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북클럽 자본 시리즈 7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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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 받다 

강연 독서 후기

[북클럽 자본시리즈] 7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마르크스 거인의 출현을 알아보다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의 효시가 작가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유럽 모더니티의 도시 파리에 거주하는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있는 인구 이동의 양상은 농촌 지역의 인력이 도시로 몰려드는 현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제르베즈는 시골에서 미혼모로 아이를 낳아 연인 랑티에와 파리로 상경한 여인이다. 랑티에는 바람을 피우고 제르베즈를 버린다. 아이들과 남게 제르베즈는 세탁부가 되어 열심히 일하며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지만, 도시는 홀로된 젊은 여인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로 결혼을 하게된 제르베즈는 이웃집 청년 구제의 짝사랑이기도 하다. 소설의 내용은 여기서 그만 얘기하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현실이 흥미롭다. 에밀 졸라가 소설에서 묘사한 시대는 공장의 기계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정황을 담았다. 공장에는 거대한 기계 도입되어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기도 하며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던 상황이었다. 공장의 생산 과정에 기계가 도입되어 발생하는 노동자의 소외 현상을 소설에서 발견할 있다. 기계의 도입에 따른 노동자의 대량 해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이 기계의 출현에 위협을 느끼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펴볼 있는 것다. 소설의 어느 장면에서는 숙련공 구제가 기계와 경쟁을 벌여 승리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인간의 승리 아니라 근소한 차이였다는 점이다. 잠깐 동안의 대결에서 인간이 기계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있을지 모르지만, 피곤을 모르는 기계 앞에 언제나 월등한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이 승리한 경쟁이었지만 석연치 않은 승리였던 것이다.

 


상품 생산과정의 분업화로 달인 이들 숙련공들은 기계의 도입으로 해고당하면 무용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번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 받다 저자 고병권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가지 일에 익숙해진 숙련노동자들은 직장을 떠나면 존재적 변형 경험하게 된다. 무기력하고 소외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소설 목로주점에서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우울증에 다름없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제르베르를 비롯한 주인공들은 돈을 버는 대로 모두 맛있는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며 삶을 소진하고 그렇게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회의 부품과도 같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도시 하층민의 삶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삶의 양식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작가 에밀 졸라는 이러한 도시 하층민의 일상과 이들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세심하게 소설에 담아냈. 바로 시대상이 아마도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주목하고 있는 현실과 부합할 같다.

 


 

자본가의 갈망과 절대적/상대적 잉여 가치에 대해

 

이번 일곱 도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노동일 관련되어 있다. 노동일은 지난 6권을 떠올려보면, ‘하루 노동시간 의미하며, ‘필요노동시간’ + ‘잉여노동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시간, 노동일을 연장하여 많은 잉여수익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 노동자에겐 물리적, 생물학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하루 24시간 이상 일할 없으며,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휴식과 수면, 영양 섭취, 화장실 이용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활동으로 실제 노동일은 더욱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자본가의 욕망 추구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자본가가 노동일(혹은 잉여노동) 연장하여 잉여가치를 얻으려는 노력은 곧바로 제약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제약 조건 속에서 자본가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잉여노동을 늘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할 있는 방법은 필요노동 시간을 줄여 잉여노동시간 분을 많이 확보하는 길이 있다. 여기서 필요노동시간을 줄인다는 말은 노동력의 가치 줄인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경우는 여러 산업 부분에서 생산성 혁신 통해 동일한 노동시간에도 많은 상품들을 만들어 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면 노동시간을 강제로 늘려 얻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대신,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 실질적인 필요노동 시간의 여분을 줄임으로써 추가적인 잉여분을 자본가가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잉여분의 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마르크스는 언급했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생산력이 크게 증가해야한다는 전제다. 그래야 생활수단의 가치(: 노동자들의 생활 필수품 가격) 떨어지게 되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질 있다는 점이다.

 


