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하느적, 수프 한 술을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태연히 얼굴을 돌려 부엌 유리창 너머 흐드러진 산벚꽃에 눈길을 보냈다. -p7
그러고는 무심히 여기저기 곁눈질해 가며 하느적 하느적, 마치 작게 날갯짓하듯 스푼을 움직이는데 한 방울의 수프도 흘리지 않고, 후루룩하는 소리도 접시 긁는 소리도 전혀 내지 않는다. -p9]
그때, 고등학교 국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왜 ‘사양’ 얘기를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 뒤의 맥락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선생님이 ‘사양’에서 수프를 먹는 여인의 모습이 제일 우아하다고 말씀하신 것만 기억난다. 아니면 당신이 읽은 책 중에 수프를 먹는 모습을 서술한 것 중에서 ‘사양’에서의 표현이 가장 우아하다고 하셨는지도 모른다. 국어 수업시간에 국어 선생님이 문학 작품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내 눈에 그녀는 선생님이라기보다 그냥 평범한 아줌마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꼬불꼬불한 짧은 파마머리에 매번 똑같은 투피스를 입고, 아주 세고 거친 말을 많이 하시던 분이라 그분의 입에서 나온 국어 시험용이 아닌 문학은 나를 놀라게 했다. 거기엔 나이 먹은 사람의 감성을 무시하고픈 10대의 자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놀라움과 궁금증으로 만난 ‘사양’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일본소설이다. 어렴풋이 어머니가 수프 먹는 장면만 기억나는 걸 보면 난 분명 그 책을 다 읽지 않은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어쩌면 그때의 국어 선생님보다 더 나이를 먹고, 더 아줌마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내가 다시 읽은 ‘사양’은 쓸쓸하고도 새로웠다.
수프를 먹는 장면은 ‘사양’의 제일 첫 부분에 나온다. 몰락한 귀족 계급의, 전쟁을 겪고 돈이 없어 도쿄의 나시카타초에서 이즈의 산장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던 가즈코와 어머니는 그곳에서 외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귀족적 삶에 익숙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육체적 노동도,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다. 생활력이 없는 이혼한 여성인 가즈코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부잣집의 가정교사 겸 하녀가 되는 것과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 경제적 후원을 받는 것이다. 말 그대로 ‘기우는 해’이다. 옷가지를 팔아가며 살아야하는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며 쓸쓸하고도 처량하게 살아간다.
[이 산장의 평온은 죄다 거짓이고 허울에 불과하다고, 속으로 생각할 때조차 있다. 이것이 우리 모녀가 신께 받은 짧은 휴식 기간이라 해도, 이미 이 평화에는 뭔가 불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머니는 행복을 가장하면서 나날이 쇠약해지고, 내 가슴속에 깃든 살무사는 어머니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살이 오른다. 나는 요즘의 이런 생활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지곤 한다. -p29]
전쟁이 끝나고 남방에서 돌아온 가즈코의 동생 ‘나오지’는 고등학교 때부터 마약에 절어 살았으며 나약하고 생활력 없기는 마찬가지인 도련님이다. 그는 계속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머니와 누나 가즈코를 괴롭히며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방탕하게 살아간다. 그가 쓴 ‘박꽃 일기’를 읽은 가즈코는 ‘길이 막혀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p76)' 동생의 괴로움을 이해한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큰 맘 먹고 불량해지면 어떨까를 생각한다. 자신도, 동생도 어머니도 그냥 불량하게, 그것도 ’딱지 붙은 불량(p91)‘으로 살기를 원한다. ’딱지 붙은 불량‘이란 단어가 생소하지만, 약간은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귀족적인 삶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는 인생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이 ’딱지 붙은 불량‘이 아닐까? 여태껏 가졌던 허울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의지로 살 수 있는 것이 ’딱지 붙은 불량‘인 것이다.
가즈코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6년 전에 만나 잠깐의 키스를 나눈 동생의 지인인 소설가 ‘우에하라’를 계속 마음에 두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우에하라를 통해 ‘딱지 붙은 불량’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낳는 일이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낡은 사상을 모조리 파괴해 나가는 저돌적인 용기를 가진(p107) 〈로자 룩셈부르크〉를 따라 도덕을 거스르고자 한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고 박해를 각오하라던 그 말씀을 새기며 가즈코는 출사표를 던진다. 예수는 그들이 미움 받을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가즈코는 자신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라고 생각한다. 유부남에다 술꾼인 우에하라를 다시 만나지만 그는 그녀에게 실망만을 안겨준다. 하지만 ’작전, 개시‘를 시작한 그녀에게 멈춤은 없다. 그대로 직진하며 그는 그의 아이를 갖고 나오지는 자살한다.
