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가 소멸된 시대에 오뒷세이아를 읽는다는 것


 -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11월 29일)에



호메로스 지음 | 이준석 옮김 [아카넷] (2023)

 



우연한 기회에 벼르고 벼르던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고전학자 천병희 교수가 첫 원전을 번역한 지 40년 만에 나온 이준석 교수의 원전 번역서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처음 읽던 과정에서 눈길이 머문 지점은, 오뒷세우스라는 인물보다 크세니아(Xenia)'라고 불리던 고대 세계의 환대문화였다.


 

오뒷세이아에서 발견하는 고대의 환대문화는 그 구체적인 실천 방식이 아주 특이했다. 우리는 초면인 누군가를 만나면 데면데면하게 어색해하고 때로는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현실에 살고 있다. 특히 대도시의 아파트 거주자를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하지만 고대 세계, 특히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이방인을 만나게 되면, 상대방의 정체를 먼저 묻지 않았다. 주인이 가장 먼저 하던 일은, 이방인을 집안으로 초대하여 따뜻하고 안전한 자리에 앉힌 다음 음식을 정성껏 대접해야 했다. 상대방이 만족스럽도록 배불리 먹이는 일이었다. 역자에 따르면, 주인이 아무리 상대방이 궁금하다고 해도, 상대방의 정체를 먼저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이후라야, 주인은 통성명을 하고 이방인에게 오게 된 사연을 들려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주인은 이방인이 하룻밤 묵기를 원하면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심지어 떠날 때는 선물도 얹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분명히 낯선 이를 벗으로 만들어주는전통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가성비 제로인 고대의 환대 문화가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오뒷세이아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모든 이방인과 거지들은 제우스에게서 오니까요.”(342)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뒷세우스가 처음 만난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위해 일하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였다. 이 말은 그가 아테네의 손길로 허름하고 늙어 보이는 몰골로 돌아온 주인 오뒷세우스를 알아보기 전에 하던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방인이나 거지들은 제우스가 변장하여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러한 관습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이해되었다. 물론 이러한 행동과 관습의 실천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공동체의 삶을 규제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규범으로서는 작용했을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번에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가 다음과 같이 덧붙이며 말한다.

 


내 당신을 삼가 존중하고 아끼게 된다면, 그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손님을 보호하시는 제우스를 내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내 그대를 가엾게 여겨서니까요.”(357)

 


그렇다. 이 말에서 한 가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공동체의 불문율처럼 여겨진 환대의 관습이라고 해도 공동체의 규범을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역시 환대의 문화는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는 아닌 것이다. 공동체의 관습을 강제하는 힘은 바로 제우스에 대한 믿음이었다. 신 또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뒷세이아를 읽는 동안 거의 3,000년 전의 고대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고대인들이 모르는 상대, 타인과의 만남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그들의 윤리학이 바로 환대의 문화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신이라는 것도, 고대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이해 및 설명 방식으로서 만들어진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대인들에게 제우스혹은 여러 신들이란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고대 세계의 윤리학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렇게 정리해 본다.


 

특히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환대(Xenia)'라는 전통 혹은 관습에 주목하게 된 것은, 현대의 그리스에는 환대의 전통이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현재 그리스에 있는 여러 섬은 시리아를 비롯하여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온 난민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EU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고 이 수용소들을 운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그리스가 동방으로부터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을 막는 최전선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은 꽤 많은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몇 년 전 우리 사회의 난민 수용 논란의 양상에서 볼 수 있었듯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는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들을 붙들어둘 수 있는 전초기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목숨을 걸고 살아남은 난민들도 이미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오뒷세이아에서 고대 세계의 기본적인 불문율처럼 작동하던 환대의 문화였으나 현재 그리스에서는 이 벌거벗은 생명들인 난민을, 곤궁한 환경에 수용하는 역할을 그리스가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이러니했던 것이다.


 

오늘(1129)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International Day of Solidarity with the Palestine People)이라고 한다. 유엔이 지정한 날로, 유엔은 팔레스타인에게 주권을 부여하고 이스라엘 점령으로부터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 이스라엘은, 2차 대전 이후 나치의 박해 끝에 살아남은 25만 명의 유대인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생겨난 국가다. 조금 단순히 말하면 현재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근원은, 영국, 미국,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국제 사회가 나치에 고통받았던 유대인들에게 느닷없이현재의 위치에 살도록 강제한 결과였다.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풍요롭게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국제 사회는 유대인 난민을 데려다 앉혀놓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굴러들어 온 유대인 난민들이 누가 보아도 잔인한 방법으로 박힌 돌’(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면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2007년 부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완전 봉쇄한 상태에서 첨단 무기를 퍼붓고, 군부의 보호와 묵인 아래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폭행과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모든유대인들이 현 이스라엘 정부의 행태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인권 단체가 극우적인 이스라엘 정부의 잔인함에 분노를 표출하고 비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욱 힘든 현실은, 국제 사회가 이 문제의 해결에 친이스라엘 단체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 단체는 미국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력한 장악력을 얻은 나머지, 미국의 정치 마저 한 손에 놓고 뒤흔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일본의 문학 연구자 오카 마리 교수의 책 가자란 무엇인가(두번째테제, 2024)에서 알게 된 사실은, 오바마 대통령도 민주당 후보로 나왔을 때, ‘나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하니, 친이스라엘, 친시오니즘 단체로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이 흘러들어왔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의 급진 좌파로 여겨지는 버니 샌더스마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추가 무기 공여 안에 찬성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정치가 얼마나 친이스라엘, 친시오니즘 단체에 의해 통제되고 장악되어 있는지를 실감하게 해 준다.