개념의 구체적 사례로 마르크스는 특별잉여가치(혹은 추가잉여가치) 제시한다.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특별잉여가치는 특정 기업의 노동생산력이 평균에 비해 월등히 높을 경우 해당 자본가가 추가로 얻는 잉여가치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가정하고 있는 자본가는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익이 되는 활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의 사업은 본질적으로 공익의 목적이란 없거나 2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자본가에겐 우선 이윤이 생겨야 계속 사업을 이어갈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란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자본가들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합법적으로사업을 해나가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 하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에서 피터 싱어는 우리의 먹거리의 윤리학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더하여 기업의 윤리를 짧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월마트의 사례를 들고 있다. 2003 현재, 월마트의 CEO 리스콧의 연봉은 기본급 보너스, 스톡 옵션을 포함하여 1740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10년이 지났지만, 현재 환율로 계산해보면 200억이 넘는 연봉을 받은 것이다. 당시 월마트에서 일하는 풀타임 정규직 조합원의 연봉이 1 8천달러 수준이었다고 하니, 연봉 격차는 960배를 넘고 있다. 책의 1부와 2 끝에서 각각 언급하는 월마트의 사례를 통해 싱어는 월마트의 저렴한 상품 가격이 다른 누군가에게 비용을 전가한 결과일 있다 점을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모습을 찾아 있다. 대기업에 부품 혹은 물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의 공급업자들은 대기업의 비용절감 전략의 대상이 된다. 월마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말하는 갑의 횡포는 월마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특히 월마트는 노조를 배제했었고, 4 가족의 조합원이 연봉으로는 빈곤선 이하의 기준이었다. 2005 기록에서 월마트 종업원 자녀의 거의 절반이 건강보험에도 들어있지 않거나 국가 의료보조를 받는다고 했다. 이를 버지니아 유뱅크스의 저작 자동화된 불평등 소개된 현실을 떠올려보자면, 국가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수혜 대상자에겐 사생활의 노출과 엄격한 규정의 준수를 강요 받는 상황으로 이들에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피터 싱어는 자신의 저서에서 월마트에서 음식을 먹는 일도 상당한 윤리적 문제 내포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강화된 노동과 착취의 진보, 그리고 거인 노동자의 탄생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 노동자의 노동일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특히 노동법이 제정되기 전의 19세기에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15시간 이상 노동을 해야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 출간한 180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10시간 정도 언급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는 8시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좀더 줄은 셈이다. 이처럼 생물학적 존재로서 노동자들은 노동일을 연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대신 자본가들은 노동의 강도를 높여 노동 생산력을 높이고자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나온다. 채플린은 연장을 들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나사를 조이며 작업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틈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컨베이어 벨트의 속력이 빨라진다. 노동의 강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영화에선 개인 노동자로서 노동강도가 증가하여 노동 생산력을 증가하는 상황을 보여주었지만, 여러 노동자들이 함께일함으로써 추가 생산력을 발휘할 있다. 하나의 완성된 상품을 만들어내는데 많은 사람들을 투입하면 노동의 세분화가 이루어진다. 개별 노동자가 모여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데 거대한 노동자 되어 상품 생산에 추가적인 효율을 발휘하게 된다. 추가 생산력을 통해 추가적인 잉여를 만들어내지만, 추가 잉여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책에서 여겨 보아야할 지점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바로 이런 지점들이 아닐까. 이번 책의 제목인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표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개별 노동자가 거대한  전체 노동자 일부로서 부품화되는 것이다. 업무의 세분화에 있어서 끝판왕은 소련식 테크노크라시의 사례일 같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렌 그레이엄은 자신의 저서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서 스탈린의 집권 이후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교양 교육이 사라져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레이엄 교수가 만난 소련 엔지니어 중에는 제지 공장용 베어링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특정) 기계의 동력 파트나 다른 부품에는 세분화된 다른 학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기록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경공업 위원회는 기계 종류별로 압축기를 담당하는 엔지니어링 전공을 만들었다. 중공업 위원회는 유성 페인트와 비유성 페인트를 다루는 엔지니어를 위한 별도 과정이 필요하다고 고집했다. 농업 위원회는 개별 농작물을 담당하는 농학자, 개별 동물을 다루는 수의사를 키워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124

 

다른 기록도 보인다.

 

소련 엔지니어링 교육에서 전공 분야가 급증했던 것은 전통 엔지니어링 분야를 끊임없이 세분했기 때문이었다. 기계공학은 관련 전공 수십 개로 나뉘게 되어, 심지어 농기계, 공작기계, 주조 설비, 자동차, 트랙터, 비행기 엔진 세부 전공이 생겨났다. 금속공학에서는 구리와 합금을 다루는 전문가를 따로 양성했고, (…) 엔지니어링 파편화는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124

 


서양의 과학사가들이 평가하듯 소련의 지나치게 세분화한 전공 엔지니어 양성은 전체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인력을 양성했다. 중앙 정부에서 어떤 일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구성원들은 아무런 의문이나 개선의 여지 없이 자신이 맡은 업무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은 과도한 전체주의 혹은 독재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출간된 《북클럽 자본7권의 중심 화두는 노동자들이 모여 협업을 하면서 도출되는 전체 노동자혹은 거인 노동자 존재가 것이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모인 거인 노동자 단순히 개별 노동자들의 수가 더해진 산술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무언가 놀라운 일들을 더하여 해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적인 인간은 사회적 인간’, 다시 말하면 인격이 축소된 평균적인 노동자로서 파악되는 인간으로 특정된다. 책의 후반에서는 매뉴팩처의 분업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개별 노동자는 전체 공정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그저 앞의 일만을 전체 공정의 리듬에 맞춰 처리해내야 한다. 따라서 평생 가지 기능을 해내는 숙련노동자 탄생하게 되는 것이 매뉴팩처 분업 시기부터라고 한다. 이런 여건에 우리 몸이 맞추어져 신체의 변형이 일어나고 직업병이 발생하는 것도 바로 시기부터라고 있다. 개별 노동자는 거인 노동자의 일부로서 주어진 기능만을 담당할 , 여기에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가질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결국 상황은 노동자들의 존재, 노동자들의 몸이 자본가의 부속물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말하고 싶었던 같다.

