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의 한 가족 제안들 29
샹탈 아케르만 저자, 이혜인 역자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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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아케르만(1955-2015)은 벨기에 출신의 영화감독으로 47년간 4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고, 자전적 소설 두 편이 있다. 작가는 2015년 파리에서 자살했다. 브뤼셀의 한 가족은 작가의 아버지인 야콥 아케르만이 병으로 사망하고, 2년 후 48세인 샹탈(장녀)이 출간한 자전적 소설이다.

 

아마도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지 않았다면 난 샹탈 아케르만이라는 작가에 대해 끝까지 몰랐을 수도 있었다. 사실 이 작가의 가족에 대해 몰라도 살아가는데 전혀 상관없다. 그럼에도 책 뒤편의 인터뷰, 옮긴이의 글, 작가의 연보를 빼면 65페이지에 불과한 이 소설에 묘하게 빠져들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주제가 우리에게 언제나 기시감과 울림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마침표가 별로 없이 긴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다. 두 장 정도 큰 딸인 샹탈이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엄마를 소개한다. 남편(샹탈의 아버지)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엄마인 나탈리아 아케르만)는 넓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고 곧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다. 금요일마다 브뤼셀에 사는 친척 모임(유대인)에 가서 뼛속까지 온기를 느낀다.’ 멀리 멕시코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둘째딸보다 메닐몽탕(파리)에 사는 싱글인 큰 딸에게 자신의 간병을 조심스레 부탁할 예정이다.

 

곧 그녀는 1인칭 화자가 되어 현재와 과거의 삶에 대해 두서없는 말을 쏟아낸다. 의식의 흐름 같은 이 서술에 명백하거나 확실한 것은 없다. 남편, , 친척들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모두 양가적이다.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있다. 그것은 당연하다. ‘가족이란 존재는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지극히 대하기 어려운 족속들이기도 하다. 그들 나름의, 각자의 삶이 있기 때문에 의지하면서도 자제해야하고, 알고 있는데도 모른 척 해야 한다.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p.39) 안경을 바꿀 필요가 없었을 것이지만, 가족들이 흉해 보인다고 하니 바꾸고, 딸들이 구부정하거나 움츠리고 있는 걸 싫어하기에 애써 어깨를 펴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걱정이 끝이 없기에 그녀는 어떨 때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고도 한다. 한 번 상념에 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생각의 나락에 빠지기 때문이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인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 속에 담겨있는 엄청난 트라우마 적 감정들이 있다. 홀로코스트를 겪지 않은 유대인의 후손들은 매번 그것을 헤아려야하기에 또한 힘들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서사 말고도 집집마다 각자의 불행은 차고 넘친다. 누군가 아프고, 정신병이 있는 가족을 돌보느라 지치고, 돈이 부족하고, 뇌졸중이 오고, 치매에 걸리고, 그리고 죽는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나탈리아가 남편인 야콥을 회상하고 그의 병수발을 드는 내용이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나오고, 힘들게 남편의 병간호를 하지만 나탈리아는 한 번도 야콥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읽으면서 계속 나는 이것을 느꼈다. 사랑, 그리고 숭고하다는 것은 지키려는 자의 인내와 그것으로 인해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인 것이다.

 

샹탈 아케르만은 타자로부터 생각하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살았다고(p.77)’한다. 타자로부터란 말처럼 브뤼셀의 한 가족이란 타자들로 우리는 가족에 대해 되돌아보고, 질문하고 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 확실하지 않고 모호한 이 빠진 문장의 나열이 계속될지라도 가족이란 존재는 우리를 뼛속까지 따뜻하게해주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물론 아니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거기에서 비롯된 존재인 건 확실하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사랑의 전반적 문제가 다른 사람을 위한 건가, 스스로를 위한 건가?’ 중 어느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 둘 중 어느 하나에 무게가 더 실릴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물론 두개가 균형을 이룬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어휴,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숙제는 매번 이렇게 힘들다.