 

오늘이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이기에, 최근에 읽은 오뒷세이아환대문화가 생각이 났더랬다. 비록 고대 세계의 크세니아가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켜진 관습이긴 해도, 낯선 이방인을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게 해주었던 전통은 아니었을까 싶다. 특히나 신변의 위협을 느껴 고향을 탈출한 이들이 탄원자가 된 경우, 고대 세계의 이 환대 전통은 탄원자에 대한 존중과 적절한 대우의 의무를 다해야 했던 문화를 오뒷세이아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작품 중에서 알키노오스라는 인물은 오뒷세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손님과 탄원자는 모두 형제들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입니다.”(209)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대목을 만나면서 고대 세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이 척박하고 고되긴 했을지언정,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보다는 더 인간적이기도 했음을 생각해 본다. 반대로 현대 세계의 현실은 어떤가. 나는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청소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human monster)’,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human animal)’이라고 언급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집단의 잔인함을 깨닫는다. 충격이었다. 국제 사회가 바라보는 정의가 지나치게 이스라엘로 기울어진 현실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환대로 넘쳐나던 고대 지중해 세계의 모습을 다시 상상해본다.


 

내게는 제우스로 대표되는 신이 사라져 버린 것이, 오늘날 환대의 전통마저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조상 대대로 풍요롭게 살아온 장소를 점령하여, 빼앗고, 이들을 착취해 온 서구의 정복자들에게 오뒷세이아에서 발견하는 환대의 전통을 다시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환대는 낯선 이방인을 취약한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보호하고자 했던 고대 세계의 윤리학이었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신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남기 위한 공존의 윤리학이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뒷세이아를 통해 고대의 선조들이 내게 가르쳐준 지혜다. 우리에게는 지금 어느 시대보다도 함께 잘 살도록 도와주는 신이 필요할 때인지 모르겠다. 오뒷세이아에서 그러한 신을 만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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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1-29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목민족의 손님에 대한 환대가 아직 남아있는 그 흔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초란공 2024-11-29 13:05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하신 부분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보다 더 취약한 조건에서 살아가야 했을 인류의 조상들을 생각하면 말이지요. 처음부터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조심성이 진화한 것일까로도 해석해봅니다^^

stella.K 2024-11-2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야, 이제 좀 알겠네요. 분명 네타냐후 총리가 나쁜 X 같긴한데 왜 그런가 했더니 그런 역사가... 그나마 유엔이 바른 일을하고 있는 것 같긴한데 힘이없으니 큰 일입니다. 저도 책이라도 좀 봐야겠습니다. ㅠ

초란공 2024-11-29 13:06   좋아요 1 | URL
만약 관심있으신 주제라면 <가자란 무엇인가>를 우선 추천해드립니다. 두껍지 않고 강연록이라 술술 읽힙니다. 저도 이 책 먼저 읽고 충격받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속고 살아온 것인지!!!
 
가자란 무엇인가 - 팔레스타인 문제의 역사적 맥락과 집단학살의 본질
오카 마리 지음, 김상운 옮김 / 두번째테제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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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곁에 머뭅시다 -가자란 무엇인가


: 팔레스타인 문제의 역사적 맥락과 집단학살의 본질

 

오카 마리 지음 | 김상운 옮김 [두번째테제] (2024)

 



나는 그들이 테러집단인 줄 알았다. 몇 년 전, 이스라엘에 출장갔을 때 잠시 방문했던 가자 지구 앞의 한 초원을 떠올린다. 겨울이 풍요롭다는 지중해 끝자락이어서 그런지 초원 위에 양귀비를 닮은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바람소리만 들리는 넓은 초원의 고요함 속에서 헤엄치듯 평화롭게만 느껴진 순간이었다. 언덕 위에 서 있던 건물 벽의 무수한 총알 자국이 이 장소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곧이어 들렸던 총소리. 가자 지구를 향해 무수히, 무차별적으로 발사되었던 그 총소리에 그곳을 빠져나왔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이 책 가자란 무엇인가는 현대 아랍 문학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던 와세다대학의 오카 마리 교수가 강연한 기록 모음이다. 입말로 쓰여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해 처음 입문하기에 좋다. 이 책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평생 한쪽의 입장만 반영된, 지극히 편향된 주장만을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고전이 아니라도 내게는 도끼같은 책인 셈이다.


