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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미국인 심리학자 헤르베르트 프로이덴베르거. '소진burn-out'을 하나의 학적 용어로 처음 만들었던 인물이다(이때가 1970년대). 

흥미로운 부분은 프로이덴베르거는 '소진'이란 용어를 만들었을 때, 평범한 일반 시민(자기 소모를 기꺼이 응하는)을 연구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남을 돕는 의사나 간호사 등 '조력자'가 직업인 이들의 심리를 연구하다 나왔다는 점(물론 연관성은 있겠지만, 그 당시의 어떤 맥락을 더 파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소진과 조금 다른 해석 혹은 추가된 해석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

이와 별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에는 번아웃 신드롬이 일상 속 개인에게 끼치는 난제가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209~211쪽 내용은 소진된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일상 자체가 쉼이 아니라 또 다른 지옥임을 고백한 인터뷰 내용이 나와 있다.

"이제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건만, 집에서의 생활도 평범한 이들의 것처럼 순조롭지는 않았다. 매일매일 하는 일들이 너무도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손쉽게 해치웠던 아주 사소한 행동들마저 이제는 일일이 선택과 결정을 거쳐야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 한 여성은 샤워하고 머리 감는 데만도 하루 종일 걸릴 정도였어요라면서 몇 시간 동안 화분 하나만 노려봤던 때가 생각나네요. 물을 줄지 말지 결정하기가 그렇게나 어렵더라고요 하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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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베커는 의료인류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꼭 챙겨두어야 할 학자다. 그는 의료인류학에서 처음으로 문화적 요소를 분석의 시선으로 끌어온 의료인류학계의 첫 세대였다. 
평생 주제는 노화와 만성질병, 불임과 리프로덕티브 헬스(성과 생식의 건강 권리로,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 개발회의에서 제창된 개념이라고 한다. 특히 여성의 건강과 성생활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는 견해)였다. 

그녀의 삶은 연구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자신의 아픔은 곧 연구 주제이기도 했다. 그녀가 만성질병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평생 천식을 앓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가 불임 연구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그녀의 남편이자 교수 로저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 로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는 걸 조심했다. 사람들의 선의에서 나온 염려를 자신이 과하게 받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매우 어렸을 때 이혼했다. 그녀가 어렸을 당시엔 결혼 실패가 쉬이 받아들여질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그녀가 관심을 갖게 된 테마는 ‘타인에게 낙인을 찍힌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정의를 위해, 가난한 자와 사회적 낙인이 찍힌 자를 대변하기 위해 연구 활동으로 실천을 해온 학자로 베커는 평가받고 있다. 이주민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섰고, 특히 보험 대상이 되지 못한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도 앞장섰다. 
남편과 함께 자주 산에 올랐던 베커는 네팔에서 트레킹 도중 앓고 있던 폐색전증이 심해지면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대표작인 Disrupted Lives: How People Create Meaning in a Chaotic World는 의료인류학의 필독서로 꼽힌다. 이 책은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현대인들이 병, 불임, 가까운 이의 죽음 등 갑작스러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겪는 사회적 고통을 다룬 연구서다. 의료인류학에 큰 기여를 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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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예술도서 전문 브랜드 타셴의 편집자이자 사진작가인 앨리슨 캐슬은 스탠리 큐브릭의 아카이브를 정리한 도서 2권으로 명성을 날렸다. 
(북 에디터로서 그녀의 이야기는 따로 정리해볼 생각이다)

