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 판사들의 판사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거장의 시선 1
제프리 로즌 지음, 용석남 옮김 / 이온서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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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erg, 1933.03.15 - 2020.09.18)





평등의 원칙 아래 세상을 포용하고자 했던 법조인

-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 판사들의 판사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원제: Conversations with RBG)


제프리 로즌(Jeffrey Rosen) 지음 | 용석남 옮김 | [이온서가] | (2023)

 



서로가 잘 모르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공동 관심사로 시작된 인연이 평생 이어진다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많은 이들의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인물이라면?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는 미국의 법조인이자 국립헌법센터의 수장인 제프리 로즌이 20대 청년일 때 우연히 만난 이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과 나눈 대화들을 기록한 책이다. 두 사람은 음악, 특히 오페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라는 공통점으로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친구로서 존중하는 관계를 긴즈버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유지했다. 이 책은 단순히 한 법조인의 업적을 일별하거나 긴즈버그의 일에 대한 철학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성평등,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 음악, 삶과 사랑 등의 주제를 아우른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무엇보다 성평등과 관련하여 헌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킨인물로 꼽힌다. 그가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평등 구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성별에 근거한 법으로 차별당하는 남성과 여성들을 모두를 위해 변호하고자 했다. 억압받거나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여성들을 고려하고자 마련된 사회적 장치가 어떤 경우에는 여성 혹은 남성마저 가두는 기능도 한다는 점을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길은 여성만을 고려하는 것에서 나아가 대등한 존재로서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긴즈버그가 변호사가 되고자 했던 1950년대의 사회는 지금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우선 그녀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음에도 로펌에서 변호사가 되지 못했던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긴즈버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둘째, 여성이었다는 점. 셋째, 결혼한 여성이었다는 점. 특히 그녀가 로스쿨을 졸업했을 때, 자녀까지 있었다는 점 때문에 로펌에 취직하지 못했다고 한다. 긴즈버그는 당시에 자신에게 해당한 이 세 가지 조건을 삼진아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당시에 이런 불리한여건 속에서도 그녀는 변호사가 되고, 럿거스 대학의 법대 교수로 임용되어 당당히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가기 시작했다. 이후의 행보는 부분적이나마 이 책에 담긴 대로다.


 

성평등의 관점에서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했던 긴즈버그는 자신의 삶에서 이 신념을 구현하고 실천해왔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대목은 긴즈버그가 평생의 동반자인 남편 마티와 함께 했던 56년의 결혼생활에 대한 언급이었다. 두 사람은 1950년에 코넬 대학에서 만나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하여 서로의 지성을 존중하며 친해졌다고 한다. 부부가 평생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긴즈버그는 이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가 써둔 결혼식 주례사 초안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서로의 재능과 경험에 진실로 감사합시다. 그 감사함에 뿌리를 두고 서로 헌신하십시오. 인내, 좋은 유머, 상대방에게 주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여지껏 배워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마치 마법과 같이, 혼자일 때보다 두 사람을 더욱 지혜롭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경험으로 영원히 이끌어줄 터입니다.”(48)


 

미국의 전통적인 모토 중에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된 말이 있다고 한다. “에 플루리부스 우눔 E pluribus unum”. 긴즈버그의 말에 따르면, 이 말은 여럿이 모여 하나(one out of many)’란 의미라고 한다. 미국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이룬 한 국가다. 미국이 물질적인 풍요 말고도 정신적인 풍요를 성취한 이유를 꼽으라면, 한 때 이러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지금은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청과 존중이 사라진 것만 같아 안타깝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언젠가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포용에 관한 저자 제프리 로즌과 긴즈버그와의 대화였다.