 

[그러면 나는 오늘은 그이가 음식을 다 남기지 않고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그이가 접시에 음식을 그대로 남기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이는 접시 한편에 음식을 다 밀어 두고는 결국 아무것도 안 먹곤 했다. 이걸 난 정말 견딜 수 없었고, 그이에게 안 먹으면 어떻게 나을 건데, 힘이 있어야지 하고 말했고, 그러면 그이는 먹어 보려고 조금 애를 쓰긴 했지만 못 먹었다. 그러면 나도 먹지 않고 전부 다 버리곤 했다. 남겨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그이는 식탁에서 일어났는데, 내가 그이를 조금 부축해 줘야 했고 그이는 오른 다리를 끌며 안락의자까지 갔다. 가끔은 가던 중간에 멈춰 서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고 한쪽으로 비뚤어진 입과 입술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p.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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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8-08 04: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딸의 입장으로 들여다보니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엄마를 위로하는 딸의 마음이 느껴져요. 딸 눈에는 너무나도 잘 보이잖아요. 엄마가 품고 있을 감정이요. (물론, 잘 안다는 이유로 감정을 끄집어내는 걸 엄마는 싫어할 때도 있지만요.) 제가 느낀 감정이 이 책의 내용과 맞는 것인지도 모르고 떠들었네요. :) 읽어봐야 알겠죠? 아, 힘든 마음으로 읽을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5-08-08 09:47   좋아요 2 | URL
저는 거의 대부분 엄마의 입장에서 읽었던 것 같아요. 다가올 늙음과 거기에 따라오는 물리적 현상들이 맘에 와 닿았어요.
이 책 읽으시면 세상 어디서든 가죡들의 상황은 비슷하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거예요. 거기에 각자 나름 다가오는 포인트가 다를 수 있고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 있어 힘들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담담하게 세상을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가 좋았어요^^

희선 2025-08-08 0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샹탈 아케르만이라는 이름 처음 알았습니다 다른 나라 영화 감독 이름 아는 사람 얼마 되지도 않는군요 샹탈 아케르만 부모님 이야기인 듯도 하네요 부모님이라 해도 조금 떨어져서 보는... 나탈리아가 야콥을 언제나 사랑했다는 걸 잘 보기도 했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5-08-08 09:49   좋아요 0 | URL
네, 아케르만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앖어 더 그런 것 같아요. 자식이 보는 부모의 모습들은 확실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서로 생각해주는 모습들은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5-08-08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과 돌봄, 가족 말은 이토록 간단하지만 결코 공존이 쉽지않은거 같아요. 거기에 경제적 어려움이 끼면 더더욱 어려워지는.... 인간 사이의 관계는 늘 어렵네요

페넬로페 2025-08-08 12:55   좋아요 1 | URL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가족들과의 관계가 쉽지 않은데, 아무래도 부모 입장이 자식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것 같아요.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비슷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책읽는나무 2025-08-10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직접 간병을 요구해 왔을 때 샹탈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어땠을까? 싶네요.
특히 남편의 간병을 거친 후였다면…
가족 관계라는 건 참 알 수 없는 관계인지라 간병과 돌봄이 참 어려운 일인 것은 분명하나 그 일을 통해 가족간의 유대감과 사랑을 재확인하게 되는 순간들도 참 많아요. 그래서 훗날의 이별이 슬플지언정 그 때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기억하여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약이 되지 않나. 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질병과 고통의 순간을 가족들과 나누는 시간은 정말 어려운 시간들. 순간 순간 들게 되는 양가적 감정들…어떻게 현명하게 해석하고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로군요.^^

페넬로페 2025-08-10 11:40   좋아요 1 | URL
세상 모든 부모가 그렇듯 이 책의 엄마 역시 자식에게 매번 조심스러워해요. 자신의 간병도 그렇게 부탁할 것이고, 아마 큰 딸은 바쁘지만 와 줄 것 같아요. 이 책의 문장도 그렇고 서술 방식도 그냥 보통 사람이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저와 남편의 미래의 삶이 이 책에서 예상되어 그런 것도 같고, 딸아이에게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항상 생각해서도요.
맞아요. 순간순간 드는 가족에 대한 감정들이 결코 쉽지 않고, 그 누구보다 신중하게 대처해야 하니 남보다 더 어려운 관계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