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죽었다
작년 6월 18일,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진 그녀의 어린 딸을 만났다.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골목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 넷이 만나기로 했는데 두 명이 안 나왔다고... "만나서 뭐 하기로 했는데?" 물어보니 그냥 이것저것 하면서 놀기로 했단다. "지금 한 시도 지났는데 아이들이 안 오니까 이모 집에 가자."고 했더니 선뜻 따라 왔다.
초등학교 3학년, 이제 곧 4학년이 된다. 제 엄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알아 온 아이, 태어나선 우리집 가까이로 이사와서 커나가는 걸 지켜 봤던 아이다. 일하는 제 엄마가 가끔은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우리집에 데려다 놓기도 했던 아이. 어릴 땐 우리 막내가 예뻐하며 잘 놀아줬는데, 둘 다 기억하지 못했다. 크는 아이들은 자주 만나지 않으면 서로의 모습을 잊어 버리는지, 우리 막내도 제가 예뻐했다는 기억은 하는데 아이는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 이 아이 *지 때문에 여러번 가슴이 아팠다. 유난히 깔끔하고 멋쟁이였던 제 엄마가 살아 있을 땐, 누구보다 입성이 반듯했는데... 하얀 겨울파카는 앞자락과 소맷부리가 시컴시컴 때가 묻었고, 긴머리는 산발한 채 예전의 귀티는 보이지 않았다. 운동화도 진창에서 놀았는지 엉망이다. 제 엄마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게 했을 텐데... 엄마 없는 아이의 이런 모습에 콧날이 시큰거렸다.
별 반찬도 없으니 김치볶음밥이나 해 먹고 영화 보자고 했더니 좋아라 했다. 지난 연말에 영화를 같이 보려고 아이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안됐다.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어떤 남자 아이가 주웠는데 갖다 준다더니 그 후로 전화도 안 받아서 정지해놨고, 아빠가 다시 사준다고 했단다. 김치 볶음밥을 해서 따로 덜어줄까, 아니면 이모랑 언니들이랑 후라이팬에 놓고 같이 먹을까? 물었더니 자기도 같이 먹겠단다. 집에서도 언니랑 아빠랑 가끔 그렇게 먹는다고... 글쎄, 대단한 부자들은 어떻게 사는지 몰라도 우리네 소박한 이웃들은 다들 이렇게 비빔밥이나 볶음밥을 같이 떠 먹으며 산다. ^^
엄마가 없으면 아이들은 기가 죽는다. 활발하고 당당하던 아이였는데 많이 움츠러든 모습이나 편하지 않은 듯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지야,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배부르면 그만 먹어도 돼, 억지로 먹거나 그러지는 마!" 하고 말했더니 숟가락을 놓는다. 8시에 아침을 먹었다고 하더니 조금 배가 고팠던 듯 제법 많이 먹었다. 시원한 배즙을 마시고 귤을 까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가 김치를 했는데 언니랑 저도 도왔고, 아빠는 할머니가 하는 걸 봐서 김치 담그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세상에~ 아줌마인 이모도 김장하기 귀찮아서 안 하고 얻어 먹는데, 너희 아빠가 이쁜 딸과 잘 살려고 단단히 맘 먹었구나, 정말 너희 아빠 대단하시다!" 칭찬을 하면서도 마음이 싸하다. 제 엄마 있을 때부터 아이들 할머니가, 둘째네 손주들만 봐주고 이 아이들은 소홀히 한다고 많이 서운해 했는데... 며느리가 세상을 뜨고도 맘이 안 좋다고 들여다 보지 않으신다더니, 애들 아빠가 도움 없이 살려고 독한 마음을 먹었구나, 그 마음이 읽혀졌다.
오늘 시작한 '꼬마 니콜라'나 '아바타'를 볼까 시간표를 확인하는데 더빙이 없어 망설여졌다. 초등생들과 같이 영화를 많이 봐서 자막 영화는 30분이면 집중력이 바닥나 언제 끝나냐고 수없이 묻는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런데, 컴퓨터 화면을 보던 아이가 '전우치'를 들먹인다. 제 언니도 봤고 친구들도 봤다고... 나는 '전우치'를 봤는데, '아바타'라면 두 번 볼 수 있지만, 전우치는 두 번 볼 영화는 아니잖는가! ㅜㅜ 그래도 어쩌랴, 오늘의 주인공이 보고 싶다는 걸 봐야지. 정작 아이가 보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는데, 아이한테 먼저 묻지 않고 내맘대로 고르려고 했던 게 미안했다. 우리 어른들이 무심히 범하기 쉬운 잘못이 바로 이런 거다.ㅜㅜ
영화 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아서 귤을 까 먹으며 멸치를 다듬는데, *지가 왔다니까 이웃의 와일드 보이 엄마가 보러 왔다. 같이 이야기 하며 멸치를 손질했다. 저희집에서는 멸치똥을 빼놓지 않고 먹는 사람이 알아서 빼 먹는단다. 우리집도 원래 그랬는데 요즘은 멸치똥을 빼서 식탁에 두면 반찬으로 고추장을 찍어 먹거나 수시로 들락거리며 먹는다.^^ 절반을 나누어 봉지에 담아 주며 집에 가서 먹으라고 했더니, 이모네 멸치가 더 맛있다고 한다. 엄마의 손길없는 썰렁한 식탁이지만, 아이는 이제 밥도 하고 세탁기도 돌릴 줄 안다며 일요일엔 언니랑 같이 청소도 한단다. 엄마 없는 아이들의 때이른 홀로서기는 눈물겹지만, 그렇게 세상 사는 지혜와 방법을 배워가며 단단해지리라 믿는다.