 

로즌: "포용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긴즈버그: "포용이란 것은, 소외된 사람들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두 팔을 벌려 공공체의 일부로 껴안는 것입니다."(268)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긴즈버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9명으로 이루어진 연방 대법관으로 일할 때, 자신과 자주 의견을 달리하는 스캘리아 대법관과의 오랜 우정과 존중의 관계가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의견이 그렇게 다른 사람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저자가 묻자, 긴즈버그는 스캘리아 대법관의 좋은 점으로 답을 대신했다. 스캘리아는 누구보다 멋진 유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긴즈버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장점을 찾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상대방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경청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실 이건 당사자 혼자만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 역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물이어야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 사례 역시 긴즈버그가 평생 삶 속에서 보여준 포용의 정신을 발 보여준다는 점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연방 대법원에서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법조인에 속했다는 사실도 그녀의 포용 정신을 고려하면 이해가 잘 된다. 그녀는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인 대법원이라도 실수를 할 수 있으며, 나쁜 결정을 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녀가 지지한 소수의견의 핵심 개념은 상식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 긴즈버그는 우리가 끊임없이 비기득권에 속한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살아가는 한, 우리는 한없이 배울 수 있습니다.”(151) 이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는 일에서 출발할 것이다. 특히 법조인은 법의 적용에 있어 누가 더 큰 고통을 받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그의 눈길이 언제나 가난하고 기득권에 속하지 못한 이들, 특히 여성들에 좀 더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긴즈버그가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 마주한 불평등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불평만 하지 않고 직접 변화시켜 가는 일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후손들은 행운아들인지도 모른다. 그가 없었다면 여전히 사회에 불평등의 잔재가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의 정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녀는 2020년에 병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을 지냈다. 책의 저자와 긴즈버그가 나눈 대화를 따라가 보면, 두 사람이 반평생 나눈 우정의 대화가 얼마나 풍요로운 시간이었을지 상상해본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두 사람만의 사적인 대화를 넘어 한 시대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혹은 한 사회에 커다란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그의 존재가 사회를 조금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이 자신의 꿈을 말한 대목이 인상적이어서 인용해본다. 상식적인 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한 꿈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부모 역할과 직장 생활을 꾸려가는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 그 방식으로 사회가 굴러가도록 남녀가 같이 노력하는 것입니다.”(1984년에 언급






[참고 - 오탈자]

[1] 34면, '우리임을 것을 밝히는'  ==>> '우리임을 밝히는'


[2] 87면, '1984년, 페미티스트'  ==>> '페미니스트'





 


[1] "긴즈버그는 추상적인 원칙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들, 성별에 근거한 법으로 차별당하는 남성과 여성 개인들을 위해 변호하며 정의를 구현해나갔다."(33)

[2] "제 목표는 여성들을 떠받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받침대가 실은, 모두를 가두는 우리임을 밝히는 것이었죠. 한 번에 한 걸음씩 법원이 깨닫게끔 하고 전진시키는 일이 그 당시 제 목표였습니다."(34)

[3] "궁극적으로는, 시민들 스스로가 조직해야 합니다. (...) 사람들에서부타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종류의 추진 없이, 입법부는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74)

[4] "여성과 남성이 존재하는 방식을 일반화시키면, 고유한 각 개인에 대한 결정을 바르게 내릴 수 없다."(106)

[5] "그게 바로 릴리가 한 행동이죠. 소수의견의 핵심 개념은 상식의 정신입니다."(177)

"전통적으로 소수의견이 장차 이 나라의 법이 되어왔습니다. (...) 법원이 잘못했다는 걸 인식한 소수의견이 있었습니다. (...) 법원이 틀린 판단을 내렸음을 인식하고 옳은 판결을 써내려간 사람들을 한번 돌아보세요. 처음에는 소수의견으로 출발하지만, 그 다음 세대에서는, 법원을 대표하는 의견이 되었다는 것을."(178)

[6] "의료보험 또한 사회안전망의 결함을 보완한다고 봅니다. 사람은 늙거나 파트너가 사망했을 때 사회보장 혜택을 받습니다. 의료보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기본적인 필요 사항이 채워지고 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187)