 


특히 마르크스는 이런 양상이 노동생산력의 혁신으로 자본가는 추가 잉여를 얻게 된다는 점과 맞물려 있음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바로 지점에 주목하고, 현상을 파악하는 모습이 바로 마르크스가 많은 후대사람들에게 여전히 놀라움을 안겨주는 이유가 것이다. 자본 썼던 마르크스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았는지 책을 읽으면서 점점 알게 되고, 동시에 놀라움도 더해간다. 사회 현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이 군데 저서에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만, 전반을 통해 자신이 파악한 현상 이면의 양상,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책을 통해 이렇게 유기적이고 치밀하게 담아 놓을 있었을까 놀라게 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동의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파악해보지 않고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이가 있다면, 사람은 단순히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만하다. 오늘날 자본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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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8] 설교단 (The Pulpit)

 

[8장의 기본 줄거리]

예배를 보러 고래잡이 예배당 들어온 이슈메일은 눈보라를 헤치고 들어온 목사의 행동을 관찰한다. 목사는 독특한 설교단으로 오르는 모습과 이후의 행동, 그리고 설교단 뒤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관찰하며, 설교단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한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이번 8장에서 설교단의 보편적인 상징성 주목한다. 고래잡이 산업이 주를 이루는 이곳 뉴베드포드의 항구에 있는 고래잡이 예배당 있는 설교단은 우선 일반적인 계단이 없다. 대신 작은 배에서 배로 올라갈 사용하는 줄사다리를 달아 놓았다. 이제 우산도 마차도 이용하지 않고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노인은 존경받은 교회의 매플 목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작살잡이로도 일했던 사람이었으며, 일찍 성직에 몸을 담았다.    

 

이내 이슈메일의 시선은 설교단으로 향하는 목사를 따라간다. 줄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을 오른 다음, 목사는 설교단 밖으로 걸쳐있는 줄사다리를 끌어 올리는 연극적 행위에 주목한다. 목사 스스로 작은 퀘벡 요새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있을 것인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우선 이슈메일은 행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행위는 바깥세상의 모든 세속적 인연과 관계로부터 정신적으로 잠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아닐까? 하느님의 충실한 종인 그에게 하느님 말씀의 고기와 포도주로 가득 설교단은 자급자족할 있는 요새, 성벽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인 것이다.

 

, 이슈메일이 생각해 설교단의 상징성은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설교단은 바로 세상의 선두이며,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알려진, 혹은 미국을 만든 책으로 꼽히기도 하는 모비 정치와 종교가 헌법상 분리되어 있는 미국이 사실은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이 이끌어가는 곳이라는 미국의 본질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고 간주해도 같다. 여기에서 나아가 매플 목사는 하느님의 종인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세상의 선봉에 자가 것이다. 이슈메일은 세상이 항해를 떠난 배이며, 배의 형상을 설교단은  세상이라는 뱃머리라고 하며 8장을 마무리 짓는다.

 


 

예배당의 그림과 다른 상징성

 

8장에서 흥미를 부분은 설교단보다도 이슈메일의 시선이 스치듯이 지나가며 발견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설교단 뒷벽에 걸려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림에 대한 묘사와7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그림 <노예선The Slave Ship> 묘사와 매우 흡사하여, 나는 멜빌이 8장에서 터너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주장해보고자 한다.

 

우선 터너의  <노예선 The Slave Ship> 그림(아래)을 먼저 보자.

 

(전체그림)


(오른쪽 아래 부분 확대 그림)


그림의 정확한 제목은 다음과 같다.

<Slavers Throwing overboard the Dead and Dying—Typhoon coming on > 이다.

 

제목을 거칠게 직역해보자면,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들을 밖으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다가오는 폭풍> 정도가 같다. 그림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터너가 1840년에 처음 전시한 그림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와 서경식 교수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따르면, 토마스 클락슨(Thomas Clarkson) 저서 《노예 무역의 역사와 폐지  The History and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읽고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이 7장에서 언급했던 종호학살사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위키피디아는 추측이 맞음을 확인해주었다. ‘종호학살사건 1781년에 영국인 선주가 노예를 자신의 재화라고 생각하고, 죽거나 건강하지 못해 죽어가던 노예들을 수장시켜 잃어버린 재화 대한 보험금 청구를 위해 저질러진 학살사건이었다. 사건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60년이 지나서도 터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있다.

