받는다. 이름이라는 소동은 그렇게 시작된다. 



안보윤의 단편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에서 유진은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2’의 소동을 살게 된다. 유진에게 왜 소동이 삶에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인생 전반을 지배하는지 알기 위해 잠시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아직 유진이 사람의 형체가 아니라 핏줄에 가까울 때, 의사는 한 점을 가리키며, 심장이라고 가르쳐준다. 허나 함께 이를 보던 아버지는 웃음으로 의사의 설명을 부인한다. 그는 심장이 아니라 고추일 거라고 말한다. 이처럼 부모는 태어날 이에게 사회적으로 분류된 ‘1’인 삶을 바랐다. ‘유용진’이라는 이름까지 정해놓았다. 유진은 이를 모른 채 항렬자가 빠진 두 글자의 이름을 받아들인다. 유진은 자란 뒤 우연히 진단을 받는다. 여자를 표지하는 성기엔 남성의 성징이 숨어 있었다고. 의료진은 유진이 실은 ‘1’의 인간이었음을 알린다. 






이제 유진에게 구명舊名과 구명救命이 놓여 있다. 유진은 자신이 태어난 뒤 고쳐진 이름을 ‘고치기 전의 이름(舊名)’으로 다시 되돌려놓을 것인가. 정확히 말해 그 이름의 삶을. 이를 통해 유진은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救命).


*

문학은 구명舊名의 장엄함도, 구명救命의 의지도 내비치지 않는다. 남은 것은 ‘곤혹스러움’이다. 유진은 자라지만, 아기의 삶에 멈춰 있다. 여기서 아기란, “살아가지만 죽은 자 혹은 반만 살아가는 자”(아감벤)이다. 유진은 태어나기 전부터 ‘심장’을 부인당했다. 대신 ‘고추’여야만 한다는 믿음 속에서 태어남을 기다린다(혈육이 심장을 부인하는 역설적 상황!). 


생명의 시작과 끝을 부인당한 유진에게 나이는 더 이상 성장과 성숙을 책임지는 시간이 아니다. 유진에게 고추가 달린 것(‘1’의 삶)과 달리지 않은 것(‘2’의 삶)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질문이다. 자신은 과연 ‘있는 사람’인가(심장이 있는가). 유진은 있지도 없지도 않은 ‘반만 살아가는 자’의 이름이 되었다.

곤혹스러움은 반만 살아가는 자의 심장을 타격한다. 그리고선 우리에게 당신은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당신을 당신으로 살게 하는 이름 이전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적한다. 곤혹스러움은 문학이 데리고 온 저승사자다. 하지만 이 저승사자는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려고 온 것이 아니다. 곤혹스러움은 심장을 부인당한 자들을 위한 조력자다.





환명換名

“제 친구는 제 이름을 아주 좋아했더랬어요. 가끔 우린 이름을 서로 바꾸어서 부르곤 했었죠.”

- 김연경, 「소희, 기억의 접점에 서다」



*

심장을 부인당한 자들이 시도하는 또 다른 모험이 있다. 이는 다른 이의 심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 모험은 ‘환명換名’이다. 환명은 단지 누군가의 이름을 가져와 자신의 것인 마냥 행세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심장을 가져오는 일이다. 환명은 곧 심장이식이다. 




김연경의 단편 「소희, 기억의 접점에 서다」는 환명의 수술대에 올랐던 두 여인 소희와 지영의 삶을 보여준다. 소희가 되고 싶었던 지영-소희(지영)-이 있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소희를 사랑했던 준헌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소희가 아니라 실은 지영이었음을 알게 된다. 원래 소희라는 이름으로 살아갔던 소희-소희(소희)-는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설명한다.


“소멸과 희박, 그 단어의 이니셜을 땄죠. (…) 

모든 소멸하는 것들과 희박한 존재에 대한 집착” 







소희는 어쩌면 지영이 왜 소희의 이름을 갖고 살아가려 했는지, 그 이유를 자신의 이름 뜻으로 진술했는지 모른다. 소멸과 소진의 과정을 겪는 지영에게 소희는 희박한 매력이 있는 존재로 다가왔다. 지영은 소희를 통해 자신의 소멸을 유예하려 했다. 환명은 유예를 돕기 위한 수술이다. 지영은 소희(지영)가 됨으로써 소희(소희)의 심장을 가져온다. 누군가의 심장을 가져옴으로써 지영은 소희(지영)의 삶을 본격적으로 살게 된다. 허나 환명의 삶은 늘 불안하다. 이는 진짜 ‘나’와 가짜 ‘나’가 누구였는지 들킨다는 차원의 두려움이 아니다. 