[7] "법원은 일이 일어난 뒤에, 사후에 대응하는 기관입니다."(195)

"법원이 사회적 변화를 선두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방향으로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했다."(198)
: 법원의 역할에 대해

[8] "평등이란 개념은 처음부터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회에서 실현되어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투표권을 가지기까지, 우리 여성은 1868년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긴 시간을 걸어왔습니다."(206)

[9] "‘넌 안돼’라는 대답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꿈이 있고, 추구하고 싶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을 기꺼이 할 의지가 있으면, 누군가 ‘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마세요."(235)

"진짜로 실현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기꺼이 그걸 이루는 데 필요한 노력을 하세요."(272)


[10] "좋은 시민이라면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가 있다는 조언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의무란, 우리 민주주의가 적절히 작동하도록 돕는 것이겠지요."(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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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2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3-03-22 11:24   좋아요 1 | URL
앗~!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긴즈버그와 저자가 든 판례 관련 배경을 잘 몰라서 헌법에 대한 긴즈버그 대법관의 존중과 여기에 담긴 깊은 의미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대화 속에 저도 함께한 것처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기득권에 속하여 안락한 삶을 누릴수도 있는 위치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이들을 진심으로 ‘포용’하는 일이 사회를 얼마나 더 좋게 바꿀 수 있는지....대화 속에서 작은 희망도 보았습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 자유로움에 대하여

:파인먼 평전중에서





 

 


















올해 제임스 글릭의 작품들을 역주행해보기로 했는데, 

아직 <파인먼 평전>에서 머물러 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문장들. 파인먼이 예술과 다르게 과학에서 과학자들의 창조성과 상상력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파인먼은 과학적인 창조성이라는 것은 구속복 속의 상상력이라고 말했다.”(533)


 

혁신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떠올린 만족스러운 생각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물리학 법칙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발상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알려진 자연의 법칙과 명백히 모순되는 대상을 우리가 진지하게 상상하도록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리학자가 떠올리는 상상력이란 꽤나 어려운 게임입니다.”(533)


 

파인먼이 말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은 소설에서처럼 거기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단지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가능한 한 최대로 펼치는 것입니다.’”(534)

 



현대 예술가들에게 참신함, 자유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 비예술가의 입장에서 예술가들에게 요구 혹은 기대되는 자유로움, 참신함은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자유로움보다 훨씬 모호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자유로움과 참신함에는 파인먼이 구속복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보다 분명한 제약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학자는 자연을 관찰하고 설명해내기 위해 자연에서 보다 보편적인 어떤 원리를 찾아낸다. 바로 여기에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요구된다. 다만 상상된 결과는 과학자들의 지식과 이해의 범주에 적합해야 한다. 곧 자연 현상과 일치하고 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구속복처럼 과학자의 상상력 주위로 상당한 제약이 가해지게 되는 셈이다.  



 

"파인먼은 과학적인 창조성이라는 것은 구속복 속의 상상력이라고 말했다."(533)

"혁신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떠올린 만족스러운 생각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물리학 법칙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발상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알려진 자연의 법칙과 명백히 모순되는 대상을 우리가 진지하게 상상하도록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리학자가 떠올리는 상상력이란 꽤나 어려운 게임입니다."(533)

"파인먼이 말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은 소설에서처럼 거기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단지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가능한 한 최대로 펼치는 것입니다.’"(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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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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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그려준 파인먼 초상




천재 물리학자 파인먼의 35주기,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시 만나다

- 파인먼 평전을 읽으며

 

제임스 글릭(James Gleick) 지음 

양병찬·김민수 옮김 | [동아시아] | (2023)

 



 

Of all its many values, the greatest must be the freedom to doubt.