 

전체 그림(첫 번째)을 보면, 그림의 가운데에 노을과 함께 해가 저물고 있으며, 왼편에는 검은 폭풍우와 이곳으로 향하는 배가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아래, 바다에는 물에 던져진 노예들의 손과 발이 보이는데, 여전히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 모습을 있다. 그림의 오른 아래 부분을 확대한 부분 그림이 아래( 번째) 그림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바다의 물고기들과 상어들, 그리고 새들은 물에 빠진 노예들에게 달려들거나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는 물고기, 상어 떼에 잡아 먹히는 쇠고랑 노예들의 쇠고랑 채워진 수족이 거센 파도 속에서 모를 보이고 있다. 

 

대략 그림을 파악했으니, 이제 모비 8장에 등장하는 설교단 뒤의 그림 관해 이슈메일이 묘사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딪혀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 앞바다에서 무서운 폭풍우를 만난 호화로운 척이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소나기와 굽이치는 먹구름 높은 하늘에는 태양이 작은 섬처럼 있고, 그곳에서 천사의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얼굴이 심하게 흔들리는 배의 갑판에 빛을 던져, 넬슨 제독이 빅토리 갑판에 박아 놓은 은판처럼, 부분만 또렷이 드러났다.

 

다시 묘사와 터너의 그림을 놓고 비교해 보면, 일치해 보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폭풍우를 만난 척이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어두운 바다로 거친 파도를 힘겹게 헤치며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림의 가운데 보이는 태양이 개인적으로는 날개가 있는 천사의 형상으로 상상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슈메일은 죽음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들의 처절한 모습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예배당의 의자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 뒤의 그림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대신 이슈메일은 끓어 넘치듯 분노하는 바다 멀리 척이 폭풍을 향해 나아가는 그림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다시 모비 7 읽기를 상기해보면, 1781년에 영국의 노예선 (Zong)에서 죽거나 죽어가는 아프리카 노예 132명을 수장시켜버린 종호학살사건 대해서 정리해두었다. 우선 멜빌은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터너의 <노예선The Slave Ship> 그림 원본을 보스턴 미술관에서 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보스턴 미술관은 1870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모비 딕》 집필하던 1850 시점에서 보스턴 미술관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터너가 그림을 그리고 처음 전시한 연도는 1840년인데, 전시된 곳은 영국(런던에서 태어나 평생 런던에서 살았으므로 아마도 런던에서 전시가 되었을 것이다) 것이다. 작가정신 《모비 딕》버전에 기록된 허먼 멜빌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1839 20세의 혈기왕성하던 청년 멜빌은 영국 서부 해안의 도시 리버풀로 향하는 화물선에 급사로 승선했다고 나온다. 리버풀은 노동자들의 도시로 이곳에 도착한 멜빌은 대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빅토리아조 사회의 명백한 불평등을 발견 한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세상을 배워나갔던 멜빌은 처음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에 도착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양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터너가 자신이 그린 <노예선The Slave Ship> 영국에서 그림을 전시하던 즈음(1840) 멜빌이 영국을 처음 방문(1839-1840)했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사회를 놀라게 했던, 혹은 논쟁적일 만한 그림에 대해 또는 화가 윌리엄 터너에 대해 멜빌이 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물론 나의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20세의 젊은 나이라고 해도, 리버풀에 처음 도착하여 리버풀이라는 도시에서 계급의 격차라는 문제를 알아볼 만큼의 예민함과 《모비 딕》3장에서도 짐작해볼 있듯이,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멜빌이 터너의 작업에 대해 알았을 법한 감수성은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보인다.

 

다시 정리해보면, 1840년에 터너의 그림이 영국에서 전시되었을 , 멜빌이 그림의 원본을 직접 보았을 가망은 희박하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림을 모사하여 걸어두는 것이 흔한 유행이기도 했기에, 포경산업이 중심을 이루는 뉴베드포드의 예배당에 터너가 그린 그림,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는 (모사한) 그림이 설교단의 뒤에 걸려있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울러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의 계급적 격차의 모습을 알아보는 감수성을 지녔던 20살의 멜빌이라면, 그리고 배를 타면서도 여가 시간을 온전히 책을 읽는데 할애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던젊은 청년이라면, 수십년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종호학살사건 윌리엄 터너의 과감하고 논쟁적인 그림을 모르지 않았을 터이다. 아울러 노예제를 혐오했던 멜빌이  정치적으로 급진파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공명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생각해본다.  

 

다시 작가 연보에 따르면, 이후 1840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멜빌은 서부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실패하고, 포경선 아쿠시넷호를 타게 되는데, 때의 경험이 바로 《모비 딕》 녹아들어가 훗날 수면으로 부상하게 된다.

 

 

터너의 노예선에 대한 외국 블로거의 해석

 

다시 터너의 노예선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터너의 <노예선>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간단히 덧붙여두기로 한다.