 

이스라엘인이라고 모두가 유대인은 아니라는 것. 이것은 1948년에 홀로코스트 이후 불시에, 그리고 갑작스럽게 난민이 된 유대인 25만명의 거쳐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국제법상의 불법으로 점거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의 행보 때문이다. 좀 더 조심스럽게 구별해야하고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모두가 시오니스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법적으로, 세계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거하며 선주민을 내모는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일이 8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박힌 돌을 밀어내기란 시오니스트들을 주축으로 자행된 인종청소를 의미한다. 전문가들이 아무리 집단학살이 아니라고 해도, 유대인 역사학자 일란 파페는 점진적 집단 학살”(188)이라고 표현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2007년부터 20년 가까이 가자 지구에 대해 완전 봉쇄/전면 봉쇄를 시행하고 있다. 장벽을 두르고 팔레스타인인들을 가둔 채, 각종 첨단 무기를 시험하고 있다. 완전 봉쇄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자면, “살아 있으면서 죽으라는 것”(106)이다. 치밀하고 집요한 구조적 폭력이다. ‘집단 학살이라는 비난을 피하면서 한 지역에 230만 명을 가둬 놓은 다음 굶기고, 병들게 하고, 자신의 눈을 가린 채 폭탄을 퍼부어 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집단 학살의 학술적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에서 중세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가 만수르 알할라즈(Mansur Al-Hallaj)의 말을 다시 기억해본다.

 

지옥이란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곳을 말한다.”(119)

 


현재 가자지구를 천장이 없는 세계 최대의 야외 감옥”(197)이라고 부른다그런데 저자 오카 마리는 이 표현에서 나아가 질문을 던진다.

 

죄수가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이런 감옥이 있습니까? (...) 적어도... 감옥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이제는 절멸수용소입니다.”(197)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피해자였던 민족이 이제는 지독한 가해자를 자처하는 상황, 인간의 이 맹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행보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보내는 여러 유대인 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현실 세계에 행사하는 권력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하마스는 무력 저항을 해왔지만, 이스라엘의 주장처럼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피점령 선주민으로서 국제법상 인정하는 저항권을 정당하게 행사한 것으로 보아야 맞겠다. 일제 강점기 치아에서 우리 선조들의 저항도 이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가 질문의 방향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하마스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오니스트가 유대인 국가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아랍인이나 무슬림에 대한, 유럽인의 인종주의에 기반한 식민주의적 침략과 폭력적인 인종청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193)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첫 마디로, “나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하게 하고, 급진 좌파로 여겨진 버니 샌더스마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추가 무기 공여안에 찬성표를 던지게 한 것은 친이스라엘 단체/세력의 정치 자금원이었다. 자금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대통령뿐만 아니라 상원의원 등의 정치활동도 막히도록 하는 이 단체/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한 문제다.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우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문제도 함께 언급하는 대목이 인상깊다. 1980년 광주 항쟁의 기억을 담은 문부식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 언급된 표현, “망각이 다음 학살을 준비한다.를 여러 번 인용하고 강조한다. 이어서 저자 오카 마리는 간토 대지진 당시 있었던 조선인 집단학살과 재일조선인 차별, 조선인학교에 대한 적대시와 같은 문제를 언급하며 이것이 일본의 책임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재일조선인에 대한 폭력과 차별의 문제는 식민주의 맥락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두 문제 모두 결국은 국가가 후원하는 폭력”(176)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일본인 학자의 강연집이기에, 이 주제에 대해 처음 알고자하는 독자들에게 특지 좋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한 집단이 만들어 낸 편향된 인식 속에서 살아왔는지 일깨워 준, ‘도끼같은 책이다.


 

가자에 희망은 남아 있는 걸까? 책을 읽으며 충격과 더불어 극심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을, 그리고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끝으로 저자는 강연 참가자들과 이 책의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휴머니티야말로 우리의 무기입니다. 인간의 곁에 머뭅시다.”(163)라고. 다른 책에서 일본의 영화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경험을 인용한 대목이 생각났다. 간토 대지진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그에게 이웃집 사람이 조선인들을 찔러 죽이라고 죽창을 손에 쥐어주었던 사건. 그는 자신의 손에 있던 죽창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는 회고였다. 집단 학살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을지라도, 이를 멈추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을까. 모두가 거리로 행동에 나설 수는 없겠지만, 저자의 당부대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올바르게 아는 것,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가자 지구 주변에서 찍었던 사진들]


 

[다음에 읽어볼 책]


*일란 파페,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백선 옮김, 이희수 감수, 틈새책방, 2024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2024


*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사월의책, 2022

 

 



[책 속으로]

