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반적으로 한강 작가의 소설이 쉽게 읽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책을 구매해놓고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시처럼 읽힌다는 짧은 단락의 문장들이 어려울 것 같았다.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올해 그의 작품을 거침없이 읽어보고자 결심했기에 어쨌든 이 책도 시작해야했다. 심호흡을 하며, 책속의 문장들과 단단히 싸워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잘 읽혔다. 막힘없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편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다양하게 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한 뼘 더 깊이 내려가 더 큰 의미를 알아내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그들이 살아내는 인생을 이해할 수 있기에 내가 더 착하고 정의롭게 산다고 착각한다.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같은 존재들이 그런 나의 자만을 깨준다. 한강의 은 그 어떤 종류의 필터도 통하지 않고 과거와 사물, 인간을 직접 마주한다. 거기에서 인식하고 느낀 것들을 압축된 문장들로 표현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깊이 있지만 애써 그것에 대한 의미를 찾기보다 가볍게, 천천히 읽으며 직관적 느낌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이 더 좋다. 작가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는 흰(p.186)’이 담긴 글을 쓰기 원했다. 그러기에 이 책에는 작가의 경험과 죽음, ‘에 대한 마음이 들어있다.

 

내가 나고 자란 남쪽의 따뜻한 도시에는 눈을 거의 볼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도시가 마비될 정도이다. 어릴 때(아님 중학생 정도일 때) 많은 눈이 내려 그 도시가 하얗게 잠긴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진기를 꺼내 눈이 쌓인 여러 풍경과 흰 색을 배경으로 한 가족사진을 찍어주셨다. 지금도 그 사진이 남아있다. 집에서 입는 옷차림 그대로, 별 표정 없이 눈 위에 일렬로 선 나의 가족들이 있다. 나에게 은 색깔보다는 이미지와 직관으로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선명하기도, 흐릿하기도 한 연결고리이다.

 

딸아이를 낳기 전, 배내옷을 장만했을 때, 그 옷이 너무 작아 신기했었다. 이렇게 작은 것으로 어떻게 아기를 감쌀 수 있을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 나온 아기는 배내옷보다 훨씬 작았다. 배내옷이 너무 커 어른 옷을 입은 아이처럼 보였다. 배내옷에 폭 파묻힌 생명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눈물이 났다.

 

작가의 어머니는 혼자서 여덟 달 만에 첫 아이를 낳는다. 산달이 많이 남아 아직 아기의 배내옷도 준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산통을 참으며 흰 천으로 배내옷을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는다.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배내옷을 입은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얼마나 막막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그때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혹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상상하며 폴란드의 바르샤바 거리를 걷는다. 죽은 아기가 살아있는 작가를 찾아오는 길에, 살아있는 아기가 작가대신 사는 삶에 자신의 희망과 웃음을 넣을지도 모른다.


[태어나 두 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는 어머니의 첫 아기가 만일 나를 이따금 찾아와 함께 있었다면나로서는 그걸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그이에게는 언어를 배울 시간이 없었으니까한 시간 동안 눈을 열고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고 했지만아직 시신경이 깨어나지 않아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오직 목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죽지 마죽지 마라 제발알아들을 수 없었을 그 말이 그이가 들은 유일한 음성이었을 것이다.