 

[출처: http://www.the‐art‐minute.com/joseph‐mallord‐turner/ ]

 

글에 따르면, 블로거는 터너의 그림이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라는 낭만주의 개념을 저버린 행위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한다. (참고: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대한 논의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동훈 옮김, [마티] 참고할 )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개념은 이미 모비 3 읽기 부분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입구에 걸린 형체를 없고 불길해 보이는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잠시 언급했던 개념이다. 어쩌면 3장에서 여인숙에 걸려있던 그림도 역시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서 찾을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앞서 출처 부분에 소개한 블로거에 따르면, 숭고미 낭만주의의 개념에 범주화되어 있음을 있다. 그리고 개념은 자기 보존이라는 인간의 본능과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숭고미 공포와 고통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동시에 신과 자연의 권능(power) 보여주기에 우리를 압도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터너의 그림 <노예선> 보자.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는 노예선 앞의 바다는 거센 파도가 일고 있다. 그림 자체는  종호학살사건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는 세부 모습을 알기 어렵다. 대신 비극이 벌어지는 거센 바다의 격랑은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드먼드 버크가 이야기한 숭고미 요소가 보인다. 하지만 터너는 숭고미의 낭만적 개념을 배반한다. 거칠게 일렁이는, 심지어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듯한 바다의 표면은 죽은 노예의 시체와 바다에 던져진 병든 노예가 상어 떼의 습격으로 고통과 아우성, 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블로거는 강렬한 장면을 인륜을 저버린 인간에 대해 분노하고 못마땅해 하는 신의 분노를 포착하는 그림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압도하고, 심지어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며, 신의 권능과 자연의 웅장함이 드러내는 숭고함’, ‘숭고미라는 개념은 인간의 탐욕과 인간성이 상실된 학살 행위로, 피로 물드는 바다의 그림을 통해 숭고함 얼룩지고 배반당하고 있는 것이다.       



 



[ 내용에 대한 무단 전재와 사용을 금합니다.]

 

 

 

[참고서적]

 

 

 

 그리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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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7] 예배당(The Chapel)

 

[7장의 기본 줄거리]

뉴베드퍼드의 일요일 아침,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다녀온 이슈메일은 낸터킷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 일요일인 당일에 예배당에 들른다. 예배당에 앉아 쪽에 미리 있던 퀴퀘그를 발견하고, 예배가 시작하기 전의 분위기와 예배당을 둘러보며 죽음과 실체에 대한 생각을 하는 , 이것 저것 생각에 잠긴다.

 

 

낸터킷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날, 이슈메일은 일요일 아침에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갔다 여인숙에 돌아온다. 이슈메일은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고래잡이 예배당 들른다. 진눈깨비가 섞인 강한 바람을 뚫고 들어간 예배당에서 이슈메일은 곧바로 죽음 분위기를 감지한다. 예배당에 사람들의 표정에서 말못할 이들의 슬픔의 징후를 읽어내며, 예배당 내부에 있는 대리석 추모비를 살펴보며 유족들의 슬픔을 상상해본다. 예배당 내에 있는 추모비에 적힌 이름들의 주인공은 모두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리석의 주인들은 모두 실종상태 였던 . 이들의 시신이나 뼈도 추스리지 못한 유족들이 예배당에나마 추모비를 세웠다.

 

검은 테를 두른 대리석 밑에는 줌의 재도 들어 있지 않으니, 공허는 얼마나 쓰린가!”(70)   

 

이슈메일은 예배당에 사람들의 표정과 추모비를 통해 이들의 심경을 상상하고 공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이슈메일은 인간의 행동에서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면들, 부조리해 보이는 면들, 무언가 어긋나 있는 행동의 양식들,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슈메일이 열거한 것들 가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6천년 전에 죽은 옛날의 아담은 아직도 꼼짝하지 못하고 영원히 마비된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혼수상태 속에 누워 있는가. (…)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나는 문장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대한 물음을 통해, 생명보험과 노예선에 대해 언급한 서경식 교수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떠올렸다. 책에는 영국의 화가 *터너 (J.M.W. Turner, 1775-1851) 유명한 그림 <, 증기, 속도>외에 <노예선-다가오는 태풍> 나오며(터너는 노예폐지론자 였다고 한다) 이어서, 1781 발생한 (Zong) 학살사건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당시의 영국에는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밀무역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와중에 1781 영국 노예선 (Zong)호에 아프리카 노예들을 싣고 가는 도중에 종호의 선원들이 살아있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132명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소유주가 밝힌 학살의 주된 이유는 식수부족이었다고 했다. 식수가 부족한데 노동력이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넣었을까? 이유는 바로 노예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주는 노예 전체를 부족한 때문에 죽게하는 것보다 건강이 나쁜 노예들을 바다에 처분하고, ‘손실 대한 보험금지급을 위해 재판을 청구했던 것이다. 여러 번의 재판을 거쳐 나온 판결은 노예는 가축과 마찬가지로 소유물이므로, 보험회사는 보상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 것이었다. 이후 1780 후반을 기해 노예폐지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는데, 멜빌 역시 노예폐지를 지지하는 입장을 모비 에서도 여러 군데 (간접적으로) 확인할 있다. 작중의 이슈메일이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인간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쉽게 떠올려 있겠다. 노예와 보험의 역사는 노예가 일종의 생산자본 일종으로서 노예의 비인간화 과정을 통해, 수량화될 있는 교환 가치로서 사용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멜빌이 종호 학살사건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슈메일의 지적하듯 문장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터너: 그러고보니 터너가 사망한 해(1851)는 허먼 멜빌이 모비 출간한 해이기도 하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이어서 예배당에 앉아 생각에 잠긴 이슈메일은 죽음/ 실체 관해 생각을 더해 나간다.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인간을 영원의 세계로 처넣고 마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잘못 생각해온 같아.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 인지도 몰라.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흐린 가장 맑은 공기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몸뚱이는 나은 존재의 찌꺼기일 분인지도 몰라.