[1] "식민주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자지구,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근대 500년의 유럽과 미국에 의한 전 지구적 식민주의의 역사와 인종주의의 모순들이 응집된 토포스(장소)입니다. ‘팔레스타인이 해방되면 세계가 해방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11)

[2]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정착민에 의한 식민지 국가이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아파르트헤이트 국가(특정한 인종의 지상주의에 기초한,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라는 사실입니다."(39)

[3]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무장을 하고 서안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습격하는 거죠. 집단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이나 차에 돌을 던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입니다. 팔레스타인 농가의 삶의 양식인 올리브나무 밭을 태우거나 집에 불을 지르거나 경우에 따라 죽이기도 합니다. 이런 짓을 그들은 이스라엘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고 있습니다. 2023년 1월부터 6월까지 반년 동안 무려 600건에 달하는, 이러한 정착민에 의한 폭력이 일어났습니다."(43)

[4] "인간을 한곳에 가둬 놓고, 도망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폭격을 가한다는 것이에요. 2008-2009년 첫 번째 공격이 일어났을 때, 제가 교토대학에서 열린 집회에 ‘인간성의 임계’라는 제목을 붙였을 정도입니다."(46)

[5]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저격당해 살해된 언론인 시린 아부 아클레 씨의 경우(2022년 5월 11일)도 그랬지만, 이스라엘은 항상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아니, 그건 팔레스타인 측이 저지른 일이다’라는 거짓 대항 정보를 흘립니다. (...)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해 온 짓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항상 자신들이 하는 짓을 상대가 한 일로 발신한다는 것입니다."(52)

[6] "19세기 말 유럽에서 ‘시오니즘’이라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탄생합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8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이었습니다."(60)

"드레퓌스 사건에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입니다. 그는 1896년, 진정으로 우리 유대인이 인간적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을 위한, 유대인의 나라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유대 국가 Judenstaat>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계기로 정치적 시오니즘 운동이 탄생합니다."(62)


[7] "75년 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타한 이 인종청소, 조국 상실의 비극을 아랍어로 ‘나크바 al-Nakbah, an-Nakbah‘라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그레이트 카타스트로프 great catastrophe‘, 큰 재앙이라는 뜻입니다."(73)

[8] "이스라엘 건국과 같은 해인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됩니다. 그 제13조 2항에는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를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출국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자기 나라로 다시 돌아올 권리가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기본적 인권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은 75년이 지나 손자·손녀, 증손자 세대가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76)

[9] "2011년에는 통칭 나크바 법이라고 불리는 법률이 이스라엘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인구의 20퍼센트는 팔레스타인인데, 이 법에 따라 나크바를 공적으로 애도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79)

[10]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테러 조직으로 간주하는 하마스를 집권당으로 선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집단적 징벌로 2007년에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 봉쇄가 시작됩니다."(91)

[11] "나크바로부터 70년째인 2018년 3월 말부터 1년 반 이상에 걸쳐 가자지구에서 ‘귀환의 대행진’이라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적으로 벌어졌습니다. 하마스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가 대동단결하여 주민들에게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이 행진에서 그들이 호소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자신들의 민족적 권리인 귀환 실현과 국제법 위반인 가자지구 봉쇄 해제, 그리고 같은 해 5월로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한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에 대한 반대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평화적인 행진을 통해 요구한 것입니다. (...) ‘귀환의 대행진’이 시작된 3월 30일부터 미국 대사관이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5월 14일까지 백 명 이상의 참가자가 살해되었습니다."(110)

[12] "지옥이란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곳을 말한다."(119)
[중세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가 만수르 알할라즈 Mansur Al-Hallaj의 말]

[13] "‘어떤 곳에 있든, 불의는 모든 곳에서 정의에 대한 위협이 된다.’ 즉,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이 이대로 계속되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집단학살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124)

[14] "가자지구는 완전 봉쇄되어 있고, 주민들은 가지지구 밖으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인구는 150만 명이었는데요. 150만 명이 갇혀서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자지구에다가 매일 밤낮으로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미사일과 포탄 심지어 백린탄까지 쐈습니다."(137)

[15] "공격이 멈춘 후 가자지구에 대해 말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저는 한국의 문부식 씨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겐다이키카쿠시츠, 2005[삼인, 2002])라는, 1980년 광주 항쟁의 기억을 담은 책에서 인용되었던 구절, "망각이 다음 학살을 준비한다"를 여러 번 인용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자’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번 ‘가자’ 앞에 있는 것이다. 이번에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그 망각에 의해서 다음번 ‘가자’로의 길을 닦고 있는 것이라고요."(138)

[16] "이스라엘은 군사 점령한 동예루살렘을 병합해 그곳을 수도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국제법 위반입니다. 그러한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이전하는 것, 이것도 국제법 위반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는 주류 언론은 없었습니다."(148)

[17]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문학이, 문학의 말이 필요합니다. 문학은 인간에게 휴머니티를 되찾게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문학으로 인간성을 되찾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이것은 당연한 말입니다."(161)

