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번을 살아도, 산다는 건 사랑하는 거야

6월 19일 금요일 오후 2시 30분, 같은 모임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언니, 00이 소식 들었어?"
"아니~ 무슨 일인데?"
"언니, 00이 죽었대~ 어제 밤에 00학교로 연락와서 공부하다 갔다는데 좀 알아봐."
"  ~~~  "

그 후 몇 사람한테 더 연락이 왔고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2인분의 김치볶음밥을 해놓고,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딸을 보듬고 울다가 오늘 밤 늦을거라며 장례식장으로 갔다.  

장례식장엔 초.중 동창회와 지인들이 보낸 화환과 동창들이 있었지만 학교 엄마들은 별로 없었다. 그녀의 죽음을 누구에게 연락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같이 모임했던 엄마들에게 유족을 생각해 다녀가라고 했다. 그리곤 그녀가 보고 싶어했던 아이 초등1학년 때 담임샘께 연락을 드렸고, 어린이회장단으로 같이 활동했던 엄마와 각별하게 지냈던 독서회원들에게 연락했더니 다들 늦게라도 와 주었다. 나는 그녀가 결코 잘못 살지 않았다는 걸 찾아와 준 그들을 보며 확인했다. 남편에게 흔적이라도 남겼는지 물었더니, "자기가 가야할 길을 알았다. 내가 좋아서 가는 길이니 원망하지 않는다'는 짧은 메모를 남겼다고 했다. 그렇게 다 버리고 떠났으면서 무엇이 못마땅한지 찡그린 영정사진이 마음을 아프게 했고, 아이들과 놀이에 빠진 철없는 작은 딸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렇게 내 슬픔과 제 슬픔을 버무려 술도 마시고 접대를 하고 돌아오니 새벽 2시였지만 쉬이 잠들지 못했다. 


10년 전, 아들이랑 그녀의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을 해서 인연이 되었다. 큰딸 친구 엄마들하고는 연배가 비슷했지만, 아들 친구 엄마들하고는 나이차가 많아서 나는 키작은 왕언니였다. 젊은 엄마들하고 어울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방에도 갔고 술도 마시며 분위기 맞춰주는 언니노릇을 해왔다. 젊다 못해 어린 것들이 맹랑하게 굴때도 있었고, 자기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철딱서니도 있었다. 그중에 이 엄마는 유독 어려서 나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고, 붙임성 있고 애교 있게 굴어 많이 많이 이뻐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같은 반이 되고 싶어해 넌지시 담임샘께 말씀드려 줄곧 같은 반을 했었다. 2학년 때인가~ 우리집 곁으로 오고 싶다며 100미터 거리로 이사를 왔고, 다른 엄마 둘도 나중에 같은 골목으로 이사 와서 모두 곁에서 살았다. 내가 공부방을 시작했을 때 아이들을 맡겼고, 경제적으론 다들 어려웠지만 마음으론 형제나 자매처럼 지냈다. 이들 때문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외에도 진정서와 탄원서까지 써봤으니 참 우여곡절 많은 이웃들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모델같은 몸매로 아줌마들이 부러워했다. 둘째가 기저귀를 떼면서 화장품 일을 시작했고,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세일에서 손을 떼곤 농협마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참 열심히 살았다. 커피 세일하면 하나라도 더 팔아줄려고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내 커피 주문을 받아줬고, 야채코너를 맡았을 때 마감시간 무렵 떨이도 많이 해줬다. 그녀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 챈 패션매장에서 그녀를 스카웃했고,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을 찾은 그녀는 날개를 단 것처럼 살았다. 세일이 있으면 미리 문자를 주어 저렴하게 구입하도록 해줬고, 나 역시 옷을 하나 사려면 꼭 그녀에게 갔었다. 다른 엄마들도 그런 마음이어서 그녀는 탁월한 판매원으로 대접받았다. 

옷이 날개라서 모델같은 그녀는 더욱 화려한 멋쟁이가 되었다. 기분에 따라 과감한 스타일의 변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변신이 학교 엄마들의 질시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고, 나 역시 대담한 차림과 진한 향내가 싫어, 두 딸의 엄마와 가정주부라는 틀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가끔은 충고도 했었다. 외모가 화려해지면서 그녀는 동창들의 시선이 싫지 않았고, 밤늦게 술을 마시고 어울리는 일도 잦아졌다. 그래서인지 남편에게 쌓인 불만을 내게 풀때면 아무리 부처님 같은 네 남편도 그런 것까지 용납하진 못한다는 말로 브레이크를 걸기도 했었다.

2005년 8월부터 근처에 사는 엄마들과 모임을 했는데, 언니들이 하는 모임이라면 들어오고 싶다기에 뒤늦게 받아줬다. 하지만 모임을 하는 3년 간 그녀는 성실하지 않았다. 우리는 저한테 시간을 맞추느라 밤 10시에도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모였고, 저 쉬는 날에 보자면 요일을 가리지 않고 날짜를 정했지만 그녀는 모임을 등한시했다. 게다가 우리를 더욱 못 견디게 한 것은 연락이 없다는 거였다. 여섯 명 모두 저보다 언니였고 각별하게 친한 언니도 셋이나 됐지만, 못 나올 때도 번번히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문자를 씹는 일이 다반사여서 우리도 마음을 바꾸게 됐다. 3년 적금이 끝나는 올 2월에 모임에서 빼기로 했고, 본인에게 통보해 뜻이 있으면 모임에 나와 이야기하라 했지만 그녀는 한번도 오지 않으며 술친구들만 만나고 있었다. 결국엔 우리도 마음을 접었고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됐다.

