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믹서 - 4월 후기


나쁜 유전자


3- ‘사나운 유전자함께 읽기

 



벚꽃이 떨어지는 4월 둘째 주에 세 번째 사이언스 믹서모임을 가졌습니다. 꽃구경의 유혹을 잠시 뒤로 하고 오전부터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분들이 더 계셔서 안도(?)와 반가운 마음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정우현 교수님의 저서 나쁜 유전자(2025)를 읽고 있는데요, 그 중 제3사나운 유전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3장의 흐름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동물의 폭력성과 관계된 유전자가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았던 유전학의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의 답을 찾는 탐색의 출발점으로 저자는 스탈린 시대를 선택합니다. 때는 스탈린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생겨난 수많은 문제 중에서 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Holodomor)이 발생한 시기입니다. 스탈린의 소련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인 우크라이나의 농촌에 집단농장을 강요했습니다. 예상한대로 이 정책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저항했던 이들은 무자비하게 억압과 숙청을 겪었고 농부들은 곡물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농민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종자까지 독재자는 모두 수탈해갔던 것이죠. 그 결과 정확한 숫자가 집계되지 않지만 2-300만 명 정도가 굶어 죽었다도 추정됩니다. 독재자답게 스탈린은 서방 세계에 이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언론을 봉쇄하고 억압하기도 했더군요. 이 때 식량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줄 구원 투수로 트로핌 리센코라는 유사 과학자가 등판하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의 비호 아래 등판했던 리센코라는 인물이 끼친 영향은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식 진화론을 부정했던 소련의 독재 체제는 이를 지지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을 숙청했고, 소련의 유전학과 농업은 수십 년간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숙청당한 과학자의 피붙이 가운데 젊은 유전학자 드리트리 벨랴예프가 있었고요. 그는 해외에서 인기 있던 은여우의 품종개량 연구원이었습니다. 그가 독재 당국 몰래 한 연구가 바로 은여우 길들이기였습니다.


 

곧 벨랴예프는 동물의 가축화과정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기본적인 방법은 순한 은여우 개체를 골라서 순한 개체끼리 세대를 이어 교배를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실험을 반복하여 50년 정도가 지나자 거의 모든 은여우가 개처럼 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 형성되어 갖추게 되는 한 생물종의 진화적 특성을, 인간의 손으로, 그것도 극히 짧은 기간에 얻어낼 수 있었음을 입증한 결과였습니다. 이 실험은 인류가 아마도 몇 만 년 동안 형성된 개의 순한 특성을 한 인간의 생애주기 이내(70년에 가까운 실험)에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연구였던 것이죠.


 

무엇보다 이렇게 가축화된 동물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커다란 눈, 축 늘어진 귀, 동그랗게 말린 꼬리, 몸집에 비해 큰 머리, 짧아진 주둥이와 다리, 귀여운 반점 등”(125)의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유형성숙적 특징이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체가 아닌 어린 개체에게서 보이는 특징이 성체가 되어서도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특징을 지닌 동물들은 공통적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 결과는 이미 가축화된 말(horse)과 가축화에 실패한 얼룩말, 현존하는 150종의 사슴 가운데 유일하게 순록만 가축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운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은여우의 가축화실험처럼 동물의 가축화에는 여전히 알아야할 것이 많은 수수께끼라는 점에 더하여, 얼룩말과 대부분의 사슴도 이렇게 품종 개량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던져 주네요.


 

이 상황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본다면 길들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메타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질문은 누가 누구를 길들이는가?’가 되겠지요. 과학자들은 우리가 가축화한동물 역시 이 과정에 개입하고 참여한 인간을 길들인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공진화의 관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죠. 특히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는 순수하게 유전적인 진화만 일어난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개체를 둘러싼 환경이나, 집단 내에 형성되거나 이와 영향을 주고받는 환경/배경이 함께 진화 과정에 참여한다는 인식이 중요한 거지요. 또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명 사나운 유전자혹은 폭력성을 드러내는 유전자가 있는지 줄곧 찾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알아낸 사실보다 알아내야할 사실이 더 많긴 하지만, 과학 연구는 결국 어떤 행동이나 성질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134)을 확인시켜 주었죠. 더 많이 알아낼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보이게 마련이라는 교훈은 유전학에서 빠질 수 없을 듯합니다.