-p.32]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작가는 아들과 함께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떠난다. 그곳에서 걷고 또 걸으며 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에 대한 글을 쓴다. ‘소년이 온다의 도시와 바르샤바가 흰빛으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에는 왠지 슬픔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재건되고 복구되는 사물과 인간의 힘이 에 담겨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작가는 흰 것의 목록을 만든다. 그 중 하얗게 웃다라는 문장이 있다. 하얗게 웃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백목련에 잠시 머물며 옛 친정집 정원을 생각했고, 백발에 나를 대입했다. 그리고 수의....엄마는 아버지와 당신의 수의를 미리 마련해 두셨다. 아버지에게는 옥색을, 거의 20년 후의 당신에게는 연분홍의 수의를 입혀 세상을 떠났다. 흰 수의가 아니라서 난 조금 덜 슬프게, 하얗게 웃으며 그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소설을 읽었다. ‘을 주제로 한 각 제목에 짧게 씌여진 문장을 읽으며 천천히 쉬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은 직관의 묘미가 가득하다.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었다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얼굴로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알 수 없었다대체 무엇일까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동시에 연약한 것사라지는 것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p.64]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5-07-04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깊이있는 페넬로페님~!! 큰 스토리가 없어서 금방 읽을수 있었지만 이해하긴 싶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작품~! 저는 검은 사슴 읽으려고 준비중입니다~!!

페넬로페 2025-07-04 23:37   좋아요 1 | URL
네, 옆에 두고 조금씩 읽으면 좋을 문장들이 많았어요.
저도 이렇게 짧고도 강렬한 글을 쓰고 싶더라고요. 저는 한강의 여수의 사랑을 다음 책으로 정했어요^^

새파랑 2025-07-05 10:09   좋아요 1 | URL
여수의 사랑 좋습니다. 사랑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레이스 2025-07-05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흰 안에 소제목의 배열과 구조가 연결되더라구요. 놀라웠습니다.
바르샤바에서 쓰고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수정을 했다는데 그 과정이 그려졌습니다.

페넬로페 2025-07-05 18:17   좋아요 1 | URL
네, 작가가 당연히 치밀하고 의미있게 연결시켰을 것 같아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예약주문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일상도 버거운데, 짊어져야 할 불행은 왜 그렇게 많은지…크로스비에서 겪는 각자의 회한과 감정을, 모두에게 적용되는 삶으로 연결해준 작가의 문장이 너무 좋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행 바구니’를 올리브가 열어준다. 우리 모두에게 이 괴팍하고 당당한 올리브가 들어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래에 대해 이토록 광대한 책이 읽을까? 허먼 멜빌이 창조한 피쿼드호에 이 세계의 양면성이 모두 들어있다. 우리는 각자 개인으로 이 배에 승선하지만, 공동체라는 그물에 갇혀 ‘모비딕’이라는 보이지 않는 허상을 생각없이 쫓아간다. 시공을 초월한 문제점을 던져주는 이 책은, 그래서 고전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5-06-16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 만 책 <모비 딕>.

다시 닐거야 하는데...
언제가 될 지 모르겠네요.

하도 읽을 책들이 넘쳐
나서요.

페넬로페 2025-06-16 15:44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너무 곁가지가 많아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강렬한 책인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감동 포인트인 낭만주의 문장도 괜찮았습니다^^

새파랑 2025-06-1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해군출신이어서 이 책이 특히 재미있더라구요 ㅋ 논문 문학 느낌이었습니다~!!

페넬로페 2025-06-16 19:18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해군 출신이군요.
저는 읽으면서도 배나 보트의 원리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완전 백과사전입니다 ㅎㅎ

망고 2025-06-16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비딕을 아주 예전에 어릴때 읽었는데 기억이 거의 안 나요😭다시 읽어야 할까봐요 지금 읽으면 재밌게 읽을 수 있겠죠?😂

페넬로페 2025-06-16 20:54   좋아요 1 | URL
모비딕이 이 책이 소설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거의 고래에 대한 백과사전식 서술이 들어있어 재미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저는 여기에 있는 상징과 철학이 너무 좋았어요.
재미있는 부분도 많아요. ㅎㅎ

yamoo 2025-06-20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비딕은...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는데...기억나는게...내다리내놔 밖에 없으요~~ㅎㅎ

페넬로페 2025-06-20 10:59   좋아요 0 | URL
네, 정말요.
책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고래에 대한 얘기는 읽고 금방 잊어버리게 돼요 ㅎㅎ
 