"말과 휴머니티, 그것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 다시 한번 말하죠. 휴머니티야말로 우리의 무기입니다. 인간의 곁에 머뭅시다."(163)

[18] "우리는 정말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일까요? (...) 백년 전에 있었던 간토 대지진 그리고 그 참사의 충격으로 부채질된 형태로 일어난 조선인 집단학살이 이곳 도쿄에서, 가나가와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살육에 당시 언론도 가담했습니다."(164)

[19]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 혹은 이라크에서 다수의 무슬림이 미군에 의해 아무런 증거도 없이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고 쿠바의 관타나모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장기간 구금되었습니다. 국제법을 위반한 중대한 인권침해입니다. 미국은 그야말로 초법적인 존재로서 초법적인 폭력을 행사해 왔습니다."(166)

[20] "베첼렘이라는 이스라엘 인권단체는 유대인 정착민의 폭력을 ‘국가가 후원하는 폭력 State Sponsored Violence‘이라고 부르며 웹사이트에 정착민의 폭력 행위를 촬영한 동영상 등을 올리고 있습니다."(175)

"점령당한 사람들이 점령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점령군에 무력을 사용해 저항하는 것은 국제법상 정당한 저항권 행사입니다."(178)


[21] "‘하마스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그것이 문제의 뿌리에 있는 원인입니다."(185)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행사하는 온갖 폭력을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점,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는 점으로 정당화하며 자신들에 대한 모든 비판을 ‘반유대주의’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일본 언론은 마치 이스라엘=유대인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185)

[22] "흔히 가자지구를 ‘천장이 없는 세계 최대의 야외 감옥’이라고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감옥 그 이상입니다. 죄수가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이런 감옥이 있습니까? 적어도 10월 7일 이후의 가자지구를 ‘세계 최대의 야외 감옥’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감옥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이제는 절멸수용소입니다. 문제 해결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해결입니다."(197)

[23]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역시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우선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203)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점령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 그것이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온 투쟁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리는 것입니다."(205)

[24] "문제의 근원은 정착민에 의한 식민주의입니다. 여기서 묻게 되는 것은 식민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 역사의 문제, 일본에 사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류 언론은 거기에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일본은 이런 점에서도 이스라엘과 역사적인 공법 관계, 동맹 관계에 있습니다."(205)

[25]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우리는 우리로서, 이 일본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일본에도 인종주의, 혐오가 있습니다. 하마스=테러리스트로 간주하는 것과 조선학교를 적대시하는 것은 정말 똑같은 구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투쟁을 제대로 하는 것도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206)

"팔레스타인을 통해 저는 일본의 식문주의 문제를 만났습니다. (...) 팔레스타인을 만나면서 저는 처음으로 조선 식민지 지배의 문제, 재일교포의 문제, 오키나와의 문제, 아이누모시리의 문제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208)

[26]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을 때, 첫마디가 ‘나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지지합니다’였습니다. 그렇게 말함으로ㅆ 나는 이스라엘의 편입니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친이스라엘, 친시오니즘 단체에서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왔습니다."(210)

[27] "미국 상원은 이번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대한 추가 무기 공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요.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급진 좌파라 일컬어지는 버니 샌더스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거기서 반대하면 다음 선거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고 낙선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국내 선거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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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 이스라엘의 탄생과 팔레스타인의 눈물 교유서가 어제의책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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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알던 ‘상식’이 강자 중심의, 얼마나 편향된 인식이었는지 충격받고 놀라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외면함으로써 공범이 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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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웨이에 영감을 준 글쓰기의 출발점

(feat. 세상 모든 사람들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

(원제: Writing without Teachers)

 

피터 엘보 지음 | 한진영 옮김 [페르아미카실렌티아루네] (2024)

 



피터 엘보(Peter Elbow)...


온라인 서점 앱을 보다가 만난 이름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곧바로 기억나지 않았다. 앱에서 저자의 다른 저서를 찾아보고서야 그가 글쓰기 책 힘 있는 글쓰기의 저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몇 년 전에 많은 관심을 받았던 글쓰기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내에서 출간(2014)된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기록을 남겨보기 시작했던 때가 2015년이었다. 당시에 난 아마도 글쓰기까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누가 이렇게까지 9년 동안 틈틈이 블로그에 글을 남길 줄 알았나. 서점에서 이 책을 이따금씩 만나곤 했지만, 제대로 읽어볼 기회는 없었다. 내가 여전히 블로그에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고 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힘 있는 글쓰기를 만났을 때 읽고 글쓰기를 시도해 보면 좋았겠다.

 

저자의 이름을 발견한 건, 이번 달에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가 새롭게 출간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국내에서 출간된 책과 더불어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의 첫인상은, 두 권 모두 글쓰기에 관한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을 보다 강조하고 있는 글쓰기 책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가 궁금해서 저자의 프로필 자리를 책에서 찾아보았는데, 저자의 이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무심코 표지를 보았더니 이제야 저자와 간단한 책 소개 글이 눈에 들어왔다. 책 내부에서 저자와 소개하는 공간을 새롭게 해석한 시도라고 여겨졌다. 저자의 이력을 찾다가 발견한 점이다.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표지다.