 

다윈의 진화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동물 종의 진화에 대한 개념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따라가면 결국 인간의 진화에 도달합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가축화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진화와 가축화개념에 대응하는 설명을 찾도록 하는데요, 그 답으로 제시된 가설 하나가 자기가축화입니다. 이는 진화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이 제안한 가설입니다. 그는 하나의 종인 인류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진화해왔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관점은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악하다(‘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고 보았던 사상가 토머스 홉스의 맥락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인간은 침팬지와 더불어 선천적으로 폭력적인 종이지만 자기가축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길들여 야만성과 공격성을 효과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종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으니까요.


 

이 개념을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랭엄 교수의 제자인 브라이언 헤어입니다. 그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1)에서 인간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자기가축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인간에게 협력하게 하는 능력, 다정해지는 특성을 갖게 해주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인간은 자기가축화 과정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고 설명하는 것이죠. 하지만 과연 인간의 본성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는가, 라는 주장에는 아직 반론의 여지가 많은 듯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은 가장 포악하고 잔인했기에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종이라고 말하니까요.


 

나아가 저자인 정우현 교수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결론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특별한 형질을 가졌다고 해서 어떤 환경에서든 보편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질 리는 없기 때문”(139)이라 언급하지요.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조건에서 언제나 살아남을 수 있는 형질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적자’(the fittest)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자연선택이 일어날 때, 그 변화에 맞추어 생존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140)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적자란 결국 그 종 혹은 개체가 결과적으로 살아남고 나서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자의 판별은 오로지 사후적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한편 저자는 자기가축화 가설의 원인이 다소 단편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음도 지적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단순히 폭력성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환경과 문화, 교육 등의 복합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기가축화 가설의 다정함이 지니는 이중성에도 주목합니다. 인간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다정함을 키웠다면, 그만큼 타인에 대한 배타성과 잔혹성도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죠. 내가 몸담고 있는 내집단과 그 경계 밖의 외집단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는, 이타적인 존재일수록 극명하게 나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똘똘 뭉치는 집단일수록 외집단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죠. 하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브라이언 헤어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타적인 집단의 외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자기가축화의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폭력성이 줄곧 감소해왔다는 입장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 설명하지만 썩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의 점차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해졌다면 이는 집단 생존의 관점에서 오히려 불리해졌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화의 법칙이 다양함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인데, 집단이 다정함이라는 특징을 얻게 됨으로써 오히려 다양성이 줄고 보다 획일적으로 변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며 3장을 마무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명료하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에서와 같이 인간의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함이 더해졌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이 모든 걸 다 잠재적으로 지닌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가 처한 환경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여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성향을 지닌 존재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란 상황 및 맥락 의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앞에서 이타성과 배타성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동전을 던졌을 때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그 사람의 본성도 달라질 수 있다는 시각으로 이해해보는 겁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여전히 인간이 드러내는 폭력성을 단순히 자기가축화과정의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이해가 좀 두루뭉술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본성이 (체질적으로) ‘좀 더 다정해 졌다는 무리한 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렇다면 저자가 제3장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견해와 견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핑커는 자신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4)에서 인류가 현재에 이르도록 폭력성이 감소해왔음을 다양한 통계 자료와 수치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원동력으로 인간이 성취한 환경적 요인을 꼽습니다. 교육과 발단된 문화와 같은 요인이 이를 가능케 했다는 입장을 취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수치와 통계 자료를 끌어오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 입장이라,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 업적과는 별개로,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는 설득력이 약해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에서 저자인 정우현 교수가 핑커의 견해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폭력성과 친화성은 환경적 요인이나 문화적 발달, 교육 방식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지 않은가”(141)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점에서는 핑커의 입장과 비슷한 결을 갖고 계신 듯하긴 합니다. 하지만 저자도 핑커의 논거 제시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자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 토머스 홉스와 장-자크 루소를 소환해보면, 핑커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으로 (과거에는) 폭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의 입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반면 인류의 폭력성이 감소해온 요인으로 교육과 문화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루소의 입장(계몽주의적?)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정우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인류가 폭력성이 감소하고 협력성/이타성이 증가하여 얻게 된 이익만으로 이 특징을 인류 성공의 보편적인 요인으로 지목하기에 핑커의 견해는 너무나 단편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인간이 보이는 협력성/이타성에 상존하는 이중성의 문제가 여전히 남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편이라고 여기는 내집단에 비해 외집단에는 여전히 강한 배타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이란 존재는 이처럼 복잡다단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전자만 보더라도 폭력성을 발현하는 단 하나의 유전자가 존재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사나운 유전가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여기에는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애초에 인간에게 혹은 그 이전의 동물에게 폭력성은 왜 생겨났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방이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로 가득한 초원에서 살아가는 얼룩말을 극도로 예민하고 성질이 고약한(?)’는 특징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겠죠. 얼룩말에게 폭력성은 어쩌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와일드카드가 아니었을까요. 사자나 호랑이, 고릴라처럼 강하지 못했던 인간이 성공적인하나의 종으로 남게 된 건,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처럼 인간이 협력적으로 큰 집단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인간이 폭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어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그 종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제3장에서 저자는 앞의 1, 2장과 달리 보다 강한 어조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표현이 틀렸음을 분명히 하며 마무리합니다. 특히 우리가 폭력성이라고 부르는 생물체의 특징이 단지 진화 과정에서 사라져야할 특성이 아니라 종의 보존에 필요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물론 인간의 경우에 폭력성은 보다 다양한 맥락이 존재하므로 좀 더 주의를 기울여 판단해야 겠지요. 나아가 한 존재가 폭력성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유전자만의 특징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존재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이유, 맥락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봅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폭력성에는 유전자와 환경이 복잡하게 얽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배후에 있었음을 한번쯤은 의심해보라 말하는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실과 부재의 계절에...

