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에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 관한 서평을 썼다. 


<피로, 작가들의 건강법>(전문 링크)












글쓰는 사람이 쓰기에 대해 쓸 땐 두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해보자’의 글쓰기다. 야심이 넘실댄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보겠단 말엔 수줍음이 느껴지나 포부의 농도는 짙다. 다른 하나는 ‘해봤자’의 글쓰기다. 침울함이 뚝뚝 떨어진다. 뭐가 뭔지 모르겠기 때문에 이 생활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란 말엔 피로가 느껴지나 외려 건강의 수위는 높다. 각 작품마다 소재는 다르지만 대체로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물음이 겹쳐 있는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한겨레출판 2015)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후자다. 이 소설집에 참여한 열명의 작가들은 각자의 피로를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피로가 쌓이면 예민해진다. 간혹 선의는 비의가 되고 단어와 문장들엔 저의가 쌓인다. 피곤한 사람들은 이런 저의로 가득 찬 사회를 포착하는 눈이 밝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오늘날 ‘○○을 준비하다’의 동의어는 ‘놀(쉬)고 있다’이다. ‘불우하다’의 동의어는 ‘(다들 힘겨우니 그 정도는) 평범하다’이다. ‘월세’의 동의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의) 자세’다. 내가 보기에 작가들은 ‘잘 피로한’ 자들의 체질을 지녔다. 없으면 단련시켜야 한다. 그래야 버틴다. 해보자의 글쓰기를 얼른 ‘흑역사’로 부인하고 부질없음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찌질하진 않되 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들의 건강법이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까진 없다. 피로를 활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문장에 졸릴 틈은 없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을 관통하는 것은 ‘잘 표현된 피로’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 소설집은 열가지 색깔의 숙성된 피로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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