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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미국 단편소설의 코드 - 예술 감상을 위한 미학 세미나
한동원 지음 / 미술문화 / 2024년 10월
평점 :
그로테스크: 규정되기 어려운, 그러나 시대와 함께 호흡해온 개념
《그로테스크》
: 예술 감상을 위한 미학 세미나
한동원 지음 [미술문화] (2024)
문학 혹은 보다 포괄적인 범주로서의 예술에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을 말할 때 무엇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까? 《그로테스크》를 읽기 전에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뭔가 ‘음침하고, 으스스한 분위기’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이정도 이해도 틀리진 않겠지만, 지극히 제한된 이미지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학술적이지 않은 일반 독자로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을 거칠게 조사해본 바로는 우선 ‘어떤 기준으로부터의 일탈’에 해당하는 요소가 이 개념에 담겨 있다. 고대 로마의 네로 황제의 동굴 벽에 그려져 있던 ‘기이한’ 문양들은 해괴한 생물의 형태를 띠는 것이 많다. 사람 몸에 뱀이나 말이나 사자 다리와 같은 몸을 가진 존재, 혹은 기묘한 형태의 덩굴 식물처럼 보이는 대상들이 보는 이에게 무언지 모를 스산함을 일으킨다.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고대의 ‘그로테스크’적인 것들은 무엇보다 자연 질서에서 벗어난 것 혹은 이 질서의 와해를 가져오는 요소를 지닌다. 곧 질서로부터의 일탈, 정상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이해된다. 결국 어떤 대비되는 요소들의 병치와 혼합이 가져오는 낯설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는 문학에서 대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의 우스꽝스러움에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고전적인 그로테스크의 개념이 예술가들에게는 점차 뜻하지 않은 어떤 상황에서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등장할 때를 의미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웃음’이라는 인간적인 행위를 천박하고 조야한 것으로 여겼던 귀족들의 절제되고 엄숙했던 규범을 조롱이라도 하듯, ‘귀족이 아닌 계층’들의 ‘웃음 코드’는 기존의 질서를 와해하는 요소로서 그로테스크의 외연이 확장되어 온 정황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의 귀족이나 식자층만이 향유하던 문학 혹은 예술 향유의 세계에 점차 민중이 침투하고 얽히면서 그로테스크 개념은 불가피하게 변형 혹은 확장의 단계를 거쳤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맥락에서 ‘그로테스크’ 개념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섬뜩함을 여전히 함께 유지한 채 말이다.
《그로테스크》의 저자는 19세기 정도까지 형성되어 유지되어온 ‘고전적인’ 그로테스크의 개념 이후 변화 혹은 확장된 개념으로서 ‘그로테스크’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미국 근현대 단편소설로부터 보다 현대적인 ‘그로테스크’ 개념을 찾아내고 있어 내겐 신기하고 무척 흥미로웠다. 다시 말해, 저자는 미국 문학에서 ‘미국적 그로테스크’의 코드를 추적하고 있다. 미국 근대 단편소설의 전범이 되었던 에드가 앨런 포에서 출발하여 현대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까지, 총 10편의 대표 미국 단편을 뼈대로 두고,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 개념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선 나의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에 대한 논의다.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미국의 서해안과 동해안 지역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적’인 정서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학술적으로 검증된 의견은 아니다) 대신 미국적인 정서를 들여다보려면 ‘남부로 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미국적 그로테스크’ 개념을 추적하며 언급하는 작품 가운데 연작소설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20세기에 들어 산업화되어가던 미국 남부의 정서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남부 그로테스크southern grotesque'라고 하는, 지극히 미국적인 그로테스크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이 특수한 개념은 미국 국토의 양쪽 해안가 주변의 대도시들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반면 깊숙한 미국 내륙, 흔히 남부라고 지칭되는 곳의 중소도시로 방향을 틀어, 이 시기 미국의 산업화 시대의 여파로 한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농촌 사회가 결국 붕괴되기 시작하는 시기의 인간 소외와 고립의 문제에 주목한 것이다. 특히 이전까지는 정상성으로부터 일탈한 존재, 규범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괴물 같은 그로테스크적 존재가 관심의 대상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오히려 정상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언가의 ‘불일치’, ‘불편함’, ‘낯설음’의 정서를 새롭게 주목하고 발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그로테스크한 특성은 더 이상 주로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소외와 고립이라는 정신적인 영역으로 올라왔다는 의미”(74)로 풀이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유럽 문화 및 예술에서 명맥을 유지해온 고전적인 그로테스크 개념은, 이제 신대륙의 내륙 깊은 곳에 자리 잡으며 “삶에서 분리되어 파편화하는 개인들”(67)에 대한 개념으로 새롭게 확장되어 갔던 셈이다. 