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들)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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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의 시작

김계원 지음 | [현실문화A] | (2023)




이 책의 의의를 간단히 표현해보자면, 일본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진의 쓸모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 탐구한 작업이라 하겠다. 사진이 기록과 보존의 역할을 담당하며 계급의 위계를 구분하고, 타민족을 타자화하는 과정에 활용된 역사가 담겨있다. 아울러 우리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에, 책에서 주목한 문제의식에 흥미를 가질 독자들이 많을 .


 

또 하나 주목해보는 부분은, 일본의 근대화 초기에 이루어진 홋카이도 개척 사업 미연방 농업국의 위원을 지낸 미국인 기술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사진가 도로시아 랭이 농업안정국(FSA) 의뢰를 받아 미국 시골지역의 농부와 광부들과 이들의 삶에 대해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사진을 이용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사진 및 사진술의 역사를 하나의 축으로 미국의 식민-제국주의의 물결이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와 닿은 과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런 맥락에서 과거를 다루는 역사는 여전한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사진사(박주석 지음, 문학동네, 2021) 역시 사진 국가에서 탐구한 일본 사진술의 전개과정과 연관지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진사의 선구자들은 상당수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사진술은 서양문물에 대한 접근성이 좋았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빛에 대한 물리적 이해, 카메라 구조와 작동에 대한 기계적 이해, 현상과 인화의 화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 및 사진의 역사, 식민주의, 이미지 매체의 역할 등에 대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겐 흥미로울 책이다.



1857년에 제직된 이 목판화에는 일본 사진의 선구자들이 대형카메라를 설치하고 인물 사진을 찍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1857년 촬영) 다게레오타입의 사진





1878년 일본 육군성이 올린 경기구 사진(시아노타입)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1]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처럼 홋카이도 개척은 미 서부 정착 사업을 모델로 삼았다. (...)

역사학자 데이비드 하월(David L. Howell)은 홋카이도의 공격적인 이주 정책이 아이누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주권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깨끗이 삭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한다."(277)

[2] "근대화의 이상과 낭만적 미래가 홋카이도에 투사되면서 ‘북방’은 곧 기회의 땅을 의미했다."(278)

[3]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은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구미-일본-아이누의 ‘발전’ 단계를 시각화하는 프로그램에 복무했다. (...)

카메라는 일부러 수유하는 장면을 찍어 아이누 여성을 자연이나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반면, 두 명의 ‘문명인’ 남성에게 아이누 여성을 보호, 통제할 주체의 위치를 부여한다."(279)

[4]
"요컨대 홋카이도 기록 사진은 20세기 전후까지 엽서, 교과서, 신문, 자료집, 국내외 전시, 잡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복제, 유포되었고, 식민지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기능했다."(289)

[5]
"사진은 사실적 재현과 정확한 정보, 신속한 소통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 즉 근대화의 수사로 ‘미래의 땅’과 결합했다. 새로운 행정체(개척사)와 새로운 매체(사진술)의 결속이야말로 변방의 식민지를 ‘미래의 땅’으로 전시, 홍보, 소비하는 추동력이었다."(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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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FIKA(피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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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해브 선장을 위한 변론

- 모든 삶은 흐른다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 이주영 옮김 | [FIKA] | (2023)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다보니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비 딕을 언급한 글 한 편을 만났다. 바로 이전 글(‘깃발’)에서 저자는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했다. 돈키호테가 결투하려던 풍차를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214)한다고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풍차에 맞서는 돈키호테를 단순히 무모한 이상주의자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러면 모비 딕을 이야기하는 글(‘모비 딕’)에서도 에이해브 선장을 19세기 버전의 돈키호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9세기의 돈키호테,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서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어 뜯어간 모비 딕에 대한 편집광적인 복수심에 불타 파멸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증오의 감정은 불길하면서도 거대한 흰 고래를 지구 끝까지 추적하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도식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고래에 대한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을 단지 광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비 딕은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버려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사회의 부조리나 악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흰 색으로 상징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거대한 서구 백인 중심의 공고한 세계 질서와 병들어버린 관습으로 볼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지를 뻗으며 여러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속 배경을 우리 사회와 병치시켜 보면,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는 부패한 기득권이 구축해놓은 질서에 표출해내는 정당한 분노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비록 에이해브 개인으로서는 실패하지만 말이다.