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열화당] (2024)



 

나는 경계를 넘어본 사람들에 무의식적으로 매료되곤 한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히샴 마타르(Hisham Matar)는 리비아계 영국 작가로서, 정치적인 이유로 경계를 넘었던 경계인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군인이자 외교관/정치인으로 리비아의 카다피 독재 정권의 반체제 인사였다. 가족의 이런 배경으로 저자가 영국에서 대학생이던 1990년의 어느 날, 망명 생활 중이었던 저자의 아버지가 납치되어 리비아로 압송된 후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966월의 어느 날 카다피 독재 정권의 명령에 따라 1270명의 정치범이 처형당했을 때, 그의 아버지도 실종되었고, 이후 30여 년간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의 경계를 넘었던 인물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이중, 삼중의 경계를 넘은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무슬림 국가인 리비아에서 기독교가 주를 이루는 국가 영국으로 경계를 넘은 것, 그러니까 같은 기원을 가졌음에도 서로 경쟁하고 배척했던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계를 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10세 때까지 쓰던 아랍어를 버리고 영어를 받아들여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저자의 배경은, 그가 이중, 삼중의 경계를 넘은 혼종의 인물임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을 거듭 읽게 된 이유는 어쩌면 저자의 이런 개인적인 배경에 공감하게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군복무 시절 전역을 3주 남겨놓고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나이에 마주한 아버지의 기약 없는 죽음 이후 30년이 다 되어가고, 나는 그 때 이후로 아버지를 잃었다고 여긴다. 오늘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날(43)이다. 누군가는 내가 아버지를 잃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실의 역사를 관통해왔을 테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의 캄포 광장 한 가운데에 섰을 때, 아버지에 대한 상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푸블리코궁 앞의 광장에 높이 서 있는 탑 주위로 또렷하게 둥근 달이 떴다. 서늘하게 저물어가던 저녁, 깊은 물색을 띤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또 옷깃을 스치며 목에 스며드는 바람의 한기를 느꼈을 때, 내게도 한동안 무감해졌던 부재의 감각이 되살아났던 것 같다. 문득 모든 이는 살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누구나 겪게 될 상실이지만, 누군가는 더 고통스럽게 경험하게 마련이다.