 

우울한 분위기의 예배당에서 자신도 고래잡이배를 타러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임을 다시금 상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시 쾌활함을 되찾고, 이를 배를 타라는 운명의 권유 받아들이고 있다. 이슈메일은 이렇게 고래잡이배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배당의 침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배를 반드시 타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시 다지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굴조개의 비유 멜빌이 선원으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인간의 어리석은 미망(迷妄)’ 대한 탁월한 비유라고 이해된다. 존재의 찌꺼기(흔적) 신체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의 정신보다 하위에 위치한 대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인간 자신의 죽음 대한 운명은 아무도 모르는 존재이기에 이슈메일은 ‘(고래잡이가 죽음의 위험이 있다 한들) 아무렴 어떤가?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라는  태도를 갖게 된다.  

 


여기서 원문(영어)’ 관련하여 가지 발견한 사항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원문을 보면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 인지도 몰라.

Methinks that what they call my shadow here on earth is my true substance.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흐린 가장 맑은 공기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Methinks that in looking at things spiritual, we are too much like oysters observing the sun through the water, and thinking that thick water the thinnest of air.

 

몸뚱이는 나은 존재의 찌꺼기일 분인지도 몰라.

Methinks my body is but the lees of my better being.

 

 

멜빌이 모비 집필하던 시기는 1850 여름부터이다. 당시에 사용되던 영어 중에서 Methinks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단어는 물론 ‘me + think’('나는 ~ 생각한다/ 생각에는~'과 같은 정도가 될 것 같다) 해당하는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단어가 멜빌이  모비 집필하기 전에 탐독했던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아 의도적으로 구성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멜빌이 셰익스피어를 알게된 것은 그에게 정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멜빌은 단어와 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나는 문장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일종의 숨은 오마주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좀더 신빙성과 이해를 더하자면, 작가정신에서 나온 모비 김석희 번역가가 옮긴이의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작품을 집필할 무렵 멜빌의 독서량은 놀랄 만큼 늘어났고, 앞에서 말한 고전 작가들 이외에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와의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다. 만남이 없었다면 모비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비교할 만한 동시대 작가라고 멜빌 자신이 평가한 내서니얼 호손과의 만남이 있다.

 

 

추가로 이에 대한 근거는 단어에 대해 찾아보다가 발견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보완된다.

 

하나는 1591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III.i) 다음의 문장이 보이기 때문이다.

methinks the truth should live from age to age,”

 

다른 하나는 1599 역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32)에도 다음의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

“The lady doth protest too much, methinks.

 


다시 정리하면, 완전한 문장의 앞에 흔히 쓰이거나, 종종 완전한 문장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형태로 셰익스피어가 기록이 보인다. 옮긴이의 지적대로 멜빌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탐독했을 것이고, 17-18세기 당시의 문어체를 사용하였기에, 영어 전공을 하지 않은 독자로서는 사실 읽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일부 문장을 접해보고 받은 인상은 멜빌이 모비 에서 써나갔던 문장들이 상당히 리듬감이 있고, 시를 읽는 듯한 느낌 혹은 래퍼가 가사를 읊는 느낌마저 들 때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지엽적인 번역문제이긴 하나 나라면 어떻게 것인가를 생각해보다가 노트하게 되었다.

번째 영문에서 thick water thinnest of air 대한 우리말 표현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나는 번역의 오역이나 틀린 점을 수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기에 다른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를 고민해보았다.

 

우선 굴조개의 비유표현에서, 작가정신 버전의 김석희 번역가는 ‘thick water’ 흐린 , ‘thinnest of air’ 맑은 공기 표현한 반면, 문학동네 버전의 황유원 번역가는 ‘thick water’ 뿌연 , ‘thinnest of air’ 맑은 대기 표현했다.