〈사양〉은 나이 들어 읽어야 할 책이다. 그래야 가즈코와 나오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다시 읽은 ‘사양’은 읽는 내내 나를 여러 감정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를 반복하다 마지막 ‘나오지의 유서‘에서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사람을 안다는 것,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배경과 속까지 다 들어가 봐야 한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사양‘을 지금 현재의 시각으로 읽거나 평가해서도 안 된다. 여성주의의 시각으로 본 가즈코는 결코 이해받지 못할 여자이다. 그냥 그 시대로, 몰락한 귀족 가문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으로 그녀를 만나야만 한다. 대책 없고, 기가 차지만 그녀의 계획은 그 시절에 할 수 있었던 한 여성의 몸부림이자 세상에 내딛는 용기 있는 발자국이다. 1900년대 초에 쓰여진 ’나쓰메 소세키‘ 소설 속의 여인들보다 1947년에 간행된 사양속의 여성인 가즈코는 훨씬 더 선구적이다. 남성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많다. 가즈코가 선택한 방법보다는 낡은 도덕과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혁명을 보아야만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1947년에 ‘사양’을 내 놓고 1948년에 자살한다. 이 책 마지막 부분의 ‘나오지의 유서’는 다자이 오사무가 이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세상의 사람들을 얼마만큼 깊이 이해하고 살고 있나’를 생각했다. 나의 지인의 딸은 중학교 때 왕따를 당했다. 아이가 중3이라 지인은 매일 딸아이를 학교로 데려다주며 조금만 참아라, 견디라고 했다.(물론 무조건이 아닌 여러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어느 날 그녀는 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딸아이를 불러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더 이상 학교로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이는 자퇴를 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채로 이번에 수능을 치렀다. 어쩌면 그녀가 딸아이를 불러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 순간부터가 그 아이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첫 시도였을 것이다. ‘나오지의 유서’를 읽으며 그 아이가 생각났다. 우리는 누구나 나오지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참고 살아간다. 또한 세상에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낙오자로 만든다. 힘들다고 하는 사람에게 너만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살아가는 데에 뭔가 한 가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나로선 안간힘을 쓴 겁니다. -P147
나의 자살을 비난하고 그래도 끝까지 살았어야 했다고 하면서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의기양양한 얼굴로 혀끝으로만 비난하는 사람은, 폐하에게 과일 가게를 해 보시라고 태연히 권할 만큼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p151
-'나오지의 유서‘ 중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집안이 급속도로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을 때 평소 애독하던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떠올렸다.(p165, 역자 해설에서) 본문에서도 체호프와 ’벚꽃 동산‘은 여러 번 언급된다. 격변하는 세상에 의해 몰락해서 자신의 집을 떠나야 하는 설정과 ’가즈코‘와 ’라넵스카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하다. 생활력이 없고 동정심이 많으며 대책 없는 귀여움을 두 여인은 지녔다. 그러나 류보비 안드레예브나보다 가즈코가 훨씬 더 혁명적이고 세상에 대해 저돌적이다. 가을부터 계속해서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과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많이 다른 느낌이다. 소세키의 글이 정돈되고 아름다운 하이쿠 같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은 감성적이고 보다 더 격정을 불러일으킨다. 둘 다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 좋다. 다음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읽어야겠다.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들 주변에서 낡은 도덕은 여전히 그대로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은 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다 표면의 파도가 아무리 요동친들 그 밑바닥의 바닷물은 혁명은커녕 꿈쩍도 않고 자는 척 드러누워 있을 뿐인걸요. 하지만 전, 지금까지의 1회전에서는 낡은 도덕을 아주 조금이나마 몰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태어날 아기와 함께 2회전, 3회전을 싸워 나갈 작정입니다.....
혁명은 아직, 전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많은, 안타깝고 숭고한 희생이 필요한 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희생자입니다. -P163~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