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황태연 옮김 | 비홍출판사

제4부 정리66-정리73을 위주로 한 단상들

: 자유인과 노예에 관한 생각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감정이 갖는 힘, 내지는 감정의 역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정리 66의 주석에서는 자유인과 노예를 언급한다. 스피노자가 자유인과 노예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가’ 아니면 ‘감정이나 의견에 의해서만 인도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은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그런 까닭에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들 만을 행하’는 사람이다. 반면 노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들을’ 행한다. 제3부에 등장하는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인 코나투스(conatus) 개념으로 말하면, 자유인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에 근접한 사람으로 생각해본 인물은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이다. 서머싯 몸은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의 삶을 기반으로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의 스트릭랜드는 앞길이 보장되고 편안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부인과 두 아이들을 떠나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였다.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도덕적인 이유로 비난했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그것도 가차없이 가족의 인연을 끊은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나아가 그림에 탁월한 재능도 없던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는데 모든 것을 버릴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조롱과 비난을 보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스트릭랜드가 《에티카》에 제시된 ‘자유인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스트릭랜드가 냉철한 이성의 지도에 따라 결정했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세인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스트릭랜드의 이기심은 분명히 ‘자기애에 기초한 이기심’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마흔이 될 때까지는 ‘6펜스’의 세계, 곧 세속과 물질의 세계, 관습과 타성적 욕망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기대되어진 ‘역할’을 맡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 대긴 했으나,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스트릭랜드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열망을 억누르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스피노자의 ‘노예’처럼 살아왔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이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라고 말한 맥락과 유사하다.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예속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스트릭랜드는 문명의 관습이 자신에게 부여한 책임을 수행하며 ‘체제 안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천둥 벼락과 같은 계시’를 받았는지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잘 정돈되고 편안한 삶을 모두 벗어던지고 스스로 ‘체제 밖, 달의 세계’로 튕겨져 나간다.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에게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비난하는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스트릭랜드를 인도했던 그 무언가가 ‘이성’(제2종 인식)이 아니었다면, ‘직관의 인식’(제3종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일관되게 감정이 거세되어 보이는 인물, 스트릭랜드가 어떤 감정이나 의견에 인도된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그림 그리기)을, 그러므로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 만을 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자유인의 ‘능동적인 정서’로서 ‘인식(understanding)하는 한에서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활동’인 ‘정신의 힘’을 제시한다. 이 정신의 힘에는 용기(tenacity, 정신의 강인함)와 아량(nobility, 고귀함에서 나오는 친절, 배려)이 있다[제3부 정리 59의 주석 참조]. 스피노자에 따르면, ‘용기’는 이성의 지령에 따라 자신의 존재(being)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아량’은 이성의 지령에 따라 타인을 돕고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정리하고 있다. 스트릭랜드는 분명 스피노자의 용기로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이 유일하게 원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그리기’를 위해 ‘달의 세계’로 자신을 던져넣는다. 다만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의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의 비극성이 위치한다. 그는 인습과 구속의 세계를 벗어나지만 타히티의 완벽한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간다.

정리해보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의 자유인에 불완전하지만 상당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제4부 정리 73에서 언급된 내용("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 보다는 공동의 결정에 따라서 생활하는 국가 내에서 더욱 자유롭다.")에는 정확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이 전하듯 스피노자의 자유인이 되기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에 구현된 찰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코나투스에 따라 살았던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비록 고독과 문둥병 속에서 죽었지만, 고독과 죽음은 자유인인 그에게 무의미했다. 스트릭랜드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고 자신을 구원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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