그녀가 모임에 잘 안 나와 마음을 접었을 때도 한편으로 완전히 닫지 못했다. 들려오는 소식이 좋지 않았고 많이 힘들어서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들렸다. 그녀는 감수성이 예민해 비오는 날이면 늘 우울해했고, 때론 술먹고 싶다 해서 동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줬는데, 술친구가 많이 생겼는지 최근엔 나를 찾지 않았다. 작년 6월, 공원에 모였다 헤어질 때 집 앞 치킨집에서 생맥주를 마셨고, 그 후 11월 모임에 왔다가 술을 찾기에 까투리에서 맥주를 마신 게 끝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자기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많이 아파서 입원했었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무작정 갔는데 막내오빠가 찾아왔었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더 캐물어야 했을까?

지난 3월 이삿짐을 실은 차가 골목에 있기에 기웃거리다 그녀 부부를 만난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2킬로 정도 떨어진 작은 아파트로 간다고 해서, 남편이 사업하다 빚이 졌다더니 힘든가 생각했다. "사람 사는 거 다들 비슷해, 말을 안해서 그렇지 뚜껑을 열면 너만큼의 어려움이 다 있으니 잘 참고 견디자. 빚으로 말하면 너보다 우리가 더할 것이고, 힘들 땐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도움이 되니까 언제 만나서 이야기하자." 며 헤어졌다. 그 후 만나지는 못했지만 3월 모의고사 문제집을 사줬고, 6월 모의고사 문제집도 사달래서 연락을 해도 답이 없어 6월 문제집은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   

최근까지 가까이 지낸 엄마가 겨울에 찾아와 말하기를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할만큼 심각하다. 남편을 만나서 억지로라도 끌고 가서 꼭 치료받게 하라고 했다'는 말을 해도, 난 그녀가 죽을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안했다. 나도 이혼은 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다. 아니 자식을 두고 죽는다는 건, 내 사전에 없다. 그래서 최진실도 그녀도 용서가 안된다. 어떻게 자식을 두고 목숨을 끊어?   


그녀가 최진실처럼 세상을 등져버리니 미안하고 미안한 일만 남는다. '세상을 버릴 만큼 힘들었는데 아무 도움이 못 되었고, 이렇게 힘들었는데 한 번도 돌아볼 생각을 못했구나!' 내 발등을 찍고 싶다. 좀 너그럽고 관대하게 다독였다면 이런 파국을 맞지 않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왔다. 더구나 그녀의 소식을 들은 엄마들이 '언니를 계속 만났으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 이런 말들을 해서 더더욱 미안했다. 곁에서 가까이 지내던 엄마도 자꾸 술친구를 만나지 말고 언니들이랑 지내라고 권면했더니 자기와도 거리가 생겼다고 말했다. 잠시라도 위로받으니 술친구를 만나는 거고 자기와 코드가 맞으니 그리 되겠지~ 친구되는 일은 누가 권하거나 금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는가!  

'내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동안 잘 해준 일만 생각하고 내심 그녀에게 삐쳐 있었다. 한 3 년전부터 나를 서운케 한 일들이 종종 있었지만, 저도 살기 힘들어 그러겠거니 이해했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 일에 서운케 한 것은 용서가 안되었다. 자식이란 그런 존재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의 어미라면 모성애를 바탕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열일곱 살 고1 큰딸과 초등 3년 10살 작은 딸을 두고 어떻게 마감했을까? 이해도 용서도 되지 않아서 아프다. 자신이 아픈 것보다 두 딸들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기 아픔이 너무 커서 친정엄마와 두 딸의 아픔까지 헤아리지 못했을까? 그게 우울증이라는 무서운 병의 실체인가 보다.  

어제 한 줌의 가루로 변한 그녀를 나주 선산에 묻으러 오르는데 비가 내렸다. 혼자 가는 길이 서러워서 같이 울어주라는 빗물인가! 다들 슬픔을 참고 있는지 여느 죽음과 무언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다. 막내딸을 잃은 친정엄마의 끝없는 애통만 있을 뿐, 철없이 숨바꼭질하고 노는 작은 딸이야 그렇다 쳐도, 엄마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아는 큰딸이나 남편의 상심과 애통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장대같은 열한명의 조카들도 언니 오빠의 반응도 왠지 낯설었다. 그녀의 친정엄마가 와 계실 때 팥죽도 쒀다 드리고 부침개도 해서 몇 번 말동무를 해드렸는데 어머니는 나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죽기 전 날, 혹은 당일 날까지 술친구를 했던 지인들도 마지막 길엔 오지 않았다. 저한테 쓴소리를 했던 이웃의 세 언니, 가끔은 애들을 돌봐주고 간식도 챙겨줬던 우리 셋만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친정언니나 오빠도 마지막까지 함께 한 우리가 그녀와 어떤 사인지 묻거나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으로 돌아와선 안녕히 가시라는 말만 하곤 자신들의 승용차에 오르기 바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분위기가 이상하고 또 이상했는데 집에 돌아와 받은 전화 한 통화에 의문이 풀렸다.  