 

시에나에 가게 되면 저자처럼 시의 경계 부근에 있는 공동묘지를 가보고 싶었다. 묘지는 인간의 취약성과 덧없음을, 그리고 기억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침묵의 소리로 증거 하는 장소인 까닭이다. 묘지는 나란 존재가 삶의 경계에서 먼지처럼 부유하는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게 하는 장소다. 비석 사이에 존재하는 텅 비어있음의 감각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이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소개하는 시에나 화파의 프레스코화를 시에나에서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면서 비로소 부성의 부재에 대한 감각이 환기되었나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저자에 더 공감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이유로 시에나 화파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일 테다.

 

중세의 끝무렵, 시에나 화파와 피렌체 화파는 일종의 경쟁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1348년에 시에나를 덮쳤던 흑사병은 300여 년간 이어진 시에나 화파의 종말을 결정적으로 앞당겼다. 반면 피렌체 화파는 살아남았고, 이들은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더욱 기반을 단단히 다지며 이어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견인하고 꽃피웠다. 흑사병은 무심하고 매정할 정도의 판결을 내렸던 셈이다. 역사 앞에서 운명이 극명하게 나뉘었던 시에나 화파와 피렌체 화파. 그런 까닭에 나는 취약하고 단명했던 시에나 화파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언젠간 시에나 화파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시에나 화파의 운명에 이끌리는 것처럼, 우리가 예술작품에 끌리는 이유는 예술이 기억과 구원에 대한 갈망, 때로는 절망적 몸짓이 드러나는 출구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혹은 우리에게 예술이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게 하여 비로소 위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실종되었던 아버지의 자녀로서, 자신이묘지 없는 애도자였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시에나 화파에 그토록 매료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부재한 존재를 호명하며 상실한 자를 애도하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나아가 예술은 결국 우리의 현재, 삶을 진득하게 감싸 안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아내와 함께 어느 시에나 화파의 그림 한 점을, 오랜 친구를 보러 가듯 보고 또 보러 가는 날들을 고대했다는 마지막 문장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책 속으로]

[1] "1990년, 내가 아직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열아홉 살 때, 불가사의하게 십삼세기부터 십사, 십오세기에 걸쳐 활동한 시에나 화파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해에 아버지를 잃어버렸다."(12)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13)
- P12

[2] "장식을 삼간 외부와 장려한 내부, 겉에서 보이는 침착한 초연함과 안에서 보이는 극진한 보살핌과 사려 깊음, 열렬한 심장을 감춘 겸손하고 또 절제하는 얼굴의 장난이 시에나의 관습이자 그 도시가 즐겨 펼치는 마술이다."(19)

"시에나 사람들은 간단하게 ‘일 캄포(Il Campo, 들판)‘라 부른다. 이곳은 시에나가 제 속으로 뻗어 나가 닿은 곳, 시에나가 완전히 쏟아져 나온 곳이다. 하지만 또한 시에나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 광장은 끝이요 시작이며, 공공연하게 선포된, 두 흐름의 장소이다."(21) - P19

[3] "나는 이처럼 오랫동안, 내 생의 거의 절반 동안, 잠들고 깨는 일을 그녀와 나누고 있음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런 건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감사다."(41) - P41

[4] "사랑과 예술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오직 책 속에서만, 아니면 그림 앞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이의 전망 속으로 들여질 수 있다." - P48

[5] "내 나침반은 이 도시에만, 이 도시의 꼬불꼬불한 길과 모퉁이, 이 도시의 책략과 결정, 이 도시의 취향과 의도에만 이끌려야 했다. 시에나는 내 나침반의 북극성이었다." - P70

[6] 한 무덤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 끝을 모르는 죽음의 식욕을 일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망자들의 숫자가 산 자들을 압도한다. 현재란 검은 천 가장자리에 두른 금색 테두리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도한가. 그런 생각이 우리 종족에 대한 더없는 열광과 음울한 자긍심과 함께 밀려왔다." - P76

