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8] 설교단 (The Pulpit)

 

[8장의 기본 줄거리]

예배를 보러 고래잡이 예배당 들어온 이슈메일은 눈보라를 헤치고 들어온 목사의 행동을 관찰한다. 목사는 독특한 설교단으로 오르는 모습과 이후의 행동, 그리고 설교단 뒤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관찰하며, 설교단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한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이번 8장에서 설교단의 보편적인 상징성 주목한다. 고래잡이 산업이 주를 이루는 이곳 뉴베드포드의 항구에 있는 고래잡이 예배당 있는 설교단은 우선 일반적인 계단이 없다. 대신 작은 배에서 배로 올라갈 사용하는 줄사다리를 달아 놓았다. 이제 우산도 마차도 이용하지 않고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노인은 존경받은 교회의 매플 목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작살잡이로도 일했던 사람이었으며, 일찍 성직에 몸을 담았다.    

 

이내 이슈메일의 시선은 설교단으로 향하는 목사를 따라간다. 줄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을 오른 다음, 목사는 설교단 밖으로 걸쳐있는 줄사다리를 끌어 올리는 연극적 행위에 주목한다. 목사 스스로 작은 퀘벡 요새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있을 것인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우선 이슈메일은 행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행위는 바깥세상의 모든 세속적 인연과 관계로부터 정신적으로 잠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아닐까? 하느님의 충실한 종인 그에게 하느님 말씀의 고기와 포도주로 가득 설교단은 자급자족할 있는 요새, 성벽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인 것이다.

 

, 이슈메일이 생각해 설교단의 상징성은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설교단은 바로 세상의 선두이며,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알려진, 혹은 미국을 만든 책으로 꼽히기도 하는 모비 정치와 종교가 헌법상 분리되어 있는 미국이 사실은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이 이끌어가는 곳이라는 미국의 본질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고 간주해도 같다. 여기에서 나아가 매플 목사는 하느님의 종인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세상의 선봉에 자가 것이다. 이슈메일은 세상이 항해를 떠난 배이며, 배의 형상을 설교단은  세상이라는 뱃머리라고 하며 8장을 마무리 짓는다.

 


 

예배당의 그림과 다른 상징성

 

8장에서 흥미를 부분은 설교단보다도 이슈메일의 시선이 스치듯이 지나가며 발견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설교단 뒷벽에 걸려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림에 대한 묘사와7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그림 <노예선The Slave Ship> 묘사와 매우 흡사하여, 나는 멜빌이 8장에서 터너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주장해보고자 한다.

 

우선 터너의  <노예선 The Slave Ship> 그림(아래)을 먼저 보자.

 

(전체그림)


(오른쪽 아래 부분 확대 그림)


그림의 정확한 제목은 다음과 같다.

<Slavers Throwing overboard the Dead and Dying—Typhoon coming on > 이다.

 

제목을 거칠게 직역해보자면,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들을 밖으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다가오는 폭풍> 정도가 같다. 그림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터너가 1840년에 처음 전시한 그림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와 서경식 교수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따르면, 토마스 클락슨(Thomas Clarkson) 저서 《노예 무역의 역사와 폐지  The History and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읽고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이 7장에서 언급했던 종호학살사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위키피디아는 추측이 맞음을 확인해주었다. ‘종호학살사건 1781년에 영국인 선주가 노예를 자신의 재화라고 생각하고, 죽거나 건강하지 못해 죽어가던 노예들을 수장시켜 잃어버린 재화 대한 보험금 청구를 위해 저질러진 학살사건이었다. 사건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60년이 지나서도 터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있다.

 

전체 그림(첫 번째)을 보면, 그림의 가운데에 노을과 함께 해가 저물고 있으며, 왼편에는 검은 폭풍우와 이곳으로 향하는 배가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아래, 바다에는 물에 던져진 노예들의 손과 발이 보이는데, 여전히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 모습을 있다. 그림의 오른 아래 부분을 확대한 부분 그림이 아래( 번째) 그림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바다의 물고기들과 상어들, 그리고 새들은 물에 빠진 노예들에게 달려들거나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는 물고기, 상어 떼에 잡아 먹히는 쇠고랑 노예들의 쇠고랑 채워진 수족이 거센 파도 속에서 모를 보이고 있다. 

 

대략 그림을 파악했으니, 이제 모비 8장에 등장하는 설교단 뒤의 그림 관해 이슈메일이 묘사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딪혀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 앞바다에서 무서운 폭풍우를 만난 호화로운 척이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소나기와 굽이치는 먹구름 높은 하늘에는 태양이 작은 섬처럼 있고, 그곳에서 천사의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얼굴이 심하게 흔들리는 배의 갑판에 빛을 던져, 넬슨 제독이 빅토리 갑판에 박아 놓은 은판처럼, 부분만 또렷이 드러났다.