Richard Phillips Feynman(1918.05.11-1988.02.15)

 


이 문장은 고등학교 때 동네 서점에서 파인먼을 발견한 이후, 대학 시절 내 책상 앞에 줄곧 붙여두었던 문구다. 처음에는 알 듯 모를 듯 했던 표현이었으나, 삶의 경험치가 쌓이고 여러 상황에서 이 문구를 떠올리곤 했다. 내겐 괴짜 과학자 같았던 그의 이미지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혹을 제기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나의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셈이다. 최근 파인먼 평전을 읽고 있는데, 마침 오늘(215)이 파인먼의 35주기이기에 간단한 독서 기록을 남겨본다.


 

우선 파인먼은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이다. 따라서 위에 인용한 문구는 유대인의 후츠파(chutzpah)’ 정신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후츠파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로, 문자 그대로는 무례함, 뻔뻔함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도전하는 정신, 용기, 배포 등의 맥락을 포함한다. 정통 유대교를 신봉하지 않았던 파인먼의 집안 분위기에서 그가 평생 가식과 권위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이에 도전했던 모습과 연결 지을 수 있겠다. 이 평전에 언급된 것처럼 그는 세상 사람들의 가식과 권위를 그토록 경멸하던 홀든 콜필드’(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였던 셈이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두고 우리는 어떤 표현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까. 우선 파인만은 많은 이들에게 괴짜이자 천재 과학자로서 알려져 있을 테다. 이미 20대일 때 핵폭탄 개발 연구 작업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촉망받는 과학자로 참여한 인물, 국가 기밀문서를 보관한 금고를 모두 열어버린 인물, 양자전기역학을 포함한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노벨상 수상자 등의 사례에서 파인먼이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주는 수많은 지표를 보여준다. 또 다른 한 면으로는 사랑하는 첫 부인과의 사별 후 보인 여성편력과 세 번째 부인을 만난 이후 가정적인 삶으로 돌아간 이후의 모습들, 봉고 드럼과 같은 리듬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등 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지니고 삶을 누리는 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다.


 

파인먼의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내게는 그가 가식을 싫어하고 권위에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보였던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학창시절에 처음 알게 된 파인먼을 이제는 제임스 글릭의 파인먼 평전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미국이 세계초강대국이 되어가던 시기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던 시대를 가로질러 살았던 한 미국인 과학자의 삶을 재구성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미국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상징적인 사건가운데 하나가 바로 챌린저호 폭발사건이라고 본다. 거대한 관료집단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비효율적인 상태가 되어버린 상황,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의 대결 구도 속에서 성공에 대한 압박으로 과정 그 자체는 뒷전으로 밀리게 되면서 재난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된 것. 나는 이 증상이 바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파인만은 이러한 삶의 한가운데에 서서 역사의 현장들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었다.


 