[7] "자기 책들이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신과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책들의 끈질긴 유효성이 특정한 사유와 생각의 양상들을 가능케 하거나 가능성을 높인다고 믿은 점에서, 몽테뉴는 옳았다." - P92

[8] "잠시 앉아서 새소리를 들으려고 눈에 띄지 않게 계속을 훤히 볼 수 있는 비밀 벤치 쪽으로 향하면서 그 가족이 묘지 없는 애도자인 나를 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제야 나는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에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다."
- P93

[9] "두 아브라함 신앙 중 어느 하나의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 한 문화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 이 경우엔 지금껏 너무나 오래 다른 아브라함 신앙과의 대결에 몰두해 온 다른 문화 안에서 성년에 이른다는 것은, 역사의 요점이 어느 한쪽이 옳다는 걸, 어느 한쪽이 신을 더 사랑하거나 더 참되거나 더 인간적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있는 양, 영성이라는 것이 마음의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미소 짓는 신이 메달을 건네줄 결승전까지 가는 경주인 양, 편협한 구별 짓기와 비난과 사악한 동기를 가진 비교와 차별과 공포의 어휘들이 가지는 논리에 너무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피나코테카에 선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요점을 빗나간 듯이 보였다." - P111

[10] "흑사병은 유럽에 극심한 종파주의와 사회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 역병은 범죄자 집단에게 득세할 기회를 주었다. 시에나에서 그들은 빈집을 털고 살아 있는 이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 P123

[11] "상상력과 가치 구조 자체가 변했다. 알베르 카뮈가 그 역병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그래서였다. (...) 그 인간 본성을 폭로하는 역병의 힘을 믿었다. 카뮈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끌렸던 것이 유토피아였다." - P127

[12] "상상력은 세상의 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는 ‘죽음’이 새겨지지 않는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조르조 바사리에게 보낸 편지에 그렇게 썼다."

"많은 예술가에게 죽음의 광경은 통과 의례이자 인간 생명의 치명적 취약성에 대한 맹렬한 교육이며 영혼의 덧없는 일시성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 P128

[13] "시에나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한결같고 너무 작으면서도 무진장해서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알레고리 또는 마음의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스쳐 가는 모든 영향력과 펼쳐지는 모든 날과 더불어 변화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이기에, 소박하고 특별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도시로서의 자아였다." - P133

[14]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손을 맞잡고 그저 그 눈을 오랫동안, 아니 아마도 영원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방법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 P154

[15] "그 그림은 우리가 제일 바라는 것, 낙원보다 더 바라는 것이 알아봐지는 것임을 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아무리 형태가 변하고 바뀌어도, 우리의 어떤 것이 우리가 그토록 오래 사랑했던 이들에게 지각될 수 있도록 견디어 남는 것 말이다. 아마도 예술사 전체가 이런 야심의 전개이리라. 모든 책, 그림, 교향곡이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낱낱이 알려 주려는 하나의 시도인 것이다." - P156

[16] "우리는 그 그림을 보러 갔고, 이후로 그 도시에 머무른 석 달 동안 거의 매주 그 그림을 다시 보러 갔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를 보러 가듯이 그 그림을 보러 가는 날들을 고대했다." - P1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방연희 사이언스 믹서 4월 모임 공지

《나쁜 유전자》 3장 - 사나운 유전자



책방연희(홍대)에서 1월부터 다시 시작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가 이번 주에 있습니다. 벌써 이파리가 돋아나고 꽃이 피는 4월이 되었네요. 이번 주에는 벚꽃잎이 많이 떨어질 듯한데요, 대신 꽃사과나무 꽃이 개화준비를 하고 있네요.


올해는 정우현 교수님의 과학책 <나쁜 유전자>를 여러 달에 걸쳐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이번달은 ‘과학의 달’이기도 해서 고민이 됩니다. 이번 주말에 꽃구경 갈지, 과학책을 읽으러 갈지 말이죠.
 