 

인류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순수성에 대한 욕망이 집착이 될 때 파멸에 이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허구적 개념인 인종순수성을 잣대로 내세워 이를 지키고자 했을 때, 인류가 겪어야 했던 비극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장애인 및 성소수자 학살, 백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우생학의 유행과 그 결과 파괴된 개개인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 이념적인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대량학살을 불러온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에이해브 선장을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를 자신의 생각만을 따르고 복종하는 작은 집단을 유지(‘member Yuji’)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지도자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상황은 모비 딕을 추적하여 복수하겠다는 그의 일관된 행동과 복수심이 초래한 결과에서 확인가능하다. 물론 모비 딕을 어떻게 보느냐는 독자에 달려 있다. 모비 딕을 인간 사회/시스템의 거대한 부조리라고 해보자. 고착된 부조리함 속에서 개인이 희생되었다면, 홀로 이 모순에 맞서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바위에 날달걀 던지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이해브가 표출하는 복수심이 분노에서 온다고 보았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라고 말이다. 저자는 에이해브 선장이 바로 이 분노를 상징한다고 본 듯하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저자는 이제 모비 딕에 눈길을 준다. 그는 모비 딕을 에이해브 선장이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220)이라고 해석했다. 에이해브는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비 딕에 부정적, 혹은 불길한 상징성을 부여했던 나의 해석과 다르지만, ‘가혹한 현실과 운명을 상징한다고 본 저자의 해석도 천천히 음미해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더 나아가자면, 모비 딕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모순, 혹은 악이라 여겨지는 부조리함과 맞서 싸울 때, 나 역시 일종의 괴물이 되어갈 수 있는 위험성도 생각해봄직하다. 어느 쪽이든 두 존재가 격렬히 대립하고 충돌할 때, 서로가 파멸적인 결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에이해브의 분노는 인간적인 한계라는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할 테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볼 때, 우리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자문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쫓는 대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흥미롭다.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에이해브 선장은 분명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 그만큼 그에게는 커다란 결핍이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선장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은 거대한 제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225)


 

에이해브 선장은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모비딕을 파괴하고자 했다. 지구 위의 바다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던 것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은 그 자체로 에이해브에게 살아가는 의미였던 셈이다. 다만 저자는 우리의 눈으로 에이해브가 품은 삶의 의미를 섣불리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주는 듯하다. 선장의 가슴 깊은 곳에 이 욕망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와 증오를 정당한 열정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분노라는, 이 수수께끼의 정체를 밝히려는 열망으로 터질듯 한 감정의 원인을 쫓아 에이해브는 자신을 던져 넣었다. 광기어린 추적이 무모해보이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운명에 정면으로 맞섰다고 볼 수 있다.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쫓아 이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결국 에이해브 자신의 몫이었다. 물론 한 배에 탄 선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무모한 행위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긴 하지만. 어쩌면 모비 딕을 떠받치는 이런 비극적인 구도는 허먼 멜빌이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부분이 아닌가 싶다. 비극은 문명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떠나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세련된 장치로 볼 수도 있겠다. 많은 비극 작품에서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곤 한다.


 

결국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광막하고 망망한 인생의 바다에서 각자 자신의 성배를 추구해보라고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뒤쫓는 흰 고래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모비 딕은 성배와 같다. 어마어마하고 귀한 성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붙이기 힘들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욕망하는 것이다.”(225)


 

처음 모비 딕을 읽었을 때를 기억해본다. 내게 모비 딕은 불길함, 사악함의 총체였다. 그리고 흰 고래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은 이기적이고 편집광적인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애초에 사악함이라는 특성 혹은 지위를 타고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 역시 처음부터 미치광이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본 이유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되어가는존재인 까닭이다. 모비 딕 역시 인간적 기준에 불과한 을 초월한 그 무엇인지 모른다. 물론 저자는 모비 딕을 우리 안의 욕망으로 읽었다. 내가 처음에 에이해브 선장을 의심과 비난의 눈으로 보았다면, 이제 다시 그와 만나 들여다보니 또 다른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으며 망망대해 같은 감상의 바다를 잠시 표류하다 돌아온 느낌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점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내 안의 결핍을 확인하고, 나의 욕망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하거나 이 욕망이 불러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보편적인 인간의 관심사가 아닌가. 이렇게 보면 에이해브 선장은 우리 안의 길들여진 선함을 표상하는 항해사 스타벅과 대척점에 있다. 그러니 에이해브 선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닌 한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저자의 생각을 읽고 나니,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혹은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책 속으로]