드립백 바깥여름 - 12g, 7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4월
평점 :
품절


더운 여름이면 드립백 커피가 최고다. 간편하고 쉽게 추출되어 수고를 줄여준다. 바깥이 아닌 본격적 무더위가 시작된 요즘, 무난함과 특이함이 섞인 다양한 맛의 커피로 더위를 달래보자! 마음 따뜻한 친구로부터 선물까지 받아 기쁘게 감사함의 시럽을 첨가해 본다. 달콤 쌉쌀하게 한모금 주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The Hours)>는 딸아이가 어렸을 때 비디오대여점에서 DVD로 빌려본 영화이다. 아이가 잠들면 남은 집안일을 하고 피곤하니까 내일을 위해 일찍 자야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아이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것 같다.

 

<디 아워스>1999년 퓰리처상과 펜 포크너상을 동시에 받은 마이클 커닝햄 작가의 소설이다. 작가는 열다섯 살에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감동받아 그 작품의 오마주격인 이 소설을 집필했다. ‘댈러웨이 부인이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에 대한 것이라면 디 아워스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1949년의 로라 브라운, 현재의 클러리서 본이라는 세 여자의 삶 또는 상태가 교차되어 서술되고 있다.

 

그땐 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도 읽지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는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단한 여배우가 한꺼번에 출연하는 영화라서 안 볼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단숨에 알아챌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자의 상황과 감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해서 마음이 무거웠고, 감정이 축 쳐진 상태로 며칠 동안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주변의 도움 없이 거의 혼자 아이를 키워야했던 나는 로라 브라운에 가장 눈이 갔다. 당시의 내 상황이 로라와 조금 비슷해서일 것이다. 매일이 지루하고 반복적으로 흘러 힘들었지만 내 의지로 낳은 아이를 제대로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강했다. 투철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로라 브라운은 중산층 가정의 전업주부이다. 로라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고 지금 임신 중이다. 남편은 다정하다. 남들이 보기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로라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며 우울증을 앓고 있다. 어느 날 로라는 두 아이를 남겨 놓고 집을 나가버린다. 그 당시 나는 로라 보다는 로라가 남겨둔 아이들의 감정을 더 헤아렸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로 그들이 받을 상처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공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라의 아들 리처드 브라운은 결국 나중에 자살한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는 결혼생활 과정에서 여자의 심리 변화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도리스 레싱 작가 너무 대단하다. 이것은 지성의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는 소설의 첫 문장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결혼생활은 지성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쉽고, 지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벌이가 좋고 현실적인 분별력이 있으며, 겸손과 유머를 갖춘 매슈와 수전은 잘 어울렸고 그들의 결혼에는 아무 장애가 없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남들이 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간다. 수전은 임신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네 명을 낳고, 그들은 리치먼드에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한다.

 

수전은 남편과 아이, 정원, 집을 위해 일하고 매슈는 그들의 안정과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다.두 사람의 삶은 자기 꼬리를 문 뱀 같은 단조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매슈는 간간이 바람을 피우지만 두 사람은 최대한 지성을 바탕으로 한 결혼생활을 해야 하기에 수전은 그를 이해해준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해 참고 희생하며 산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웬만하면 그렇게 살아야한다. 거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별나다’, ‘세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스스로 돈을 벌던 여자의 분노와 박탈감을 잘 알지만 가정이 잘 굴러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빈정 상하는 위로만이 있다.

 

