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과 문학 사이
-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드리스 슈라이비의 《단순한 과거》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
드리스 슈라이비의 소설 《단순한 과거》와 만난 첫 인상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1] 작가 드리스 슈라이비는 1926년 모로코 출생이다. 이 정보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짐작해볼 수 있겠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북서부의 국가로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1950년대라고 한다. 과거에 ‘마라케시’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영어식 이름이 바로 ‘모로코’라고 한다.
유럽, 특히 1920년대의 유럽, 그리고 법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상태였던 시대. 이 배경 정보는 정말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나치 독일의 등장이 임박했던 시기. 오래 지속되어온 인종 혐오와 종교 갈등은 점점 더 긴장의 수준을 높여놓았을 테다.
이번에 출간된 《단순한 과거》는 국내에 작가 드리스 슈라이비의 첫 소개 작품인 듯하다. 소설가가 성장했을 시대, 특히 30-40년대를 고려해보면, 개인으로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시대를 살아낸 인물이란 짐작을 해본다. 이 정보만으로도 오늘 만나는 작품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2] 제목 ‘단순한 과거’는 문법 용어 ‘단순 과거’에서 온 말 같다. 시제와 관련하여 ‘복합 과거’ 뭐 이런 문법 용어도 있었던 것 같은데...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희구가 담긴 소설일까도 생각해보았다. 물론 주인공은 가부장제도, 그리고 억압적인 프랑스 제국주의 관행들과 충돌할 것이란 정보를 흘깃 보긴 했다.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눈에 힘이 조금 들어간다.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궁금해지긴 한다.
[3] 이 소설은 현재 진행 중인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 테지만, 책의 표지를 보다 갑자기 시오니즘과 중동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아모스 오즈의 작품과 동시에 이 전쟁이 떠올랐다.
표지 사진의 골목은 언젠가 이스라엘에 출장을 갔을 때 보았던 예루살렘의 어느 동네 골목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쑥대밭이 되었을 가자지구를 방문해본 적이 있었는데, 경계너머로 가자지구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 때는 고요한 낮시간이었다. 붉은 꽃잎을 한 꽃들이 민들레처럼 여기저기 피어 산들바람에 휘청이던 풀밭을 조용히 보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기관총을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더랬다. 우리 일행은 총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가자지구를 벗어났던 경험이 떠올랐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과거》에서는 모로코와 프랑스.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 북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구도가 뼈대를 이루는 듯하다. 작가가 살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종교·이념간의 갈등과 맞물린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잔재들. 지금 지구 한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소설의 대결 구도는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올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드리스 슈라이비의 《단순한 과거》와 아모스 오즈의 《블랙박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읽기 목표가 생겼다.
[4] 《단순한 과거》의 목차를 보면 다섯 편의 제목들이 특이하다.
‘기본원소, 전이기간, 반응, 촉매, 합성원소’
모두 화학용어다. 마치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단편소설 《주기율표》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였기 때문에,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제목들을 모두 주기율표의 원소이름에서 따왔다. 작가 다니엘 슈라이비의 작가 연표를 보니 그도 청년시절에 화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흥미롭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서는 이를테면, ‘증류’에 대한 묘사나 화학 개념을 우리의 삶과 연결 지은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의 전개가 왠지 소설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가지 구성 요소를 보는 것 같아 흥미를 더한다. 기본원소가 합성원소로 되는 이야기. 그 사이에 얼마나 무수한 원소들이 충돌하고 반응했을까.
[5] 책 맨 뒤에 실린 ’을유세계문학전집 연표‘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의 연대를 표로 정리한 것인데, 어떤 편집자님이 만들었을까. 이 연표가 마음에 들었다! 이 연표를 어떻게 구경해볼까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멜빌의 《모비 딕》을 기준으로 사용해본다. 《모비 딕》은 1851년에 나왔다. 바로 앞에 있는 호손의 《주홍 글자》를 중심으로 작품들을 살펴본다. 멜빌의 선배 작가 호손이 그보다 1년 먼저 이 유명한 작품을 내었구나.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1847년에 나왔다는 정보도 확인해본다. 도스토옙스키의 그 유명한 《죄와 벌》은 1866년에 나왔구나. 이런 식으로 어떤 작품이 어느 시기에 빛을 보게 되었을까 앞뒤로 살펴보고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이 표만으로도 한 시간은 거뜬히 혼자 놀아볼 수 있겠다.
아, 그런데 아직 첫 페이지도 넘기지 못했구나! 이제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