그럼에도 책방으로 오시는 분들이라면 <나쁜 유전자> 3장 ‘사나운 유전자’을 가볍게 읽고 오시면 됩니다. 이 책은 ‘유전자’라는 큰 범주 아래 각 장이 분명한 주제로 독립적이기도 해서, 지난 1회, 2회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셨던 분들도 부담 없이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3장만 읽고 책에 언급된 내용을 소재로 감상과 견해를 나누어 주시고, 또 몰랐던 과학 지식을 점검해보시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또 3장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여 허기(?)를 느끼시는 분들은 3장에 언급 혹은 인용된 참고 도서를 읽고 보다 깊은 이야기를 모임의 2부에서 나누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언급된 영화나 기타 도서들에 관한 정보도 참고하시면 깊이 읽기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겠지요.


이번 4월 모임은 제3장 ‘사나운 유전자’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가축화’ 문제, 이타성과 인간의 본성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11시에 모여 사이언스 믹서의 1부와 2부를 무사히(?) 견디어 내신다면? 이제 꽃구경 가시면 되겠습니다. 곧 만나요!


모임 신청 및 문의는 책방연희 블로그나 인스타를 통해 하시면 됩니다.



일시: 2026년 04월 11일 (토) 11시-13시
장소: 독립서점 책방연희 홍대점













@chaegbangyeonhui

#과학책읽기 #책방연희 #나쁜유전자 #정우현 #사이언스믹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11 Season 17 과학이슈 11 17
박진희 외 10명 지음 / 동아엠앤비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이 꼭 알아야할 과학이슈 11 Season 17

[동아엠엔비] (2026)

 



학창 시절에 배운 과학 지식을 훗날 다시 돌아보면, 지금의 학생들은 보다 더 깊어진 지식을 더 이른 나이에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발견한다. 과학 분야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지식이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 전공자라고 해도 새로운 발견을 일일이 따라가는 일은 벅차다. 늘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성과들에 관심을 두어야 현대과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맥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국내의 각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하고 일반인들을 위해 꾸준히 글도 쓰는 연구자들이 많아진 것은 고무적이다. 이런 변화 가운데 최근 주목하게 된 책이 <미래를 읽다 과학이슈 11> 시리즈였다. 이번에 읽게 된 책은 시즌 17권으로 표제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11>로 바뀌었다. 아마도 대상 독자를 일반인 위주에서 과학에 관심을 가진 청소년으로 구체화한 시도로 보인다. 좀 더 조사해보면 이 책은 자연계열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삼은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시즌 15호에 실렸던 상온 초전도체 논란을 흥미롭게 읽었었는데,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읽는 이들는 분명 큰 틀에서 최신 과학 이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해당 이슈가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를 일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 먼저 주목한 주제는 양자역학 100주년이었다. 작년(2025)이 유엔이 선언한 양자과학과 기술의 해였는데,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이론을 정식화한 해가 1925년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자이론의 태동으로 범주를 확대한다면 1900년 즈음 베를린 대학의 교수였던 막스 플랑크가 양자개념의 도입한 일을 포함시킬수도 있겠다.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건은 아인슈타인과 인연이 있다. 19세기까지 물리학에서는 빛이 파동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우세했는데, 플랑크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인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이론을 정립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양자 이론의 정립에 큰 기여를 했는데, 문제는 아인슈타인이 양자 역학의 관점들에 강하게 거부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양자 세계의 여러 현상들처럼 양자역학의 역사에는 이처럼 아이러니한 사건들이 있다.


양자역학 100주년이었던 2025년에는 아마도 이를 기념하는 취지에서 양자 역학에 본격적으로 기여한 연구자들에게 노벨상이 돌아갔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호에 실린 2025 노벨과학상에 대한 글은 양자역학 100주년에 대한 글과 닿아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AI 기술에 대한 관심과 인프라 투자가 공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피부로 실감한다. AI 기술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여러 반도체 소자들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 반도체 소자들의 구동 자체가 바로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했던 결과다.




