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발표하러 온 교수들이 말이 아닌 주먹으로 붙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예의'로 포장된 유사 논쟁 속에서, '반대'의 언어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막전막후'처럼, 백분토론이 끝나고, 서로 할퀴고 뜯던 이들이 웃으며 악수하고 단체사진을 찍듯, 이 바닥에선 '명함의 의리'만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넥타이를 벗고, 소매를 걷고 차라리 주먹으로  서로를 엄청나게 패는 장면을 상상했다.(지루한 논쟁, 포장된 격론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일이 유일한 것이다) 왜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걸까? 이런 말을 그들에게 늘 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해괴한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이들이, 오히려 그런 해괴함 자체가 주장의 강건함을 보여준다는냥 과시할 때, 나는 그 태도들이 싫었다고. 왜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냐고. 사랑하는 것 자체를 왜 이렇게 변태처럼 비비꼬아서, '합리'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그럼으로써 그 미움이 자신의 사랑을 더 표현할 수 있을 것임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그럼으로써 여기에도,저기에도 양다리를 걸친 채, 시시한 사랑 고백을 글로,말로 채워놓았냐고. 

그래서,나는 그들에게 격투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차라리 시원하게 주먹으로 치고 받은 후, 질질 짜거나, 격함 이후에 온 그 멍한 상태에서 온 솔직한 고백들. 그게 우리가 하고 싶은 진짜 말, 진짜 고백, 진짜 언어가 아니겠냐고. ,난 반-지성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우리의 세계를 더욱 더 환하게 비쳐주길 바라는 쪽이다. 하지만, 매번 '긴장감의 유지'라는 말로, 학문 세계가 요구하는 규범 효과에 적셔져 있는 나의 가슴을 볼 때, 남아있는 건, 애정보다는 내 애정을 얼마나 예쁘고 젠틀하게 보일 수 있을지 염려하는 '방식'밖에 없다는 한 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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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에 필요한 건 어쩌면 지긋지긋할 정도의 감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성의 동료를  정말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정말 진정으로(내 사랑때문에) 미워할 수 있는 감성.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을 혐오할 정도로 사랑하는 단계까지 갔음을 고백하고 쟁투할 수 있는 감성의 단계. 이 단계를 가려면, (엉뚱하게도) 빼어난 논문 발표보다는, 주먹이 필요하다는 상상.  

 '고고한 자'들의 분노가 정작 학회나 세미나가 아닌,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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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으루다가 추천 한방~^^ 근데, 사진의 남자분들이 모두 저렇게 다리를 올려놓고 있네요, 허 참~ 쩍벌남하구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때려주고 싶은 부류입니다..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52   좋아요 0 | URL
하하하.그러고보니 다들 왜 저런 포즈를.^^

로쟈 2010-08-1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와 지젝이 '실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부른 거로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16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로쟈님. 참고로 '고고한 자'라는 표현은 예전 로쟈님 블로그에서 본 '고고한 표범'에서 변형된 것입니다.^^(뒤늦게 양해를 구합니다.^^;;)

穀雨(곡우) 2010-08-1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백분토론 후 펼쳐지는 이종격투기 엄청난 시청률이 예상된다는...^^ 맞아요.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포장된 논쟁의 표출이 때로는 토론 자체를 떠나 혐오스러울때가 있더라는 사실. 한 대 쥐어박음 좋겠다 싶으면서 말이지요.ㅋㅋㅋ
역시 고고한 자는 모두 젠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군요. 고개숙인 저 친구, 너므 불쌍해요...^^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23   좋아요 0 | URL
한때 지하철에서 제 모습이었습니다. ㅡ.ㅜ

미지 2010-08-1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학계뿐 아니라 일상 전체를 지배하는 바로 그 포장 '방식'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술을 많이 먹게 되는 걸까요?
폭탄주... 분노의 어두운 폭발... --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5:0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 쓰고 나서, 저도 가끔 학계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누군가에게(제 동료들에게)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어 두렵군요. 그래서 술은 자제하는 편입니다.크윽.

마녀고양이 2010-08-1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계는 모르겠지만, 회사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보면
회의 석상에서 엄청난 주장, 다툼, 심지어 재털이까지 날아다닙니다.
매번 서로의 입장은 평행성을 긋죠... 그런데 진짜 웃기는건,
지들끼리 슬쩍 술자리에 가서 여차저차 웃기는 매듭을 지어 온단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들이나, 그런 상술에 익숙하지 않은 벤처 업체들은 먹히기 어렵죠... ^^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24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회사 프로젝트 회의 풍경도 궁금합니다.

pjy 2010-08-1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거시기 하게도 멍석깔아주면 못하는 이상한 분들이 많죠~~
대부분의 확실하고 솔직한 의사표현과 제대로 된 타협은 회의말고 딴 곳에서 이루어지죠ㅋ 저도 완죤 공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3 01:18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확실하고 솔직한 의사표현과 제대로 된 타협은 회의말고 딴 곳에서 이루어지죠ㅋ -> 공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