이 책을 읽기가 만만치 않지만, 책을 읽을 때 몇 가지 방식을 염두에 두면서 시도해볼만 하다. 우선 파인먼을 둘러싼 인물들에 주목해보는 것이다. 파인먼과 다른 인물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주목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면, 파인먼과 줄리언 슈윙어를 견주어보는 것. 두 인물을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1918년 생으로 동갑인 물리학자들이었다. 다만 각자의 캐릭터는 너무나 뚜렷하면서 스타일도 확연히 달랐다. 두 사람은 모두 유대인이었고, 196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함께 받았지만, 강의 스타일이나 말투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슈윙어가 좀 더 화려하고 격식을 갖춘 완벽함을 지향했다면, 파인먼은 우아함보다는 솔직하고 격의 없으며 빠른 말투로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두 사람의 오랜 라이벌 구도를 통해 두 동갑내기 물리학자가 어떻게 서로 경쟁하고 발전해나가는지 따라가 보는 일은 흥미롭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파인먼과 같은 직장의 동료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의 관계, 파인먼과 프리먼 다이슨 사이의 일화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제임스 글릭은 파인먼과 겔만을 유명한 미국 배우들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옷을 잘 차려 입는 신사 같은 이미지로 영화에 등장하곤 했던 아돌프 멘주는 겔만에, 그리고 코미디언으로 희극적인 배역을 많이 맡아 등장했던 미국의 배우 월터 매사우는 파인먼에 비유하는 식이다(635). 겔만도 파인먼처럼 유대인이었으며, 과학뿐만 아니라 폭넓은 교양을 갖춘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이와 달리 파인먼은 문학, 특히 시 같은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연과학에 관해 외곬수적인 관심사를 보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미국은 여전히 귀족이 사회의 지도층을 점유하고 있는 영국처럼 정도가 심하지는 않으나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말투는 그 사람의 배경을 규정지어주는 인덱스로서 기능하는 것 같다. 파인먼의 경우, 그가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빠르게 말하는 방식이 노동계급의 특징으로 먼저 인식되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파인먼은 노대가 닐스 보어와의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는데, 귀족 가문인 보어는 파인먼의 노동자 계급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와 말하는 방식에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파인먼을 둘러싼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평전이 두껍긴 해도 보다 더 입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파인먼 평전의 원제는 Genius. 이 제목을 염두에 두면, 천재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에 저자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저자가 천재()란 과연 무언인가?’하는 물음을 쫓아 과거 여러 지식인들이 고민했던 행적을 따라가며 천재의 정체성을 탐구해나간다. 인류 역사상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지만, 천재란 어떤 면모를 지닌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저자는 궁금해 했을 법하다. 참고로 파인먼의 아이큐는 125였다. 낮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마술사 천재라고 불린 파인먼에게 기대된 아이큐에는 훨씬 못 미치는 값이다. 이걸 보면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천재라고 불릴 수 있는 보편타당한 특질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과연 그런 특질이 존재하는 것일까? 저자는 결국 과학적 업적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말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파인먼의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결국 우린 모두 고만고만한 존재라고 말이다.

 


사람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올랐던 높이만 보고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진 않는다. 사람은 무엇보다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을 가는 가운데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고서야 그의 삶이 어떠했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파인먼도 두 번째 암이 재발하여 몸 속에 큰 혹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챌린저호 폭발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작업에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참여했다.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파인먼의 모습은 다른 이들의 판단을 스스로 검토하지 않고 조금의 의혹도 지나치지 않았던 지적 성실함이었다. 여기엔 어떤 형태의 권위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후츠파정신이 엿보인다. 파인먼 평전을 읽으며 느끼는 점은 파인먼의 구체적인 업적 이전에, 기존의 것에 스스로 합리적인 의문을 제시하고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끊임없이 호기심을 지녔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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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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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새로운 표지, 양장본으로 나온 기념으로

예전에 써두었던 독후 기록을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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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따금 자신과 작별하는 여행이 필요하다

-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 지음 |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의 철학자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이름으로 소설가가 되었다인간의 삶과 죽음존엄성자유와 예속 등의 문제를 다룬 철학교양서로 국내에도  알려진 그는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자기 존중의 문제를 다루었다소설은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생각과 동선을 따라간다. 57세인 그는 교사이자 고전문헌학자다제자였던 부인과 5 만에 이혼한 , 17년간 과거의 침묵 속에 은둔하며 살았던 남자다또 심한 근시인데다 늘 불면증에 시달린다머리카락이  가닥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언제나 낡은 재킷과 자라목 스웨터를 걸치고무릎이 튀어나온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다니는 남자하지만 그는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확고부동한 그의 일상을 뒤흔든 것은 한 여자의 자살기도 사건이었다비 오는 날 출근하던 길에 다리 위에서 마주한 우연한 사건으로 그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겨났다좀처럼 실수하지 않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실수를 하기도 했다그는 붉은 가죽 외투를 입은 여자가 남긴 포르투게스라는 발음의 여운을 기억하며 헌책방에서  한권을 집어 들었다아마데우 이나시오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의사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이었다그레고리우스는 책방 주인이 읽어주는 문장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있다면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28)

 


이 문장을 시작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포르투갈어를 독학하기 시작했고포르투갈어 CD 들으며 고전어에서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 느꼈다그는  작은 일탈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했다유럽 지도를 꺼내 리스본으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망설임 없이 직장을 떠나면서 사직서를 겸한 편지를 교장에게 보냈다편지에는 자신이 떠나는 구체적인 이유를 대신하여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대목을 인용했다.