이러한 미국적 그로테스크가 개인의 내면을 비추고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자아 안에 동화되지 않은 타자로서 여성적인 것”(70)과 같은 퀴어성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저자가 소개하는 셔우드 앤더슨의 연작소설 가운데 <손>이라는 작품이 바로 이런 점들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특징을 또 잘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인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남부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 한국 독자로서 이 작품의 그로테스크적 성격을 처음부터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까 ‘탈옥수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이야기, 그리고 살해되는 가족과 살인자들이 나누는 종교와 구원에 대한 기이한 상황’으로서 그로테스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때 고려해야할 부분이 남부 근본주의(종교적 극단 혹은 광신이라는 뉘앙스로서)이며 여기에 ‘다크 유머’가 추가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른바 총구 앞에서 남부적인 정서로 살인자와 미소지으며 대화하는 기이함에 주목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로테스크 문학에서는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이 뒤섞여 있고, 숭고함이 추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이러한 다크 유머가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141)
남부의 그로테스크가 잘 드러나는 오코너의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물론 한국의 독자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다크 유머와 비극,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이 병치되고 얽혀 있는 상황에 주목해본다. 피 구덩이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한 할머니의 시체. 물론 이 장면 자체가 그로테스크하지만, 이 소설은 여기에 무언가 더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코너의 소설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적 정신 혹은 교리로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특유한 정서와 같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곧 오코너의 단편이 그로테스크한 것은, 단순히 살인이라는 소재나 기독교적 소재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낯설음 그 자체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미국 남부의 정서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텍스트 너머의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 큰 제약을 느낀다. 하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오코너의 1960년대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 역시 소외되고 단절된 인간 내면의 풍경을 하나의 그로테스그적 요소로 제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저자는 이후의 미국 문학에 관한 논의에서 토니 모리슨이라는 걸출한 작가의 포스트모던 그로테스크나, 그로테스크 개념을 젠더화한 조이스 캐럴 오츠, 베트남 전쟁 시기 이후의 인간들의 내면과 감정, 불안 등에 주목하는 팀 오브라이언의 작품 속 그로테스크에 대한 논의로 확장하고 있다. 각 작가와 작품에 대한 독서 역시 앞으로의 영미 문학 작품 감상에 좋은 참고가 되겠다.
저자가 제시하는 미국 단편 소설들에서 찾아본 그로테스크 개념은 결코 정의되지 못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야말로 네로 황제의 동굴 벽에 그려진 ‘자연 질서의 와해’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문양에서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도록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재생산, 확장, 변형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마치 마르지 않는 찰흙처럼 문학 나아가 예술이 존재하는 한, 시대와 호흡하며 공진화해가는 개념으로 보인다. 나아가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규정되기 어렵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작의 요소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닌가 자문해보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음악에서의 어떤 일탈적인 시도(형식적이든 기교적이든) 역시 기존의 규범과 질서에 새로움 혹은 낯설음으로 다가와 그 순간의 그로테스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것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더 이상 새로움이나 낯설음을 느끼지 않을 테고, 그러면 또다시 이 국면이 앞으로의 새로움, 혹은 파격을 예비하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로테스크는 결코 정의되지 않을 무언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은 어쩌면 창작하는 모든 존재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어떤 내적 충동의 결과일수도 있지 않을까. 진부함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욕구, 혹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정신과 같은 것 말이다. 곧 《그로테스크》를 읽고 나서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에 대해 정리해본 바는, 우선 이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이것이 기존의 존재 혹은 진부함을 거부하는 예술가의 창작 충동과 더 관련이 있을 법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의 형식과 작품에서 우리는 그 시대와 호흡하며 작품에 입김을 불어 넣었던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보편적인 창작 원리로서의 ‘그로테스크’ 개념을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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