 

다시 묘사와 터너의 그림을 놓고 비교해 보면, 일치해 보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폭풍우를 만난 척이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어두운 바다로 거친 파도를 힘겹게 헤치며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림의 가운데 보이는 태양이 개인적으로는 날개가 있는 천사의 형상으로 상상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슈메일은 죽음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들의 처절한 모습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예배당의 의자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 뒤의 그림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대신 이슈메일은 끓어 넘치듯 분노하는 바다 멀리 척이 폭풍을 향해 나아가는 그림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다시 모비 7 읽기를 상기해보면, 1781년에 영국의 노예선 (Zong)에서 죽거나 죽어가는 아프리카 노예 132명을 수장시켜버린 종호학살사건 대해서 정리해두었다. 우선 멜빌은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터너의 <노예선The Slave Ship> 그림 원본을 보스턴 미술관에서 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보스턴 미술관은 1870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모비 딕》 집필하던 1850 시점에서 보스턴 미술관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터너가 그림을 그리고 처음 전시한 연도는 1840년인데, 전시된 곳은 영국(런던에서 태어나 평생 런던에서 살았으므로 아마도 런던에서 전시가 되었을 것이다) 것이다. 작가정신 《모비 딕》버전에 기록된 허먼 멜빌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1839 20세의 혈기왕성하던 청년 멜빌은 영국 서부 해안의 도시 리버풀로 향하는 화물선에 급사로 승선했다고 나온다. 리버풀은 노동자들의 도시로 이곳에 도착한 멜빌은 대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빅토리아조 사회의 명백한 불평등을 발견 한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세상을 배워나갔던 멜빌은 처음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에 도착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양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터너가 자신이 그린 <노예선The Slave Ship> 영국에서 그림을 전시하던 즈음(1840) 멜빌이 영국을 처음 방문(1839-1840)했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사회를 놀라게 했던, 혹은 논쟁적일 만한 그림에 대해 또는 화가 윌리엄 터너에 대해 멜빌이 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물론 나의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20세의 젊은 나이라고 해도, 리버풀에 처음 도착하여 리버풀이라는 도시에서 계급의 격차라는 문제를 알아볼 만큼의 예민함과 《모비 딕》3장에서도 짐작해볼 있듯이,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멜빌이 터너의 작업에 대해 알았을 법한 감수성은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보인다.

 

다시 정리해보면, 1840년에 터너의 그림이 영국에서 전시되었을 , 멜빌이 그림의 원본을 직접 보았을 가망은 희박하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림을 모사하여 걸어두는 것이 흔한 유행이기도 했기에, 포경산업이 중심을 이루는 뉴베드포드의 예배당에 터너가 그린 그림,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는 (모사한) 그림이 설교단의 뒤에 걸려있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울러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의 계급적 격차의 모습을 알아보는 감수성을 지녔던 20살의 멜빌이라면, 그리고 배를 타면서도 여가 시간을 온전히 책을 읽는데 할애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던젊은 청년이라면, 수십년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종호학살사건 윌리엄 터너의 과감하고 논쟁적인 그림을 모르지 않았을 터이다. 아울러 노예제를 혐오했던 멜빌이  정치적으로 급진파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공명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생각해본다.  

 

다시 작가 연보에 따르면, 이후 1840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멜빌은 서부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실패하고, 포경선 아쿠시넷호를 타게 되는데, 때의 경험이 바로 《모비 딕》 녹아들어가 훗날 수면으로 부상하게 된다.

 

 

터너의 노예선에 대한 외국 블로거의 해석

 

다시 터너의 노예선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터너의 <노예선>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간단히 덧붙여두기로 한다.

 

[출처: http://www.the‐art‐minute.com/joseph‐mallord‐turner/ ]

 

글에 따르면, 블로거는 터너의 그림이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라는 낭만주의 개념을 저버린 행위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한다. (참고: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대한 논의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동훈 옮김, [마티] 참고할 )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개념은 이미 모비 3 읽기 부분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입구에 걸린 형체를 없고 불길해 보이는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잠시 언급했던 개념이다. 어쩌면 3장에서 여인숙에 걸려있던 그림도 역시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서 찾을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앞서 출처 부분에 소개한 블로거에 따르면, 숭고미 낭만주의의 개념에 범주화되어 있음을 있다. 그리고 개념은 자기 보존이라는 인간의 본능과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숭고미 공포와 고통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동시에 신과 자연의 권능(power) 보여주기에 우리를 압도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터너의 그림 <노예선> 보자.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는 노예선 앞의 바다는 거센 파도가 일고 있다. 그림 자체는  종호학살사건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는 세부 모습을 알기 어렵다. 대신 비극이 벌어지는 거센 바다의 격랑은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드먼드 버크가 이야기한 숭고미 요소가 보인다. 하지만 터너는 숭고미의 낭만적 개념을 배반한다. 거칠게 일렁이는, 심지어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듯한 바다의 표면은 죽은 노예의 시체와 바다에 던져진 병든 노예가 상어 떼의 습격으로 고통과 아우성, 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블로거는 강렬한 장면을 인륜을 저버린 인간에 대해 분노하고 못마땅해 하는 신의 분노를 포착하는 그림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압도하고, 심지어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며, 신의 권능과 자연의 웅장함이 드러내는 숭고함’, ‘숭고미라는 개념은 인간의 탐욕과 인간성이 상실된 학살 행위로, 피로 물드는 바다의 그림을 통해 숭고함 얼룩지고 배반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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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그리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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