다른 이의 심장을 가져온 이는 자신이 ‘위명委命’ 상태에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소희의 이름을 가진 지영은 오직 소희와 한 덩이가 되고 싶다는 희망뿐이다. 육체적 동일, 삶의 가치관, 꿈에 이르기까지. 그렇지만 그 희망은 언젠가 빼앗길 목숨이란 절망에 가 닿아 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환명)’은 곧 누군가의 심장을 얻는 일이 아니라, ‘나의 심장을 빼앗기는 일(위명)’에 가깝다. 한 덩이가 될 수 없었던 소희와 지영은 다툼 끝에 헤어진다. 소희(소희)는 세월이 간간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으며 소희(지영)가 죽은 줄 안다. 허나 그때만 해도 소희(지영)는 살아 있었다. 준헌을 사랑하고 있던 소희(지영)는 준헌과 결혼을 앞두기 전,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있는 소희(소희)에게 살아 있음을 전하려 하지만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처럼 환명은 가혹한 수술이다. 세상은 사람에게 환명을 거쳐 ‘동명同名’을 허락하지만, 동일한 존재까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은 환명을 통해 단지 살아가본다는 수준을 넘어 “주체와 객체, 화자와 청자가 누구냐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김연경의 본 소설 속 한 구절)는 한 덩이로서의 심장을 꿈꿔보지만, 그 꿈은 좌절된다. 좌절 뒤 남은 것은 ‘사이’다. 고로 너의 등장과 나의 부재, 혹은 나의 등장과 너의 부재는 동질감에 이를 수 없다. 환명은 결국 이질감을 깨닫기 위해 동질감이라는 환상을 겪는 시행착오의 여행이다. 문학은 이 여행길을 결코 교정하지 않는다.



필명筆名


“박준일이 그의 진짜 이름이고 세상에 알려진 박준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 끝에서 ‘일’ 자 하나를 떼어버린, 

이를테면 그의 필명이었다.”

- 이청준, 「소문의 벽」




환명이 다른 이의 심장을 가져오는 일이라면, 필명은 자신의 심장이 두 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벌이는 소동이다. 심장을 부인당한 자들이 외려 자신에게 심장이 하나 더 있다고 증명하는 소동. 이 소동에는 자연스레 소란스러움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허나 필명은 스스로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누군가 소란을 대신 피어주길 기다린다. 필명은 추리소설의 양식을 띨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명은 언제나 문학 본연의 흥미를 끈다. 필명에 관심을 표하는 이들은 가면을 벗겨보고자 페이지를 한 쪽, 한 쪽 넘긴다. 허나 노력이 집중될수록 페이지는 그 노력을 지연시킨다. 필명은 본명本名의 가면이 아니다. 필명은 본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이름이다.




이청준의 중편 「소문의 벽」에서 잡지편집자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방황에 갇힌 소설가 박준을 구명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던 박준은 병원을 탈출해 ‘나’를 마주치게 되었고, 그 후 ‘나’는 박준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살피고자 탐정 노릇을 한다. 이 작품은 이청준이 자주 내세우는 ‘소설가의 존재론’으로 널리 읽혀왔지만, 한편으론 문학이 줄곧 부여잡았던 ‘독자는 과연 있는가’라는 질문을 담고 있다.









여기서 잠시 우회. 우리는 책과 독서의 사회문화사를 주제로 한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른바 ‘독서대중의 탄생’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허나 이런 상식은 이미 오늘날 독서대중의 현존을 증명하기 위해 과거로 찾아들어가 그 대중의 모습을 이러저러한 물적 조건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있다는 한계를 회피한다. 이런 문화사 책들은 과거에도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라는 신기효과에 머물고 만다. 독서대중의 탄생을 조망하면서도, 그 탄생은 본격적인 탐구 이전에 이미 정당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정당화는 유약한 출판학적 시각으로 담아 출판 담론의 정보로만 소비되고 그칠 뿐이다. ‘독자는 과연 있는가’란 질문은 정작 책과 독서의 사회문화사에 담겨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은 읽는 기록으로 남았지만, 그 기록이 읽기의 가능성을 담보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려왔다. 이러한 갸우뚱거림은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소문의 벽」에서 잡지편집자 ‘나’는 소설가 박준을 구명하기 위해 박준의 소설을 읽어볼 것을 제안한다. 허나 담당 정신과의사인 김 박사는 읽기를 거부한다. 정신병원에서 알고 싶은 것은 소설가 박준(필명)의 일이 아니다. 병원기록부에 쓰인 박준일(본명)의 일이다. 김 박사가 보기에 박준의 소설은 박준일의 정신을 파고들 수 있는 초상화나 전기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잡지편집자 ‘나’는 그 가능성을 아직 놓지 않는다. 


한편 ‘나’의 직장 동료인 안형은 박준의 소설이 널리 읽히길 거부하는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다. 안형은 박준이 작품에서 줄곧 보이는 우울의 과한 제스처가 시대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안형은 잡지편집자로서 소설가의 글을 빌어 자기진술을 하고 싶지만, 박준은 이 기준에서 탈락한 소설가다. 


