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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평점 :
우리를 날아가게 하는 ‘공기’ 같은 것
《레티파크 Lettipark》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
《레티파크》는 단편 17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짧은 감상을 남겨본다.
이 책은 우선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다. 더스트 커버를 책과 분리하면, 안쪽에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프레임의 가운데에는 초점이 나간 노란 종이비행기의 이미지가 보이고, 초록색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걷는 여성이 비행기의 이미지와 겹쳐 있다. 문득 누군가가 건물 안에서 무심코 건너편 거리를 바라보다가 길을 걸어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쫓는 듯한 시선같이 보이기도 한다.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을까? 그녀는 살짝 뒤를 돌아본다. 그러다 건너편 1층 건물에서 밖을 내다보는 누군가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같아 보이는 장면이다. 이 순간, 노란색 종이비행기가 두 사람의 시선을 가로지른다. ‘찰나의 순간’이다. 삶에서 이런 순간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나머지 우리의 시선이 따라가며 보았던 장면의 잔상마저 금방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계속 이어질 뿐이다. 모호함은 우연의 연속에 덮여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소설에 들어맞는 이미지는 아닐 테지만, 표지 안쪽에 실린 사진은 일곱 번째 단편 <종이비행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다. 책 표지 안쪽에 이런 사진을 배치한 출판사의 안목이 신선했다.
단편 <종이비행기>의 주요 인물은 서구적 경제 질서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싱글맘 테스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자 분투하는 사람, 혹은 소시민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때는 테스가 면접을 보러가는 아침이다. 그녀는 면접에서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다시 나가고 싶다.”(97)라며, 절박한 진실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테스의 바람대로 이루어지는지는 결국 보여주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단편은 ‘달려라 하니’의 단편소설 버전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억척 어멈 테스 이야기’가 되어버렸을 테다.
옮긴이가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이 ‘불가해한 현실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247)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소설은 어느 것도 확정된 상태나 결말을 보여 주지 않는다. 또는 그러한 방향으로 가는 듯한 암시도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의 손을 떠나 날아가는 종이비행기도 우리가 어디를 날아가도록 할지 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테스의 운명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기 보다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이 단편에서는 밤에 활짝 열린 창가에 가족이 모두 모여 있는 장면이 나온다. 테스의 가족이 그녀의 ‘남사친’ 닉이 날린 종이비행기를 함께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이 인상 깊다. 종이비행기는 중력의 영향 속에서 몇 초 동안 활공한다. 비행기가 이렇게 날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공기라는 ‘유령’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감싸고 있는 존재. 언제나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공기가 있기에, 종이비행기는 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싱글맘 테스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한, 자신을 언제나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가 중력을 견디며 멀리, 혹은 더 오랫동안 날아갈 수 있으려면, 이때 필요한 ‘공기’ 같은 것은 뭘까. 두렵고 불안하며 취약하기까지 한 우리의 삶에서 가족의 ‘유대감’ 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가장 작은 사회적 안전망, 혹은 최후의 안전망인 가족의 존재가 여기서 더 크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 다른’ 테스를 삶에서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수 있는 ‘유대감’ 같은 것일 테다. 가족을 통한 가장 작은 연대로부터 형성된 유대감이야말로, 의심의 여지없이 종이비행기가 잠시나마 날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공기’와 같은 것은 아닐지. 너무 상투적인 감상인지 모르겠다. 표지에 나온 사진을 보면서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함께 보는 테스 가족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책 속으로]
[1] "그냥 거기 있으면서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그들이 다치지 않게 돌보는 거야.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거야. 그게 다야."(94)
[2] "아주 오래도록 손을, 손목을, 다시 손을 그리고 얼굴을 씻고 나서, 재킷을 벗고 나서 거실로 간다."(95)
[3] "진실. 나는 그 사람들한테 진실을 말했어, 달리 뭘 말하겠어? 나는 아이가 둘 있다고, 싱글맘이라고, 정신 병동 경험이 있다고 말했어. 나는 이렇게 표현했어. 나는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이제 다시 나가고 싶다고. 일을 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어. 저는 씩씩해요, 저는 투지가 있어요, 저는 낙관적이에요. 저는 안정적인 사람이고 평정심을 가졌어요."(97)
[4] "가끔 나는 모든 걸 다시 분해했다가 새로 조립하고 싶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아냐. 하지만 이미 있는 걸 가지고 다른 걸 만든다? 글쎄, 그건 안 돼. 새미랑 루크를 봐. 나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99)
[5] "스탠의 엽서에 뭐라고 적혀 있지, 닉이 묻는다. 이 말에 두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다."(99) - 내가 꼽은 소설 속의 ‘반짝 빛나는 순간’
[6] "그가 말한다. 만약에 네가 빨리 던지면, 만약에 네가 - 바로 던지면, 너는 중력을 잠시 극복할 수 있어. 삼 초 동안 활공. 그다음엔 바람을 타고 쭉 날아야 해."(99)
[7] "비행기가 밖으로 떠간다. 거리를 넘어 선로를 향해, 높은 포플러를 향해서. 선로가 희미하게 빛나고, 하얀 날개가 어둠 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듯 보인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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