 

아무튼 표지에서부터 저자의 이력을 더 찾아보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저자가 글쓰기 관련 베스트셀러 아티스트웨이(줄리아 카메론)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에 큰 영감을 준 장본인이라는 점이었다. 이 글쓰기 관련 베스트셀러에서 적용하고 있는 방법론이 무작정 글쓰기(free writing)’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모닝페이지열풍을 일으켰던 인물이 바로 피터 엘보였다. 참고로 그가 제안한 글쓰기 방법론은 하버드 글쓰기 강의로 실용적인 글쓰기 가이드를 제시했던 저자 바버라 베이그에게도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피터 엘보가 제시한 이 글쓰기 방법이 도대체 어떤 방법이기에 이렇게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걸까, 더 궁금해졌다.

 

출판사 소개 글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저자가 제안한무작정 글쓰기(free writing)’가 글쓰기에 대한 본인의 불안과 좌절, 무력감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 글쓰기에 대한 심리적 압박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글쓰기에 관한 자신의 실패를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저자는 자신만의 글쓰기 방법을 추출해내었고 훗날 이를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라 할 수 있겠다. 서문에 따르면 저자는 자신의 무작정 글쓰기(free writing)’방법을 다른 작가의 글쓰기 책에서 발견하고 이를 자신의 문제 해결에 적용해보게 되었다. 저자는무작정 글쓰기를 때로는무의식적 글쓰기’,‘지껄이기’,‘수다떨기라고도 소개한다. 달리 말하면, ‘무작정 글쓰기는 우리 각자의 자각/이성/로고스가 개입하고 우리를 통제하지 않는 글쓰기라고 이해된다.

 

젊은 시절에 누구나 한번은 방황하고 좌절한 기억이 있을 테다. 나 역시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어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음이란 조건에도 정신적 피로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물론 프리라이팅(free writing) 기법을 알지 못한 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리걸패드(노란 종이 묶음으로 된 노트)에 내 모든 걸 쏟아내듯 끄적거려 본 경험이 있다. 나의 자괴감과 열등감, 원망과 고통의 기억 모두를 뱉어버리듯이 말이다. 떠오르는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휘갈기듯 계속 써본 후 더 뱉어낼 것이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뭔지 모를 심리적인 안도감 같은 것이 찾아왔음을 기억한다. 저자가 이렇게 글쓰기로 내뱉는 행위가 저자가 의도한 것에 부합하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이제 이 책에서 소개 된프리라이팅을 과거에 방황하며 뱉어내듯 무언가를 썼던 경험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문에 언급된 프리라이팅 방식과 비교해보니 내가 적용했던 방식과 매우 유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난 기억을 되돌아보면, 나는 이미 피터 엘보의 글쓰기 방법을 이때 영접했던 것이 아닐까.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불안과 고통의 경험에서 나온무작정 글쓰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얼핏 보기에 저자가 제안한 글쓰기 방식이 글 쓰는 이의 무의식과 접점을 만들어내는 훈련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이 방식으로부터 어떻게 내가 원하는 글, 보다 좋은 요건을 갖춘 글을 쓰는 데로 나아갈 수 있을지. 오랫동안 많은 창작자/작가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아온 아티스트웨이에서 소개한 바로 그 글쓰기 방식 말이다! 그리고 이 방법을 제안하고 실천했던 저자의 책과 이제 만나게 된 셈이다. 최근 나의 글쓰기가 벽과 같이 무언가에 막혀버린 느낌을 종종 받았다. 글쓰기에 조금 소심해지고 의욕을 잃기도 했는데, 피터 엘보를 만난 것은 마치 일종의 계시(그냥 계속 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글쓰기 연구의 대가가 50년에 걸쳐 축적한 성과를 아무리 많이 내게 보여주든, 이 책이 30년 넘게 옥스포드 대학에서 글쓰기 바이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든, 내가 직접 글을 써보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자는 나의 우려를 미리 알고 있다는 듯,‘교사 없는 글쓰기 모임에 관한 조언도 책에 담아놓았다. 저자가 제안하는 교사 없는 글쓰기 모임활동은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격려 속에서 자신의 글을 계속 써나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기존의 아티스트웨이를 좋아하는 작가들,‘모닝페이지를 시도해 본 열혈 독자들이 함께 글쓰기를 하고 격려해간다면 각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혼자 꾸준히 무언가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일주일에 세 번 이상 10분 정도 프리라이팅을 하라는 것도, 사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마련하는 문제인 것 같다. 현대인들의 집중력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주면에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 매리언 울프가 프루스트와 오징어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인간에게 읽기와 쓰기 행위란 결코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함께 글쓰기 루틴을 꾸준히 지켜나가다 보면 서로에게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역시나 직접 시도해 보는 독자만이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피터 엘보의 다른 책 일상어 문식성도 유명한 듯하고 관심이 가지만, 이 책의 분량과 가격의 압박이, 번역서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렵게 되었다. 두꺼운 교과서가 아닌 이상, 개인적으로 역자가 너무 많은 책은 잘 구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프리라이팅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실천적인 가이드로서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부터 읽어보기로 한다. 서울대 나민애 교수가 2023년에 출간한 책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에서도 언급했듯이, 글쓰기 행위가 책읽기의 최종 목표 혹은 종착지는 아니라는 지적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대로 읽고 쓰는 능력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책읽기에서 더 나아가 글을 잘 쓰게 되길 열망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 한다.”(17) 진화상으로 볼 때, 인간에게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이 독특한 능력(읽기와 쓰기)이 왜 필요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그보다 애초에 우리는 왜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일까? 저자 피터 엘보가 소개하는 프리라이팅이 우리의 글쓰기 향상에 어떤 토양을 제공해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오래간만에 글쓰기에 관한 책으로 돌아왔다. 최근 나의 글쓰기가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무력감을 느끼던 차였다. 이제 이 책과 더불어 10년 전의 나와 조금은 달라진 원점에서 글쓰기를 다시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를배우지않기 #피터엘보 #글쓰기 #무작정글쓰기 #프리라이팅 #freewriting 