 

일단 표현들이 서로 대응하는 구조임을 생각해볼 , 나라면 ‘water air’ 각각 물과 공기’(자연의 기본 요소로서의 대상) 내지는 바다와 대기’(지구 구조의 부분으로서의 존재) 쌍이 되도록 맞추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thin air라는 표현을 생각할 ,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대기가 희박해지는상황을 떠올려보면, ‘밀도라는 구심점으로 상반되는 표현을 찾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thick water’ 짙은 바다,  ‘thinnest of air’ 희박한 대기 말이다. 이렇게 표현해 놓고 보니, 사실 번역가들의 표현이 무난해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분명히 번역가들은 이런 표현 하나에도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간단한 표현 하나를 붙잡고 생각만 해보아도, 앞으론 내가 직접 검토해보기 전에는 번역가들의 작업에 무턱대로 번역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할 같다. 특히나 현대 영어가 아닌 표현들이 많이 보이는 모비 과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참고문헌

[1]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2] 《일러스트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3] 나의 영국 인문 기행 - 서경식 지음 | 최재혁 옮김 | [반비]

[4] Moby-Dick or, The Whale Herman melville지음 | [Penguin Classics]

[5]  Methinks 대한 출처: https://en.m.wiktionary.org/wiki/methinks#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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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인가 <모비 딕>을 한 번
읽어 보겠노라고 중고 서점에서
책을 사다가 시작해서 딱 요기
까지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읽기 시작해야 하나요 ^^

초란공 2019-09-06 14:12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모비 딕>을 ‘작가정신‘의 아셰트클래식으로 만난 것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워낙 포경선과 고래에 관한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아셰트 클래식 버전은 상당부분에 대해 그림과 설명이 있어서 분량은 더 많지만 이해가 잘되고, 재미있게 읽었어요. 강추입니다. 몇 개월 걸려서 겨우 한 번 읽긴 했지만,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번에 문학동네서 나온 ‘록웰 켄트‘ <일러스트 모비 딕>은 그림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일러스트 그림 자체가 상당한 매력이 있네요. 주석도 좀 더 풍부하고 만듬새가 좋네요.
 

《에티카》

황태연 옮김 | 비홍출판사

제4부 정리66-정리73을 위주로 한 단상들

: 자유인과 노예에 관한 생각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감정이 갖는 힘, 내지는 감정의 역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정리 66의 주석에서는 자유인과 노예를 언급한다. 스피노자가 자유인과 노예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가’ 아니면 ‘감정이나 의견에 의해서만 인도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은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그런 까닭에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들 만을 행하’는 사람이다. 반면 노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들을’ 행한다. 제3부에 등장하는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인 코나투스(conatus) 개념으로 말하면, 자유인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에 근접한 사람으로 생각해본 인물은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이다. 서머싯 몸은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의 삶을 기반으로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의 스트릭랜드는 앞길이 보장되고 편안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부인과 두 아이들을 떠나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였다.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도덕적인 이유로 비난했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그것도 가차없이 가족의 인연을 끊은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나아가 그림에 탁월한 재능도 없던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는데 모든 것을 버릴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조롱과 비난을 보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스트릭랜드가 《에티카》에 제시된 ‘자유인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스트릭랜드가 냉철한 이성의 지도에 따라 결정했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세인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스트릭랜드의 이기심은 분명히 ‘자기애에 기초한 이기심’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마흔이 될 때까지는 ‘6펜스’의 세계, 곧 세속과 물질의 세계, 관습과 타성적 욕망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기대되어진 ‘역할’을 맡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 대긴 했으나,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스트릭랜드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열망을 억누르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스피노자의 ‘노예’처럼 살아왔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이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라고 말한 맥락과 유사하다.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예속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스트릭랜드는 문명의 관습이 자신에게 부여한 책임을 수행하며 ‘체제 안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천둥 벼락과 같은 계시’를 받았는지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잘 정돈되고 편안한 삶을 모두 벗어던지고 스스로 ‘체제 밖, 달의 세계’로 튕겨져 나간다.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에게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비난하는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스트릭랜드를 인도했던 그 무언가가 ‘이성’(제2종 인식)이 아니었다면, ‘직관의 인식’(제3종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일관되게 감정이 거세되어 보이는 인물, 스트릭랜드가 어떤 감정이나 의견에 인도된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그림 그리기)을, 그러므로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 만을 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자유인의 ‘능동적인 정서’로서 ‘인식(understanding)하는 한에서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활동’인 ‘정신의 힘’을 제시한다. 이 정신의 힘에는 용기(tenacity, 정신의 강인함)와 아량(nobility, 고귀함에서 나오는 친절, 배려)이 있다[제3부 정리 59의 주석 참조]. 스피노자에 따르면, ‘용기’는 이성의 지령에 따라 자신의 존재(being)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아량’은 이성의 지령에 따라 타인을 돕고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정리하고 있다. 스트릭랜드는 분명 스피노자의 용기로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이 유일하게 원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그리기’를 위해 ‘달의 세계’로 자신을 던져넣는다. 다만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의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의 비극성이 위치한다. 그는 인습과 구속의 세계를 벗어나지만 타히티의 완벽한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간다.