1.뉴욕대에서 사진과 영화를 전공한 그녀는 큐브릭을 좋아하는 영화광이었고, 이러한 열정은 큐브릭과 관련된 어마어마한 자료집 책임편집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큐브릭의 모든 일상을 샅샅이 조사하고 수집했는데, 그중 캐슬이 2005년에 가디언과 인터뷰한 내용이 흥미롭다. 
캐슬이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매체 애호가'로서의 큐브릭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2. 인터뷰 내용을 요약하자면, 
스탠리 큐브릭은 컴퓨터 애호가였고, 얼리 어답터였다. 그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신 IBM 컴퓨터를 사서 작업했으며, 신기술을 통한 기기의 업그레이드에 신경 쓴 영화감독이었다. 
인터뷰어는 캐슬에게 묻는다. 큐브릭은 '인터넷'에도 흥미가 있었냐라고.
캐슬의 대답에 따르면, 큐브릭은 오늘날 같은 인터넷 시스템이 아닌 전화선을 사용한 느린 모뎀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아마 그가 인터넷이 활발한 시대에도 살았다면 우린 더 재미있는 그의 면모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3. 이외에도 큐브릭은 '자료광'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는데, 이에 착안한 앨리슨 캐슬의 또 다른 프로젝트가 『스탠리 큐브릭의 위대한 영화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의 출간이었다. 만들어지지 못한 작품 <나폴레옹>에 관한 
2800쪽에 달하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제작을 위한 자료집은 영화문헌사가 있다면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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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티앙 드 클레랑보. 클레랑보 하면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 자크 라캉이 스승으로 꼽은 인물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클레랑보 신드롬’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망상에 휩싸인 이를 분석한 그의 생각은 자신의 이름을 딴 ‘클레랑보 신드롬’으로 불리게 되었고, 많은 예술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한국에도 출간된 이언 매큐언의 소설 『사랑의 신드롬』이 이 증후군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자크 라캉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클레랑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나, 자신의 유일한 스승 자리에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넓게 보아 ‘자동증’ 즉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져 본인은 그걸 의식하지 않으며 기억도 없는 상태에 대한 정신의학적 정립도 클레랑보의 공로 중 하나다(자동증엔 자기 생각이나 행위가 모두 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체험인 ‘작위체험’, 몽유병, 간질, 히스테리성 발작 등이 포함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이고 극적인 것은 클레랑보의 죽음이다. 그는 백내장에 시달렸으며, 나중엔 자살을 택했다. 자살 당시 그는 큰 거울 앞에 앉아 권총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거울 말고도 그의 주위에는 연구용으로 쓴 밀랍 모형이 있었다고 한다. 

*( 『로쟈의 인문학 서재』5장 번역비평: 내 울부짖은들 누가 울어주랴 파트에서 '끌레랭부'의 바른 표기가 '클레랑보'라는 지적에서 이 글은 출발했으며, 프랑스 위키, 아마존, 알라딘, 김석 선생의 『에크리』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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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가가 아닌 '번역가' 마르틴 루터에 다가가기. 번역에 관련된 책을 어제 하판하면서 공부해본 것은 '번역가' 마르틴 루터의 삶이었다.(근데 사실 종교개혁가가 아닌이란 표현은 써놓고 보니 모순 같다.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종교 개혁의 바탕이었으니)
'성경 번역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마르틴 루터의 실천은 특히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이 세상에 나온 이후 쏟아진 세간의 비판을 돌직구로 되받아친 『번역에 관한 공개장』에 나와 있다.

루터의 번역에 대한 의의는 단순히 라틴어를 독일어로 '옮긴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일상에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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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홍혜정의 글에는 이런 언급이 나온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관용적인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로써 독일어 표현이 더욱 풍부해졌다. 또한 시적인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를 통해 독일어가 아름다워지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아베 마리아, 그라티아 플레나Ave Maria, gratia plena”는 말 그대로 번역하면 “마리아는 은혜가 꽉 찼더라.”이다. 그러나 당시 평민들은 ‘꽉 차다’라는 말을 ‘배가 꽉 차다’, ‘맥주통이 꽉 차다’라는 뜻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루터는 이 말을 “마리아는 은혜로 충만하더라.”로 번역했다.}

한편, 성경 번역이 지나온 길을 정리한 대학 신문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도 나온다.

{루터는 이전까지 “고해성서를 하라”라고 번역됐던 라틴어 성경 구문(마태복음 3장 2절)을 그의 성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번역하며 직접 신을 대면하는 일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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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번역 관점을 이야기하자면, 번역이란 일종의 밭 고르기다.
큰 돌이 무성한 밭을 고르고 골라 편평하게 만들어놓겠다는 의도가 그에게 좋은 번역을 향한 의지였다. 
루터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이들을 향해 던진 직설은 다음과 같다.

"밭을 고른 뒤 쟁기질을 하기란 쉬운 법이지"

* 관심 있는 분들은 앤드루스대학교 하인츠 블럼 교수가 쓴 <창의적인 성경 번역가로서의 마르틴 루터>라는 세미나용 소논문이 있다. 구글에서 검색해 pdf로 읽기 가능하다.
Martin Luther as A Creative Bible Translator로 치면 나온다. 

『번역에 관한 공개장』또한 열람이 구글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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