#교사없는글쓰기 #writingwithoutteachers #교사없는글쓰기모임 #내돈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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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미국 단편소설의 코드 - 예술 감상을 위한 미학 세미나
한동원 지음 / 미술문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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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규정되기 어려운, 그러나 시대와 함께 호흡해온 개념



그로테스크

: 예술 감상을 위한 미학 세미나

한동원 지음 [미술문화] (2024)

 



문학 혹은 보다 포괄적인 범주로서의 예술에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을 말할 때 무엇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까? 그로테스크를 읽기 전에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뭔가 음침하고, 으스스한 분위기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이정도 이해도 틀리진 않겠지만, 지극히 제한된 이미지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학술적이지 않은 일반 독자로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을 거칠게 조사해본 바로는 우선 어떤 기준으로부터의 일탈에 해당하는 요소가 이 개념에 담겨 있다. 고대 로마의 네로 황제의 동굴 벽에 그려져 있던 기이한문양들은 해괴한 생물의 형태를 띠는 것이 많다. 사람 몸에 뱀이나 말이나 사자 다리와 같은 몸을 가진 존재, 혹은 기묘한 형태의 덩굴 식물처럼 보이는 대상들이 보는 이에게 무언지 모를 스산함을 일으킨다.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고대의 그로테스크적인 것들은 무엇보다 자연 질서에서 벗어난 것 혹은 이 질서의 와해를 가져오는 요소를 지닌다. 곧 질서로부터의 일탈, 정상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이해된다. 결국 어떤 대비되는 요소들의 병치와 혼합이 가져오는 낯설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는 문학에서 대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의 우스꽝스러움에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고전적인 그로테스크의 개념이 예술가들에게는 점차 뜻하지 않은 어떤 상황에서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등장할 때를 의미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웃음이라는 인간적인 행위를 천박하고 조야한 것으로 여겼던 귀족들의 절제되고 엄숙했던 규범을 조롱이라도 하듯, ‘귀족이 아닌 계층들의 웃음 코드는 기존의 질서를 와해하는 요소로서 그로테스크의 외연이 확장되어 온 정황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의 귀족이나 식자층만이 향유하던 문학 혹은 예술 향유의 세계에 점차 민중이 침투하고 얽히면서 그로테스크 개념은 불가피하게 변형 혹은 확장의 단계를 거쳤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맥락에서 그로테스크개념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섬뜩함을 여전히 함께 유지한 채 말이다.

 