또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양자 컴퓨팅 분야는 어떤가. 2025년 노벨 물리학상은 양자 컴퓨팅의 토대를 마련한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는데, 양자 컴퓨팅 분야 자체가 바로 지난 100여 년간 양자역학의 지식이 축적된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양자 컴퓨팅은 양자역학 연구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양자역학 100주년글에서 소개되어 있는 양자 컴퓨터 구현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다. 202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업적과 보다 관련이 있는 양자 컴퓨터 구동 방식은 낮은 온도에서 큐비트를 만들고 제어하는 초전도체활용 방식이었다. 하지만 큐비트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실리콘 스핀, 광자(포토닉스), 중성 원자, 이온 트랩이 있는데, 아쉬운 점은 양자 컴퓨터의 큐비트 구현 기술 혹은 원리에 대한 소개가 거의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번 호의 대상 독자가 청소년이기에, 이 지점에서는 더 깊이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은 듯하다.


매년 노벨 과학상이 발표되면 우리 과학 연구의 현실이 거듭 조명된다. 아직 우리 나라는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과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작년까지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만 31명이었다. 바로 이웃하는 나라임에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차이라 생각하는 요인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하나의 큰 분야에 천착하는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결과를 빨리 내야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의 우수한 젊은 연구자들은 늘 해외의 연구자들과 협력하여 주목받는 결과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반면 일본은 해외의 유명 연구실에 합류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연구를 지속해도 좋은 연구를 도출해내곤 한다. 우리도 이제는, 우수한 젊은 연구자들이 핵심 분야에서 우리 스스로 주도하는 연구를 하고 해외의 유명 연구소와 대등한 결과를 많이 축적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연구자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시즌 호에서는 양자역학과 노벨 과학상, AI에 관한 기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각 호에서는 늘 과학이슈 11가지에 관한 기사를 소개하기에, 이 책을 꾸준히 읽어나가는 한 최신 과학 이슈에 대해 분명히 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매체에 자주 오르내리는 용어인 '피지컬 AI'의 개념이 이미 생체모방공학과 연결되고 있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드론이나 로봇관련 연구에서 앞으로 더 활발한 기술의 접목과 발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청소년들이 이 책에 소개된 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보기에 청소년들에게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일반인들이라고 이 책의 모든 이슈를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닐테니 나만의 기우인지도. 전문가라고 모든 분야를 다 익숙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반대로 전문가들이 최신 과학 이슈들을 동료들이 아닌 비전공자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러 이슈를 다루는 글에서 비전공자들을 위해 좀 더 쉽고 기본이 되는 개념들에 대한 소개가 함께 정리되어 있는 책은 독자/학습자가 흥미를 갖는 분야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학창시절에 어느 분야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아도 특별히 흥미를 끄는 분야를 발견하고 만날 수 있다면, 이 책의 기획 의도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과학 분야는 매일 새로운 무언가가 발견되고 지식이 추가되는 분야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선별하고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어 앞으로 나올 <과학 이슈 11>이 더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령 이미지 알마 인코그니타
에르베 기베르 지음, 안보옥 옮김, 김현호 해설 / 알마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베르와 바르트의 유령 이미지란?

- 유령 이미지


에르베 기베르 지음

안보옥 옮김 [알마] (2017)

 




재능이 넘치는 20대의 에르베 기베르의 사진에 관한 에세이 유령 이미지를 읽습니다. 다만 이 책은 젊고 잘생긴 저자의 표지 사진 이외에 사진 한 장 나오지 않는 에세이입니다. 책 뒤의 해설에 보면 이 책은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사진을 이야기한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또는 카메라 루시다)에 화답하는 책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를 생각해보고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면,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밝은 방의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르트는 실존하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온실 사진으로 자신의 사진론을 전개합니다. 사진이 제시하는 코드화된 정보인 스투디움과 사진의 요소가 관람자와 상호작용하여 그를 찌르듯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푼크툼의 관점에서 피사체 혹은 대상의 부재를 실감하고, 부재한 대상을 소환하는 사진 읽기로 이해합니다.



반면 유령 이미지는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이루어졌으나 필름이 없거나, 노출값 조정이나 카메라의 작동 오류로 인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글쓰기로 밀고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기베르의 글쓰기는 바르트의 관점을 비틀기라는 표현도 이해가 됩니다.