밥을 먹을 때 보니까 젓가락질이 엉터리여서, 바르게 고칠 마음이 있는가 물었더니 해보겠다고 한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 약국에서 파는 에디슨 젓가락을 사줬다. 열심히 연습하고 잘 되면 나무젓가락으로 콩집기를 하라며 검은콩도 나눠주었다. 나는 아이들이 젓가락질을 잘못하거나 연필을 잘못 잡는 걸 보면 그냥 못본체 할 수가 없다. 특히 여자애들은 다음에 엄마가 돼서 자기 아이에게 가르쳐줘야 하니까, 반드시 바르게 해야 된다고 집착한다.
영화를 보기 전 팝콘을 사고 먹고 싶은 음료를 고르라고 했더니 500원짜리 뭔가를 골랐다. 종업원이 그건 음료가 아니고 쏘세지라고 했다. 쏘세지가 먹고 싶은 거야?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럼 500원이라서 고른 거야?" 물었더니 그렇단다. "이모가 모처럼 사주는거니까 비싼거 골라도 괜찮아."했더니 "그럼, 콜라 먹을게요."한다. 아~ 아이가 음료수 하나도 덥석 맘대로 고르지 않는다. 유난히 남에게 신세지거나 폐끼치기 싫어했던 제 엄마를 닮았는지, 아니면 아빠가 단단히 일렀는지...... 다시 마음이 짠해진다.ㅜㅜ
나는 두번 째 보는 전우치였지만, 아이는 재미있게 깔깔 웃으며 잘 봤다. 오늘은 이 아이의 이모가 되어 멋진 데이트를 하기로 했으니 풀코스로 모셔야지 맘 먹었다. 영화 끝나고 언니 나오라 해서 같이 저녁 먹을까, 아니면 파리바게트에서 빵을 사줄까? 물었더니 "저야 빵 사주는게 좋지요." 그런다. 그래~ 네 엄마가 빵도 잘 사줬는데 아빠는 그런 거까지 신경쓰진 못하겠다 싶어 빵을 사러 갔다. 먹고 싶은 빵을 고르라고 했더니 매장을 한 바퀴 돌아보곤 선뜻 담지 못한다. 네가 먹고 싶은거나 한번도 안 먹어서 궁금한 것을 골라보라고 했더니, "아무거나 괜찮으니 이모가 골라주세요."그런다. "아니, 네 맘대로 골라봐. 이모는 *지가 뭐 먹고 싶은지 모르잖아."했더니 달랑 4.200원짜리 샌드위치 하나 담는다. "언니 거는 안 골라?" 했더니 "언니랑 나눠 먹을게요."한다. 아~ 얘가 오늘 여러번 시큰거리게 하네. 그냥 눈치 보지 말고 덥석 골라도 되는데... 결국 언니 샌드위치도 추가하고 피자빵과 미니 치즈빵을 골랐더니 거금이 나왔다. 사실 나도 우리 애들에겐 이렇게 비싼 빵은 사주지 못한다. 일부는 적립금으로 결제하고 나머지는 카드 긁었다.
둘이 팔짱을 끼고 바람 부는 어스름 밤길을 걸어 아파트까지 데려다 줬다. 이미 여섯 시 반이 되어 언니가 집에 와 있었다. 깔끔한 제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게 느껴졌다. 아이 방은 출입금지라고 메모가 붙어 있어, "이모가 보면 안돼?" 물었더니 어제 난리를 쳐놔서 안 된다고 했다. 슬쩍 방문을 밀었더니 학교도서실에서 빌려왔다는 책이 보이는데 제목이 '다른 엄마 데려 올래요' 다. 내가 전에 리뷰를 써서 아는데 유쾌한 이야기지만 엄마 없는 아이가 제목에 끌려 빌려왔을 생각을 하니 또 마음이 아프다.
이웃 엄마가 와서 '며칠 전 꿈에 네 엄마를 봤다'고 하니까 아이는 자기 꿈에도 엄마가 잘 온다고 했다. 이모 꿈에는 안 오는데 다음에 엄마보면 성주이모가 보고 싶다고 말해주라며 웃었다. 영화보러 가면서 그 말이 생각나서 다시 물었다.
"*지야, 꿈속에 엄마가 오면 뭘 해?"
"영화를 본 적도 있고, 그냥 같이 있어요."
'아, 그렇구나. 아무 것도 안해도 그냥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엄마구나!' 설핏 눈가가 젖는다. 이렇게 어린 딸을 두고 어찌 세상을 등졌는지 그녀가 다시 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