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이렇게 읽었다
저녁에 아내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서로 중점을 두어 읽은 부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교적 얇은 책인데도 이렇게 다르게 읽을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이걸 정리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정리하는 글은 내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남겨두고 싶어서 쓴 글이다. 다시 며칠 전에 쓴 이 책의 리뷰와 책을 들쳐보다가 바로 116년 전 오늘이, 그러니까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에 리히터 7.9 규모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한 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날은 아래에 소개할 조던이라는 인물이 이 지진으로 반평생 모은 어류 샘플을 대부분 잃은 상징적인 날이다. 그래서 오늘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메모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다. 다만 아내의 독법과 나의 독법이 다르고, 이 글은 내가 정리한 한 가지 의견이라는 점을 말해둔다. 각자의 읽기와 이해는 모두 유의미하고 중요하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이 책의 주요 소재는 평생 어류연구를 하면서 말년에는 강력한 우생학 추종자로 생을 마감했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조던의 생애는 저자가 이 책을 쓰게 한 가장 강력한 동인은 아니다. 누군가 책을 쓰는 사람은 그 사람만의 절실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자에게 절실했던 문제는 바로 ‘성정체성’이었다. 청년 시절에 착실하고 나무랄 데 없는 곱슬머리 남자친구를 사귀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저자에게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남자친구는 자신을 떠났으며, 자신이 당당히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졌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 사회는 스스로 만든 규정으로 개개인의 삶을 통제한다. 시대와 문화마다 다른 도덕과 윤리로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정의하고 제단하며 힘을 행사해왔다. 때론 이것이 하나의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룰루 밀러가 남자친구와 지내던 ‘정상인’의 범주에서 동성애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제 ‘비정상’의 범주로 재분류되었다. 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인간 스스로가 규정한 것이다. ‘룰루 밀러’라는 본질은 그대로 인데, 현실에서 그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세상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내가 느꼈던 저자의 절실함은 바로 이 생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저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루이 아가시에 대해, 그리고 우생학의 역사를 공부하게 하고,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게 하면서 그토록 절실하게 답을 구하고자 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문제는 결국 ‘나 혹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오늘 내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게 되어 아내에게 고백하고, 가족에게 얘기한다고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나의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분명 고백 이후의 세계는 내가 속했던 세계가 더 이상 같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사회로부터 사실상 추방당하는 상황이거나 사회적으로 ‘거세된’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나의 사고 실험만으로도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다.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형성된 내 전 존재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룰루 밀러가 지녔던 생의 절실한 문제는 바로 이 문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 책이 그토록 매력적이고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던의 삶이나 우생학은 저자가 자신의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지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인류 역사의 부조리한 일면일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몰이해,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위치 선정과 우월 의식, 언어와 제도로 인간 존재 자체를 옭아매기도 한 인간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이 점을 고발하고 싶었을 것 같다. ‘어류’,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 역시 결국 인간 존재를 지구상의 다른 존재와 구별하며 우월한 지위에 놓는 인간의 편견과 잘못된 전제가 담긴 아주 상징적인 사례였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성한 사다리’ 개념에 깃들어 있는 인간 종의 우월의식은 훗날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우생학’의 단초를 심어놓은 셈이다.