또 바르트가 책에서 언급한 유령(spectrum)'과 기베르가 사용한유령 이미지를 견주어 봅니다. 여기에도 차이점이 보이는 데요, 바르트의 유령대상이 발산하는 환영적 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죽은 자의 귀환으로도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바르트 본인에게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되찾아주는 이미지로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곧 바르트의 유령은 실존했던 대상의 부재를 인증한다는 의미와 되찾기/부활과 맞닿아 있습니다.



반면 기베르의 유령은 대상의 실존 자체가 의문시됩니다. 실제 사진으로 남아 있지 않은 이미지이니까요. 그러므로 기베르의 유령이미지는 실존을 입증하고 인증하기가 아니라 그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드는 이미지라고 이해됩니다. 따라서 바르트의 유령이미지 개념에 또 다른 방식으로 비틀고 저항하기를 텍스트로 시도하는 작업인 것이죠.



이런 관점은 가족사진에 대한 기베르의 입장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사진은 실존했던 대상에 대한 추억을 불러오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동의 추억을 희미하게 만든다고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감한 글쓰기에서 한편으로는 재능 넘치는 20대의 저자에서 보이는 젊음의 패기와 약간의 치기마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파편적인 글에서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성적정체성을 펼쳐보이는 저자의 태도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용감하다라고 말하겠지만, 그는 이렇게 응답하죠.

 


그것은 최소한의 진정성입니다. 욕망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채 어떻게 사진에 대해서 말하기를 바라십니까? (...) 그것은 심지어 용기의 문제도 아닙니다(나는 투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글쓰기의 진실이란 점에서 정당한 겁니다.”(112)

 


이 선언적인 응답에 또한번 감탄합니다. 사진을 포함한 모든 예술 작업에는 자신에게 은폐없는 솔직함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다양한 정체성은 그 개별자의 존재 양식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을 그대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태도에 감탄한 것이죠. 반대로 저는 사회적으로 얼마나 스스로를 은폐하고 다양한 페르소나로 연기하는 존재인지도 더 선명히 자각하는 독서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해지는 것은 어느 사진가가 자신에게 해준 조언에 주목해 봅니다.

 


당신과 아주 친근한 사람들, 부모님, 형제자매, 연인들 사진만 찍어봐요, 먼저 애정이 있어야 사진을 얻을 것입니다...”(124)


 

이 표현의 맥락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애정이 먼저라는 말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을 테지요. 이 애정의 대상에는 자기 자신이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르시시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 자신의 행위로 도출한 결과물, 이미지 등에 대한 신뢰 역시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머니 사진을 얻지 못했던 기베르에게는 바르트와는 분명 다른 사진에 대한 정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통념상 사진은 인화지에 드러난 결과물을 의미하지만, 기베르에게는 이 정의가 무의미하니까요. 기베르의 사진에는 인화지 이전의,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지극히 내밀한 교감과 기억과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정리해보면, 에르베 기베르가 사용한 유령 이미지는 촬영에 실패하여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사진이라는 우리의 통념에 존재하는 맹점을 음화(negative)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이미지의 절망”(21)이라고 언급했던 표현이 이제서 좀 더 이해가 됩니다. 기베르에게는 텍스트 자체가 이미지의 유령이었던 것이지요.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밝은 방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보다 풍부한 주석과 함께요. 언젠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책 속으로]


[1] "그것은 최소한의 진정성입니다. 욕망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채 어떻게 사진에 대해서 말하기를 바라십니까? (...) 그것은 심지어 용기의 문제도 아닙니다(나는 투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글쓰기의 진실이란 점에서 정당한 겁니다."(112) - P112

[2] "다시 말하자면 이미지는 욕망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미지의 성적 특성을 없애는 것은 이미지를 이론으로 축소하는 일일 것입니다... "(113) - P113

[3] "당신과 아주 친근한 사람들, 부모님, 형제자매, 연인들 사진만 찍어봐요, 먼저 애정이 있어야 사진을 얻을 것입니다..."(124) - P124

[4] "검열된 사진은 나체 사진보다 더 에로틱하다, 포르노 사진이 에로틱한 사진이 되는 것이다."(136)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