[1] "바다는 자유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는 어디에 갇히거나 무엇에 방해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에게 삶에서 억지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다. 늘 준비해서 대답을 할 필요가 없고, 아무 계산 없이 도와야 할 의무도 없고, 남의 말을 조용히 경청할 의무도 없다. 바다와 선원들은 따뜻하고 건강한 ‘이기주의’가 있어야 독립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200)

[2] "그리스어에서 ‘자유’는 ‘개성’을 뜻한다. 개성은 분류되는 것에 저항한다. (...)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남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니 남들의 기대에 맞춰 살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택 연금에 묶여 있는 삶은 거부하자."(201)

[3] "영불해협 출신의 스페인 귀족 돈키호테는 풍차들과 결투하려고 한다. (...)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는 언제나 타협과 인정을 거부하고 비장할 정도의 고집을 보여준다. 결국 풍차들과의 결투에서 진만 빼다가 패한다. 여기에서 풍차는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풍차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은 혼자서 정의롭고 순수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수 없다."(214)

[4] "복수심은 어디에서 올까? 분노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

[5] "분노하는 사람들은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질서다. 원래의 질서로 되돌려놓겠다는 마음에서 분노는 시작된다. 에이해브 선장은 이 같은 분노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비 딕은 그가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이다. 선장은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한다."(220)

[6] "분노에 휘감겼을 때는 결정을 하지 말고 분노부터 어떻게 든 달래는 것이 좋다. (...)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하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7]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8] "잘못된 것을 알아도 그대로 두고 진실보다 거짓을 선택하면 악순환만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여기에서 두려움, 대화 단절, 공격성, 원한이 자란다. 유혹하는 사람, 거짓 슬로건을 내세우는 사람, 거짓말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의존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혼란 속에서 살게 된다."(231)

[9] "거짓은 전염성이 강하다. 진실보다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거짓은 반복적으로 퍼져가며 의식과 말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고, 시류에 맞는 것을 쉽게 믿는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의지는 오염되고 썩는다.
그렇다면 거짓은 어떻게 알아볼까? 확신할수록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고 완고하며, 의문을 품지 않고 다 아는 체하고, 언제나 이해하는 척한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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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5층 책탑, 그리고 새로 도착한 책




 

지난 달 말에 홍범도 장군 3층 책탑으로 홍범도 장군의 업적 제대로 알기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한길사의 민족의 장군 홍범도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방현석 작가의 범도 1·2 두 권도 도착했고, 추가로 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도 새로 도착했습니다. 한 일주일간 감기 몸살로 뭔가 끄적거리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게을러진 마음을 심기일전하여 홍범도장군 5층책탑으로 읽기를 이어갑니다.


 

아직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했지만, 민족의 장군 홍범도는 구한말 백성들의 엄혹한 삶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는 없지만, 기술되어 있는 내용만으로도 일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생각해봅니다. 숨이라도 편하게 쉬며 살아보려, 압록강·두만강을 건너다 관군에 붙들려 참수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충격을 줍니다. 부정한 권력과 관리의 폭정과 학대, 과도한 세금 징수 등으로 개개인의 삶이 무너진 이들은 목숨을 걸고 탈주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겠죠.