 

 영혼아죄를 범하라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44)


 

여기에 인용한 문장은 소설 전반의 주제와 비교할 때 모호하게 다가온다.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면서 동시에  건너 불구경하듯 거리를 두고 이들을 비난하는 모양새다 표현에 주목한 이유는 그레고리우스가 감행한 일탈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동일한 대목 천병희 교수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보다 드러난다.


 

영혼이여너는 학대하고 있구나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우리 인생은 짧고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하거늘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들의 영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명상록 천병희 옮김, 2005, 34p)


 

 문장은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감과 사회적 역할에 매몰되어 짧은 인생동안 끌려 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따라서 소설에 제시된 역자의 번역보다는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 소설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아우렐리우스의 인용문은 타인과 사회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실마리를그리고 예속 상태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의 미망을 깨달으라는 외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그레고리우스가 불시의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불가피하고 절박한 이유일  있다.



 


삶의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는  도시 이야기



이제 소설의 장면은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리스본과 베른을 오간다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만 해도 기차로 2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 의사가 남긴 책을 지치지 않고 번역하며 저자의 생각을 탐험했다동시에 의사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남자의  속으로 파고들었다따라서  소설은 리스본과 베른이라는  도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레고리우스의 집과 직장이 있는 베른은 알프스 산맥에 인접한 스위스 내륙의 도시다그에게 익숙함과 확실성안정감을 주는 도시다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느리고 완만하며확고한 이성의 통제를 받는 세계이기도 하다따라서 그레고리우스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조망되던 (127) 누리던 도시였다언제든 고전어 및 고전문학에서 학생들의 인정을 받으며 만족스러운 삶을   있었던 장소였다.

 


반면 리스본은 그레고리우스가 익숙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도달한 도시다그에겐 삶에서 예기치 않게 마주하는 낯설음과 불확실성불안감이 느껴지는 미지의 세계다과거에 도시를 강타했던 대지진과 흑사병처럼 말이다중세 시대까지 이 도시는 광대한 대서양을 마주한 세상의 인식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곳이기도 했한편 다리에서 만난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처럼 빠르고 경쾌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감정과 호기심에 이끌리는 삶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응한다.


 

여행이란 불확실성으로 떠나는 모험이다그레고리우스처럼  마디의 단어에 이끌리거나리스본의 의사가 남긴 글에 매혹되어 감행하는 한순간의 일탈이기도 하다. 2000 전의 아우렐리우스가 보았던 것처럼소설은 현실의 질곡에 매여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춘다프라두의 부모가 그랬고그 역시 이런 환경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그는 기차여행에 대한 열망을 지녔지만출발지에서 멀어질수록 강한 향수병을 느꼈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확고하고 익숙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나 두려움으로 길을 잃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다하지만 이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독자는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험해보지 못한 채 익숙함과 관성에 머물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있다사람들은 도덕과 의무감에 매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삶을 살아가곤 한다.




죽음이 잉태한 판타지상상력의 



그렇다면 우리가 예속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면 무엇을어떻게 해야 할까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염두에 두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문제로도 읽힌다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부유하지 않는 일이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이는 자신의 생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단단히 발을 내딛는 이기도 하다때론 현실의 벽이 두껍고 높기만 하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떠나고자 하는 열망과 향수병 사이의 어딘가에 머무는 것이다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던 갈망을 평생 품고 살았지만, 제대로 시도해보지 않았던 약사 조르지 오켈리처럼 말이다삶에서 자유를 찾은 이들은 일탈을 꾀하여 소외되고 부유하는 자신의 상황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불가피한 일탈을 감행했다.  책방에서 구한 책의 저자가 살았던 도시로 떠났던 것이다그가 리스본과 여러 도시에서 프라두의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 찾기였다폐교가 된 프라두의 학교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오래 전에 꿈꾸었 도시 이스파한 기억해냈다. 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무수한 가능성이 놓여 있었음을 깨달았다현재의 모습은 과거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모여 도달한 결과였다프라두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과감한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상상력임을 깨달았고 상상력이 발휘할  있게 해주는 힘을 ()에서 찾았다.