이제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전짓불이 개입한다. 박준의 작품에서 전짓불은 진술을 강요하는 도구다. 소설의 주인공은 전짓불의 환함에 가려진 누군가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목소리는 주인공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전짓불의 환한 빛에 가려진 누군가는 마치 보이지 않는 독자를 연상시킨다. 박준은 모조리 말할 수 있다는 욕망과 다 말하지 않겠다는 침묵 사이에 놓인다. 박준이 현실에서 택한 것은 후자다. 김 박사는 이를 두고 박준이 진술거부증에 걸렸다고 말한다. 작품은 진술거부증을 박준의 정신병적 특성으로만 가둬두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전짓불은 읽기가 잘 가다듬어진 일종의 디자인적 이해 행위가 되어버렸음을 시사한다.


소설에서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박준의 소설이 널리 읽히길 거부하는 안형이 제대로 읽은 것은 하나 있다. 그것은 박준에 대한 소문이다. 박준의 작품에서 새어나오는 그를 둘러싼 기괴한 소문들을 읽어내고 방치해둠으로써, 박준의 작품 읽기는 타인으로 하여금 더 철저하게 거부될 가능성이 나타난다. 그렇다고「소문의 벽」은 박준을 구명하려는 ‘나’에게 온전한 희망을 던지지도 않는다. ‘나’는 박준의 작품으로서 박준의 일과 삶을 규명해보려 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은 더 복잡하고 찝찝하다. 그는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박준이란 저자를 향해 ‘읽는 사람’으로서의 독자로 다가가는 것 같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 읽는 사람으로서의 쾌감을 누리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소설의 말미, 자신을 구해달라고 애원하던 박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지만, 실체(저자)는 없다. 기어코 ‘나’는 그 환청을 통해 스스로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

다시 한번, 문학은 필명으로 저자의 본명을 읽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불가능성 자체다. 외려 문학은 필명으로 본명의 초상화와 전기를 찾아 읽으려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위험하고도 찝찝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독자)은 읽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기지만, 페이지에 기록된 나와 너는 작은따옴표에 갇혀 ‘나’와 ‘너’가 되고, 저자는 그렇게, 힌트가 되어줄 인물들도 고유명에 갇힐수록 더욱더, 일반화된 익명의 삶으로 미끄러져 숨는다. 심장을 부인당한 자들의 모험이 계속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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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에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서평을 기고했다. 


「감정과 사유라는 이분법을 넘어」(전문)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수전 손택&조너선 콧, 『수전 손택의 말』과 병렬 독서를 제안했다. 그러했을 때 솔닛의 이 책에서 흥미도가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6장 「울프의 어둠」이 왜 이 책에서 중요한지 챙겨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서평을 통해 솔닛의 이 책을 '이런 남자 조심하세요'라는 테마의 잡지 칼럼, '나를 껄그럽게 하는 사람과의 관계 정리법' 같은 트렌디한 심리학 에세이로 축소-활용하는 것을 벗어나. 오늘날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성별과 지식의 배치, 그 불평등'이란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자 이야기하고 싶었다. 


"신조어는 대개 유행의 유통기한에 휩쓸려 사라진다. 어쩌면 ‘맨스플레인’도 그런 운명의 범주에 속할지 모른다. 허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 한국어판 김명남 옮김, 창비 2015, 이하 『맨스플레인』)와 『자기만의 방』을 같이 읽다보면, 이 조어는 실제로 오랜 역사와 생명력을 축적해왔음을 알게 된다. 솔닛이 『맨스플레인』을 통해 펼쳐 보이는 시야는 꽤 넓다. 그녀는 책을 통해 젠더와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 중인 ‘사유: 남성의 것=감정: 여성의 것’이라는 인식에 대항한다(이 생각은 일찍이 수전 손택이 조너선 콧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7장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에서 솔닛은 1970년대 캘리포니아를 다룬 자신의 글을 비난한 남자의 견해를 소개한다.

 

“당신은 FOX 채널 뉴스 기자만큼이나 빈약한 ‘증거’를 갖고서 현실을 넘어 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느낀다는’ 이유로 진실이라고 말합니다.”(172면)

 

솔닛은 졸지에 “느낌을 생각이나 지식으로 혼동하는 사람이 되었다.”(173면) 이는 비단 솔닛이 살고 있는 미국에 국한된 현실은 아닌 듯하다. 지성의 역사에서 여성이 끼친 무수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식장 내부에서는 여성에게 ‘맡기면 좋을 법한 말과 글’이라는 식의 안일한 분류법이 작동하는 것 같다. 쓰인 맥락은 좀 다르지만 솔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할당된 배역”(12면)이 있다고 가정한다. 여성은 생활 가운데 감성, 기분, 느낌을 끄집어내는 고백자로 쉬이 규정된다. 그러한 고백은 다소 ‘들떠 있는 호소’로 폄하되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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