그로테스크의 저자는 19세기 정도까지 형성되어 유지되어온 고전적인그로테스크의 개념 이후 변화 혹은 확장된 개념으로서 그로테스크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미국 근현대 단편소설로부터 보다 현대적인 그로테스크개념을 찾아내고 있어 내겐 신기하고 무척 흥미로웠다. 다시 말해, 저자는 미국 문학에서 미국적 그로테스크의 코드를 추적하고 있다. 미국 근대 단편소설의 전범이 되었던 에드가 앨런 포에서 출발하여 현대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까지, 10편의 대표 미국 단편을 뼈대로 두고,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개념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선 나의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에 대한 논의다.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미국의 서해안과 동해안 지역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적인 정서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학술적으로 검증된 의견은 아니다) 대신 미국적인 정서를 들여다보려면 남부로 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미국적 그로테스크개념을 추적하며 언급하는 작품 가운데 연작소설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20세기에 들어 산업화되어가던 미국 남부의 정서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남부 그로테스크southern grotesque'라고 하는, 지극히 미국적인 그로테스크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이 특수한 개념은 미국 국토의 양쪽 해안가 주변의 대도시들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반면 깊숙한 미국 내륙, 흔히 남부라고 지칭되는 곳의 중소도시로 방향을 틀어, 이 시기 미국의 산업화 시대의 여파로 한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농촌 사회가 결국 붕괴되기 시작하는 시기의 인간 소외와 고립의 문제에 주목한 것이다. 특히 이전까지는 정상성으로부터 일탈한 존재, 규범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괴물 같은 그로테스크적 존재가 관심의 대상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오히려 정상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언가의 불일치’, ‘불편함’, ‘낯설음의 정서를 새롭게 주목하고 발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그로테스크한 특성은 더 이상 주로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소외와 고립이라는 정신적인 영역으로 올라왔다는 의미”(74)로 풀이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유럽 문화 및 예술에서 명맥을 유지해온 고전적인 그로테스크 개념은, 이제 신대륙의 내륙 깊은 곳에 자리 잡으며 삶에서 분리되어 파편화하는 개인들”(67)에 대한 개념으로 새롭게 확장되어 갔던 셈이다. 이러한 미국적 그로테스크가 개인의 내면을 비추고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자아 안에 동화되지 않은 타자로서 여성적인 것”(70)과 같은 퀴어성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저자가 소개하는 셔우드 앤더슨의 연작소설 가운데 <>이라는 작품이 바로 이런 점들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특징을 또 잘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인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남부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 한국 독자로서 이 작품의 그로테스크적 성격을 처음부터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까 탈옥수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이야기, 그리고 살해되는 가족과 살인자들이 나누는 종교와 구원에 대한 기이한 상황으로서 그로테스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때 고려해야할 부분이 남부 근본주의(종교적 극단 혹은 광신이라는 뉘앙스로서)이며 여기에 다크 유머가 추가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른바 총구 앞에서 남부적인 정서로 살인자와 미소지으며 대화하는 기이함에 주목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로테스크 문학에서는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이 뒤섞여 있고, 숭고함이 추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이러한 다크 유머가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141)

 


남부의 그로테스크가 잘 드러나는 오코너의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물론 한국의 독자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다크 유머와 비극,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이 병치되고 얽혀 있는 상황에 주목해본다. 피 구덩이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한 할머니의 시체. 물론 이 장면 자체가 그로테스크하지만, 이 소설은 여기에 무언가 더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코너의 소설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적 정신 혹은 교리로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특유한 정서와 같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곧 오코너의 단편이 그로테스크한 것은, 단순히 살인이라는 소재나 기독교적 소재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낯설음 그 자체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미국 남부의 정서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텍스트 너머의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 큰 제약을 느낀다. 하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오코너의 1960년대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 역시 소외되고 단절된 인간 내면의 풍경을 하나의 그로테스그적 요소로 제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저자는 이후의 미국 문학에 관한 논의에서 토니 모리슨이라는 걸출한 작가의 포스트모던 그로테스크나, 그로테스크 개념을 젠더화한 조이스 캐럴 오츠, 베트남 전쟁 시기 이후의 인간들의 내면과 감정, 불안 등에 주목하는 팀 오브라이언의 작품 속 그로테스크에 대한 논의로 확장하고 있다. 각 작가와 작품에 대한 독서 역시 앞으로의 영미 문학 작품 감상에 좋은 참고가 되겠다.

 

저자가 제시하는 미국 단편 소설들에서 찾아본 그로테스크 개념은 결코 정의되지 못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야말로 네로 황제의 동굴 벽에 그려진 자연 질서의 와해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문양에서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도록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재생산, 확장, 변형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마치 마르지 않는 찰흙처럼 문학 나아가 예술이 존재하는 한, 시대와 호흡하며 공진화해가는 개념으로 보인다. 나아가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규정되기 어렵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작의 요소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닌가 자문해보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음악에서의 어떤 일탈적인 시도(형식적이든 기교적이든) 역시 기존의 규범과 질서에 새로움 혹은 낯설음으로 다가와 그 순간의 그로테스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것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더 이상 새로움이나 낯설음을 느끼지 않을 테고, 그러면 또다시 이 국면이 앞으로의 새로움, 혹은 파격을 예비하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로테스크는 결코 정의되지 않을 무언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어쩌면 창작하는 모든 존재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어떤 내적 충동의 결과일수도 있지 않을까. 진부함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욕구, 혹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정신과 같은 것 말이다. 그로테스크를 읽고 나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에 대해 정리해본 바는, 우선 이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이것이 기존의 존재 혹은 진부함을 거부하는 예술가의 창작 충동과 더 관련이 있을 법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의 형식과 작품에서 우리는 그 시대와 호흡하며 작품에 입김을 불어 넣었던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보편적인 창작 원리로서의 그로테스크개념을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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