결혼생활이 안정되고, ‘아이가 엄마의 손을 떠나는 시기가 올 때까지만 참으라고 매슈는 수전에게 말하지만 수전에게 그런 자유가 과연 오기는 하는 것일까?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는 자식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바쳐야하는 가족 환타지를 보여준다. 어부의 심장인 배를 팔고, 집을 팔고, 금싸라기 같던 양배추 밭을 팔고.....거기다 자식이 꼬박꼬박 부쳐준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알토란같은 통장을 죽으면서 남겨놓아야 한다. 빠꾸를 해도 언제라도 환영할 것이며, 사고를 쳐도 내 자식이기에 감싸 안아야 한다. 아무래도 죽기 전에는 자식이 부모의 손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폭풍과 모래 구덩이에 허우적대고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는 공허한 수전은 자기만의 19호실을 원한다. 호텔방과 다르게 그곳이 설사 더럽고 불결한 곳이라도 수전은 온전히 그곳에서 자신속의 광기와 악마를 달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수전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그런 고독한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절대적인 고독,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 고독이 필요했다.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영화 디 아워스를 봤을 때의 나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읽는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19호실로 가다를 읽으며 계속 수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전을 통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한 로라 브라운도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과 아이를 버려두고,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오해마저도 감당한 채,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려고 한 여자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 책임감은 많이 희석되었고 나는 거의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허용적이다. 남아있는자의 상처와 고통을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 현재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된 자의 깊은 공허는 살아갈 이유보다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




 

 

 









헤다 가블레르1890년 헨리크 입센이 발표한 희곡이다. 입센은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한 작품을 많이 집필했다. 헤다는 부유한 장군의 딸로 29세이다. 헤다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 여성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남자 중, 그 누구도 온전히 헤다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없다. 헤다는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 무난한 남자인 테스만을 선택한다. 헤다는 6개월 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저택에서 살지만 권태와 불안을 느끼고 결국 자살한다.

 

헤다와 수전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삶과 내적인 사랑의 괴리, 순수한 존재론적 욕망의 실현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공허, 그것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가 자신을 잃게 만든다. 자신만의 19호실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난 그들이 꼭 여자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약간만이라도 기울어진 생각의 시계추로 충분하다.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를 먼저 보고 온 딸아이에게 연극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평소에 말을 잘하는 아이인데 계속 버벅대며, 재미없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딸아이에게 이 연극을 보면서 이해가 잘 안됐구나?”라고 하니 딸아이는 그렇다고 했다.

 

내가 본 헤다 가블러역시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헤다의 감정이 복잡했고, 그녀의 행동 모두를 다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딸아이보다는 헤다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었고, 연극 무대의 어느 자리쯤에 나를 갖다 둘 수 있었다.

 

헤다 가블러역의 이혜영 배우는 정말 잘 어울렸다. 얼마 전 영화 파과를 봤기에 더 반가웠다. 다만 원래 목소리의 톤이 부드럽고 약해 연극 무대에서 조금 잠기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5-06-12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혜영 배우님이시군요?
전 어느 외국 배우이거나 외국 작가님이신가 싶었네요.
전 이혜영 배우의 목소리나 그 톤을 참 좋아하는데 연극 무대에선 잠긴다는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네요.
그리고 따님이 이 연극을 보고 와서 감상을 재미없게 브리핑했다는 장면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어요.
19호실을 찾아갈 나이가 아니니 그 느낌이 뭔지 모두 공감하긴 좀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이런 연극을 보면서 페넬로페 님을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페넬로페 2025-06-12 15:05   좋아요 1 | URL
생각보다 배우님이 체구가 작으시던데 어떻게 파과에서 액션 장면을 소화했는지 모르겠어요.~~물론 대역배우가 있었다 하더라고요.
헤다 역할은 잘 어울렸어요.
19호실이 필요하고 이해할 나이는 제 나이쯤 되어야 될 것 같아요 ㅎㅎ
저는 엄청 공감하며 봤거든요^^

새파랑 2025-06-12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아워스 표지는 버지니아 울프인데 다른 작가네요~! 델러웨이부인 문학동네에서 새로 나와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19호실로 가다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페넬로페 2025-06-12 15:08   좋아요 1 | URL
디 아워스에 세 여자가 등장하는데 모두 댈러웨이 부인과 관련이 있어요.
도리스 레싱의 이 단편집은 다른 작품은 호불호가 있는데
일단 ‘19호실로 가다‘는 넘넘 좋게 읽었어요.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 공감할 내용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