정리해보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의 자유인에 불완전하지만 상당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제4부 정리 73에서 언급된 내용("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 보다는 공동의 결정에 따라서 생활하는 국가 내에서 더욱 자유롭다.")에는 정확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이 전하듯 스피노자의 자유인이 되기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에 구현된 찰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코나투스에 따라 살았던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비록 고독과 문둥병 속에서 죽었지만, 고독과 죽음은 자유인인 그에게 무의미했다. 스트릭랜드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고 자신을 구원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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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5] 아침식사(Breakfast)

 

[5장의 기본 줄거리]

물보라 여인숙에서 침대, 이불을 덮고 하루 밤을 지낸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여인숙의 술청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한다. 술청에는 간밤에 들어온 투숙객들로 가득 있었다. 아직 선원용 재킷을 입고 있던 사내들로서 입항한 포경선의 선원들이었다. 이슈메일은 식탁에서 이들과 퀴퀘그의 식사예절을 관찰한다.

 

 


 

5장의 배경은 물보라 여인숙의 아침식사가 준비된 술청이다. 이번 장도 매우 짧은 장이며 이슈메일이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 전의 풍경, 포경선원들의 모습, 퀴퀘그의 식사법 등에 관한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밤새 만원을 이루던 여인숙에서 주인장 코핀의 장난으로 침대, 이불을 덮고 자게 퀴퀘그와 이슈메일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러 술청으로 내려간다.

 

히죽거리는 주인에게 이슈메일은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슈메일의 독백이 흥미롭다.

 

실컷 웃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다. (…)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유쾌한 웃음거리로 제공한다면, 사람이 부끄러워서 꽁무니를 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해주어라. 자신에 대해 실컷 웃을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을 분명하다.

 

  부분은 스치듯 지나가는 부분이며 작품을 이야기할 어떤 역할을 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내면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불쑥 드러나는 저자의 이런 생각들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행동은 저자인 멜빌이 수긍하고 동의하는 행동양식일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에 잠시 멈춰가게 되는 부분이다.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유머라고 하는 것의 기본적인 정신이자 자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희화화 과정에서 시작한다 말이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유쾌한 웃음거리로 대상화하고 거리두기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슈메일의 독백대로 스스로 타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제공하면, 기꺼이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 닮아 있기도 하다. ‘누군가 나의 왼쪽 뺨을 때리면, 나의 오른쪽 뺨도 대주어라 같은 논리의 성경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유머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사람이며, 유머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울러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사람이 있는 조건이기도 것이다. 소설의 전개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겠지만, 멜빌이 생각하고 공감하는 바를 170년이 지난 독자가 공감할 있는 이런 부분은 천천히 읽을 발견할 있는 부분이 아닐까한다.

 

여인숙 주인이 식사들 !’라는 말에 술청의 투숙객들은 모두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이슈메일은 아침 식사가 이루어지는 식탁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그런데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은' 이들의 태도가 성숙한 사교술이 아닌 깊은 침묵으로 일관된 아침 식사 풍경을 보고 희한한 광경이라고 말한다. 서양에서는 특히 같은 식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예의바르지 못한 사교술이라고 판단하는 같다. 귀항한 포경선원들로부터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들을 기대에 부푼 이슈메일에게 이런 깊은 침묵은 마뜩잖다. ‘처음 보는 고래를 수줍음도 없이 죽이는 노련한 포경선원들이 식탁에 앉아 목장의 양들처럼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식사를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슈메일은 이들을 수줍어하는 곰들! 겁쟁이 전사 같은 고래잡이들!이라고 생각한다.

 

퀴퀘그 역시 날카로운 작살을 식탁에 올려놓고 설익은 비프스테이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말없이 먹는 집중한다. 이슈메일은 고드름처럼 차가운 그의 예절을 높이 평가할 없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오지를 여행하는 과거의 탐험가들처럼 사교술을 터특하기에 어울리지 않은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교술은 어디서나 얻을 있다고 평한다.

 

다시 보면 서양에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침묵으로 서로를 무시한 , 음식을 먹는 행위에만 몰두하는 일은 예의바르지 않은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가 예의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배운 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침식사 풍경은 오히려 이들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교양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이슈메일은 카토와 피타고라스를 이야기하고, 성경에 익숙한 교양인이라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 교양인이라면 으레 하게되는, 혹은 갖게되는 행동양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면을 이슈메일에서도 발견할 있다. 식탁에서의 침묵행위를 예절바르지 못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같다.

 

이번 5장에서는 아침식사 풍경을 통해 포경선원들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퀴퀘그의 세세한 행동양식을 보여주기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람이 포경선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에 소설의 장면은 이들이 다니는 뒤를 밟아 퀴퀘그의 면모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슈메일이 퀴퀘그를 관찰하는 부분은 당분간 간간이 나오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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