 


삶의 관성을 뒤흔드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판타지의 세계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할  있게 한다인생은  번뿐이고 모든 가능성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실패했을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있는 힘도 키워준다시적 상상력은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모두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과 함께두 사람 긴밀히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프라두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267)라고 썼다인간이 평생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실체란 살아 있을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공포가 아닐까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패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실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시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말한다.

 


여행 중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주 현기증을 느꼈다프라두는 자신의 글에서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현기증은 그레고리우스를 찾아온 경고였다그에게 현재를 일깨우고시적 상상력이 필요할 때임을 알려주는 장치로서 말이다베른으로 돌아와 검진을 한 그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자친구 독시아데스는 나에게 처방전이 있다고 답했다이는 두려움을 느낀 친구를 존엄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 답변이었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레고리우스는 인생은 우리가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던 프라두의 말도 떠올렸다확고하다고 믿었던 삶에는 언제든 불확실한 삶이 찾아올 수 있다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불확실성에 머물 수 있는 여지와 힘을 마련해주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이제 소설은 당신이 자신의 이스파한을 간직하고 있는지 묻는다때론 스스로와 작별하여 일탈을 감행해도 좋다는 메시지와 함께.






[1]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시작됐다." (10)
- 소설의 첫 문장

[2]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 프라두의 글

[3]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리두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6)

[4]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93)
- 프라두의 묘비명

[5] "내 마음의 강물이 방향을 바꿀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177)

[6]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220)

[7]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67)

[8]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292)

[9]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357)
- 프라두의 편지글

[10]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 (448)

[11]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462)
- 프라두가 늘 했다는 말

[12] "존엄하게 죽는 것이란 그게 종말임을 인정하는 거야. 불멸에 관한 온갖 유치함을 극복하는 것이지." (481)
- 주앙 에사가 전하는 프라두의 말

[13] "말은 시(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529)
- 실업가 실우베이라에게 그레고리우스가 하는 말

[14] "그때 읽은 신문에서 유일하게 아직 기억하는 단어. 신기루, 환영,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 (537)

[15] "시적 진지함보다 더 진지한 진지함도 있을까? (...) 이것이 프라두와 그를 묶어주는 고리, 아마 가장 강한 연결 고리였다." (544)

[16]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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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바꾼 공학, 공학을 바꾼 뇌 - 뇌공학의 현재와 미래, 개정판
임창환 지음 / Mid(엠아이디)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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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기술인가를 묻는 뇌공학자의 공학이야기


- 뇌를 바꾼 공학 공학을 바꾼 뇌

: 뇌공학의 현재와 미래


임창환 지음 | [MID] | (2023, 개정판)



 