그녀는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집을 나와 있었고, 막내오빠와 그녀만 같은 엄마고 다른 형제들은 엄마가 다르다는 것이다. 아아~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외롭고 힘들게 살았구나,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언니들이 아는 걸 못 견뎌했고, 우리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 안되는 언니들이었을 뿐... 나는 10년이나 언니로 지내면서 그녀에 대해 뭘 알았지?  

그녀가 이사하는 날, 자기는 친정언니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말을 왜 건성으로 들었을까? 친정 자매의 정이 얼마나 돈독한지 아는 나로서는, 제 언니한테도 털어놓지 못하는 걸 그녀의 자존심 때문일거라 해석했을 뿐이다. 그래서 친정언니에게 못하면 우리한테 혹은 나한테라도 말해서 속을 비워야 살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사연이었음을...그녀가 이웃 언니에게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이제야 알것 같다. 그녀는 나보다 더 친한 언니가 있었지만 그 엄마도 남편이 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어 저를 돌아봐 줄 상황이 안됐다. 나역시 내코가 석자라 예전처럼 저를 불러내 밥을 같이 먹거나 영화를 보고, 혹은 술친구를 해주지 못했다. 그녀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고립무원에서 결국 우리 언니들마저 밀쳐냈으니... 우리 모임의 세 사람이라도 예전처럼 언니노릇을 제대로 해줬으면 그녀가 죽지 않았겠구나 생각하니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다. 

사람이 외로움으로 죽을수도 있다는 걸, 누군가의 죽음으로 깨닫는 건 너무 안타깝고 힘든 일이다. 사람이 산다는 건 사랑하는 일이다, 자신이든 가족이든. 그녀는 자존감이 부족했다. 자신이 가진 장점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비교하며 늘 무언가 부족해 했다. 그녀 성장과정의 결핍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을거란 생각에 더 안타깝다. 자신을 조금 더 사랑했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백만 번 산 고양이처럼 그녀도 다시 태어난다면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기를, 그래서 남은자들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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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같이 있고 싶은 엄마, 그녀의 딸과 데이트하다
    from 엄마는 독서중 2010-01-29 02:47 
    작년 6월 18일,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진 그녀의 어린 딸을 만났다.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골목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 넷이 만나기로 했는데 두 명이 안 나왔다고... "만나서 뭐 하기로 했는데?" 물어보니 그냥 이것저것 하면서 놀기로 했단다. "지금 한 시도 지났는데 아이들이 안 오니까 이모 집에 가자."고 했더니 선뜻 따라 왔다.   초등학교 3학년, 이제 곧 4학년이 된다. 제 엄마 태중
 
 
행복희망꿈 2009-06-2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외로움으로 죽을수도 있다는 걸, 누군가의 죽음으로 깨닫는 건 너무 안타깝고 힘들 일이다.라는 순오기님의 말씀이 제 가슴에도 확~꽂히네요.
너무 슬프고 힘든일이 있으셔서 저도 많이 안타깝네요.
부디~ 그 동생분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09-06-21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아픈 일이에요.ㅜㅜ
부디 명복을 빕니다 _()_

세실 2009-06-2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마음 아픈 글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많이 사랑하며 살아요....

마노아 2009-06-2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고, 안타깝고, 또 무섭기까지 합니다. 외로운 우리네 인생, 서로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데, 보듬어지지 않는 마음들이 너무 가여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로 2009-06-2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읽고, 다시 읽어봐요,,,,,순오기님도 충격이 크셨겠어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바람돌이 2009-06-2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비는 외에 무슨 말을 더할까요? 저도 전에 주변에 잠시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는 분을 봤었는데 이게 참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좀 더 근원적인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울증이란게 막상 닥치면 누구도 병처럼 안보니... 마음이 아프네요.

꼬마요정 2009-06-22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아.. 가슴이 아픕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워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순오기님.. 힘내세요..

후애(厚愛) 2009-06-22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바람 2009-06-22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눈물이 나서 접어 둡니다

비로그인 2009-06-22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게 될 수도 있다게 참 슬프지요? 남겨진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컸으면 좋겠네요..

소나무집 2009-06-2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이 아프네요.

같은하늘 2009-06-2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이 필요할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꿈꾸는섬 2009-06-23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순오기 2009-06-2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남겨주신 님들 고맙습니다~~
산 사람은 또 힘내서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야지요.

루체오페르 2010-07-0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주기 글부터 백만번산 고양이, 이글까지 쭉 봤습니다.
아...
산다는건 죽는것보다 어렵다는 말이...생각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순오기 2010-07-05 21:0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어른들은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라'하셨지요.
산다는 건 죽는 것보다 어려운 절대 명제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