 

책에는 연해주 방면 남북 만주로 떠나는 동포가 1800년대 말에 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36)고 알려줍니다. 이 현상은 전쟁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나라의 무능하고 무도한 지도자들 때문에 집을 버리고 스스로 유랑민이 되어 나라 밖으로 떠돌게 된 것이었네요. 이들이 황폐한 연해주 일대를 개척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청나라 땅으로 건너간 유랑민들은 동포의 사기와 배신뿐만 아니라 숱한 마적들의 희생양이 되었구요. 불과 100여 년 전에 이렇게 엄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지고 희생당해 사라져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인간의 조건에서 녹두 전봉준이 나타나고 여천 홍범도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1868년 무진년 8월 27한가위가 갓 지난 들판에 오곡백과는 잘 여물어가는데 평양 외성리 서문 안 문렬사 부근 가난한 오두막에서 한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아버지 홍윤식(洪允植)은 금방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감격에 젖은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민족의 장군 홍범도, 46)



그러니까 155년 전 가을, 바로 이맘때네요. 평양에서 태어난 범도의 출생 배경에 또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범도의 증조부가 농민혁명을 일으켰던 평서대원수 홍경래와 함께 싸웠던 장수로 홍이팔(洪二八)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고 맞설 줄 아는 마음도 유전이 되는가 싶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외로워하시지 않도록, 계속 조금씩 꾸준히 읽어가겠습니다.

 


순이삼촌 으로 잘 알려진 현기영 작가의 장편소설 제주도우다(3)는 해방 후 제주도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발생한, 4·3사건이라는 엄연한 국가 폭력의 역사를 풀어낸 역작입니다. 특히 대량 학살이 국가의 최고 지도자와 미군정의 묵인 하에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된 역사이기에 더욱 충격을 줍니다. 정치인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바로 개개 국민의 지지와 열망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바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념을 절대 기준으로 내세워 분열을 조장하고 억압하는 권력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섬뜩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의 행보가 과거의 독재적인 지도자들과 견주어 낯설지만은 안다는 점입니다. 지도자를 뽑을 때, 그 사람이 타인에 대한 진심어린 공감과 연민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인간에 대한 냉소와 멸시가 아니라, 존중과 애정이야말로 정치인의 최우선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주도우다도 이어서 읽어나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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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9-19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에서 접하고 홍범도 평전을 완독했습니다.

초란공 2023-09-19 12:23   좋아요 1 | URL
와~ 먼저 이끌어주셨네요. 함께 읽는 분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저도 부지런히 따라가겠습니다!

미미 2023-09-19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병렬독서 하느라 느리지만 저도 초란공님 따라 한 권 읽고 있습니다.^^ <제주도 우다>도 담아갑니다.

초란공 2023-09-19 22:24   좋아요 1 | URL
각자 속도대로 함께 읽어나가시지요~!
 
그냥, 사람
홍은전 지음 / 봄날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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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람>

홍은전 지음 [봄날의책] (2020)




어제 동네 책방에 갔다가 놓여있던 책 <그냥, 사람>이 기억났다.  
아침에 무심하게 펼친 책에서 눈에 들어온 문장이다.


오랜 시간 절박한 이들과 함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연대하는 사람이었을 뿐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걸, 둘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손 벌리는 자’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 (124)


절대’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본다. 결코 만날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무한대의 특이점 같은 것. 나는, 혹은 우리는 과연 타인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 


나는 결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당사자성'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들은 적이 있지만, 무엇보다 타인에게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느냐'고 기대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널 이해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럼에도’ 타인의 손을 잡아야 한다. 나와 타인 사이의 절대 간극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길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가 아닐까 싶다. 타인의 손을 잡을 용기가 없어도,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러므로 손을 내미는 일은 '상상하기'의 시작이다. '상상하기'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부터 시작된다. 우린 모두, ’그냥, 사람‘아닌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채워진 광막한 황야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오해라도 이것이 가득 차있는 '공유지', 시끌벅적한 ‘목초지’가 될 수 있기를.





"오랜 시간 절박한 이들과 함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연대하는 사람이었을 뿐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걸, 둘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손 벌리는 자’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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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의 바다 - 보이지 않는 디스토피아로 떠나는 여행
이언 어비나 지음, 박희원 옮김 / 아고라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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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언 어비나의 말 “바다는 숨이 멎도록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암담한 비인도적 행위가 난무하는 디스토피아적 공간이기도 하다.”는 말에 이 유동적인 공간을 둘러싼 문제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인권, 환경오염, 자원 남획 등등의 문제들..여기에 인간은 핵 오염수까지 더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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