최근 뇌과학, 인공지능, GPT 등에 관한 소식이 큰 화두다.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가 스스로 살아가는 데에는 다양한 수준의 지능이 관여한다. 우리가 의식이라는 명칭을 붙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특히 인간의 뇌는 체내의 신체적·정신적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의 20%가량을 소모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단 몇 분이라도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 곧바로 뇌사에 이르기도 한다. 보다 복잡하게 발달한 생명체들에게는 뇌가 있음으로 해서 움직임을 조절하고 존재가 관여한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뇌는 생명체에 필수불가결한 기관인 것이다. 이제 연구자들이 뇌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이를 이용하고 있는 시대다. 여기에 뇌공학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마비를 겪는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상상만 해도 숨이 차고 갑갑한 기분이 든다. 잠수종과 나비의 저자 장 도미니크 보비가 겪은 일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바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힘겹게 써낸 글이기에 전 세계의 많은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보비는 세계적인 패션잡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다. 멋지게 옷을 차려 입을 줄 알고, 문학과 스포츠카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닥친 불운은 그가 뇌일혈로 쓰러진 후 3주가 지나 의식을 회복했을 때, 전신이 마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몸은 예기치 않게 감옥이 되었다. 그의 정신은 말을 듣지 않는 육체 속에 영원히 유폐되어 버렸다. 그가 자신의 투병 기간인 15개월 동안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책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쪽 눈을 깜빡거려 문자를 하나하나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비의 입장을 상상만 해도 아득하고 절망스러운 느낌이 밀려온다. 내가 뇌를 바꾼 공학 공학을 바꾼 뇌를 읽으면서 뇌공학이라는 분야를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은, 보비와 같은 입장에서 환자가 가족 혹은 다른 사람들과 보다 자유롭게 의사소통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뇌의 활동 혹은 뇌파를 이용하여 뇌와 기계, 혹은 뇌와 컴퓨터 사이의 접속 시스템을 개발하면,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의도를 지닌 생각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상대방과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뇌가 활동할 때 발생하는 미세한 뇌파를 감지하여 활용하여 정신적 타자기와 같은 접속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현실적인 제약은 아직 너무나 많다. 여기서 제약이라 하면 인간을 대상으로 검증을 해야 하는 상황과 이에 따른 윤리적 문제들, 접속 시스템을 거치면서 의사 전달의 속도와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 나아가 실수요를 고려한 경제적 타당성의 문제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아보고자 시도하는 생생한 연구현장의 이야기들을 이야기해준다.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장애는 불시에 찾아오기도 한다. 저자가 직접 만나본 루게릭 환자들의 꿈이 환자 스스로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에 글을 남겨보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공감하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저자의 연구실에서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주고자 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다만 모든 과학기술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런 특수한 지식체계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대해서이다. 예컨대 뇌파를 이용한 뇌 접속 인터페이스는 점차 발달하면서 점점 더 많은 개인의 내밀한 생각들과 상호작용을 매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보는 개개인의 고유한 상황을 담은, 혹은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정보일 것이다. 이때 한 개인을 규정할 수 있는 이런 개인정보의 유출 가능성 같은 문제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지 싶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사례는 저자가 소개하는 거짓말탐지 기술이다. 저자는 책에서 거짓말탐기기가 개인의 사생활 침해 도구로 쓰일 가능성’(153)도 지적하고 있다. 나의 가족이나 애인이 매번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진실이 언제나 좋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경우에 따라 장점과 단점이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언제나 진실을 모두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해질까? 이런 상상을 해보면 나는 아직 이런 기술에 대해 저항감을 먼저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또 만약 거짓말탐지 기술이 99%의 정확도를 가지고 개개인의 거짓말을 정확히 탐지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이 기술이 하나의 권위로 작용할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 범죄에 연루된 누군가의 운명이 이 거짓말탐기기의 판독 결과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면 어떨까? 99%의 진실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해도, 그 또한 1%의 오류로 인해 무고한 누군가의 삶이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이 아닌 인간이 주목하고 고민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안심인 것은 연구 현장에서 저자와 같은 뇌공학자들은 기술과 더불어 윤리적인 검토와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철학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인식하며 이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저자의 연구 사례를 보면, 저자가 이끄는 연구팀은 뇌-컴퓨터 접속 시스템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그룹임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특히 기억나는 점은 저자가 고민하는 기술이 경제성이 적어보이는 기술임에도 이 기술이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뇌공학자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을 다루는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우선 필요한 요건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소개하는 신기하고 놀라운 첨단 기술과 더불어 그가 고민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 애정이 함께 갖추어진 연구자들이 이 분야에도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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