아내가 이야기한 내용 중에 흥미로운 점은 생화학자였던 룰루 밀러의 아버지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저자의 아버지가 사는 방식, 그의 삶이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특이한 아버지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그가 저자에게 준 영향을 고려할 때 이 책에서 아버지는 상당히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정리가 되지 않았을 부분인데, 내가 볼 때 저자의 아버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두 사람 모두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었지만, ‘우생학’을 발명해낸 다윈의 고종 사촌 프랜시스 골턴이나 죽을 때까지 우생학을 신봉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한쪽 극단에 위치해 있다면, 그 반대쪽 극단에는 저자의 아버지가 위치해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조던처럼 《종의 기원》의 세례를 받은 과학자였지만, 그는 딸들이 어렸을 때부터 ‘너희는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다윈의 책이 인류에게 ‘인간은 지구를 구성하는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의 충격을 던져주었다면, 저자의 아버지는 이 가르침을 교조적이고 기계적으로 신봉한 인물이 아닐까한다. 물론 인류가 현재 지구를 오염시키고 황폐화해버린 큰 전제 하나가 ‘인간이란 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지만, 저자 아버지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스스로 우월감에 도취하거나 자만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경고는 될 수 있지 몰라도 무언가 빠져 있는 것 같다. 룰루 밀러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성정체성 문제가 다가왔을 때 그녀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아마도 골턴과 조던과 같은 한쪽 극단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위치와 삶의 ‘경계선’과 아버지의 말처럼 정반대의 가르침 사이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란 존재가 중요하지 않다’라고 한다면, 과연 나는, 나의 존재는, 나의 역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일까. 아버지의 가르침이 인간 종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그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따를 때, 나의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 무언가가 빠져있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여기에 저자가 찾아낸 하나의 단서가 바로 ‘민들레 법칙’이다. 저자에 따르면 민들레는 잡초로 여겨지곤 하지만, 때로는 단순한 잡초가 아닌 약초로서 인정받기도 한다. 자연을, 그리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는 깨달음이 아닌가.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잡초’와 ‘약초’의 기준에 따라 민들레를 선별한다. 이 또한 ‘우생학’의 논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가 발견한 깨달음은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읽은 책을 떠올리자면, 저자가 찾은 답의 실마리는 다니엘 S. 밀로의 《굿 이너프》의 입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비판 없이 받아들이곤 하는 ‘적자생존’의 논리가 해제의 표현을 빌리면, 최상급보다는 비교급이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곧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에는 무수한 변이가 존재하고, 이들 모두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라는 의미다. 성정체성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트랜스젠더 생물학자 조안 러프가든의 《변이의 축제》역시 아직 끝까지 숙지하진 못했지만, 결국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생물체가 보이는 다양성이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볼 수 있다. 성정체성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 공동체에서 언제나, 일정 비율로 발견되는 모습, 자연이 보여주는 ‘다양성의 모습’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룰루 밀러의 ‘민들레 법칙’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이 사안의 절실함과 이 책을 집필한 저자의 여정이 눈에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다.
저자의 절실한 글쓰기 여정에서 만난 또 다른 깨달음은 ‘우리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위상은 루이 아가시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간은 우월하다’는 의미와 크게 차이가 난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존재가 다 소중하다’는 정도와 가깝다고 이해된다. 이 차이를 예민하게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류는 이 차이를 명민하게 구별하지 못했기에 2010년대에 들어서도 한 부류의 인간이 다른 인간들에게 강제로, 혹은 불법적으로 불임화 시술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외친 이 말을 결국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데이비스 스타 조던의 대척점에 있다고 보았던 저자의 아버지는 ‘모든 존재가 다 중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지녔다. 결국 여기에서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이 빠져있던 것이 원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아버지의 가르침에 혼란스러워하며 여기에 무언가가 빠져있다고 느꼈던 이유가 바로 사랑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대상에 대한 ‘애정’, ‘존중’, ‘관심과 배려’와 같은 가치들로도 치환될 수 있겠다. 밀러가 아버지에게 하려던 반박의 말 ‘우리는 중요하다!’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어떤 것으로 ‘규정’되든 간에, ‘나는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중요하고 충분한 존재’라는 자각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설정한 ‘범주’대로 자연이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어류’라는 자의적인 범주 역시 틀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정체성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편견 어린 시선으로 규정해버린 틀린 범주라는 의미였다.
내게는 저자가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263)라고 갈무리하고 있는 이 인식에서 비로소 희망과 평안을 얻기 시작했다고 본다. 인간의 산물인 과학 역시 그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과학 고유의 정신이자 가르침인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라’는 명제에 성역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인간이 함부로 규정해버린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의 모든 사안이 ‘어류’ 문제와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을 ‘성소수자’라고 규정하는 일 마저도 우리의 편견일 뿐이다. 이들은 단지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뿐이다.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소리 높여 발언해 온 강남순 교수의 저서《질문 빈곤 사회》에서 인상적인 대목이 많지만, 그 역시 ‘인간의 성적 지향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 한 인간의 존재 방식일 뿐이다’(216)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대상에 대한 ‘동정’과 ‘연민’에 대해 구분할 것을 독자에게 요청한다. 저자에 따르면 ‘동정’은 타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에서 끝난다. 여기에는 ‘왜’와 ‘어떻게’가 없는 것이다. 반면 ‘연민’에는 ‘왜, 어떻게’의 근원적 물음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연대의 행위나 인식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곧 연민은 ‘함께 살아감’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생명철학이 담긴 예수의 메시지’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룰루 밀러가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답을 구하기 위해 던진 물음은 ‘나는 왜?’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 근원적 물음이 글쓰기 행위로, 나아가 인식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쓰다 보니 다소 뜬금없는 사례일 수 있지만, 데이비스 스타 조던이나 프랜시스 골턴, 루이 아가시와 같은 인물들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욕망을 마음먹기에 따라 다 가질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이들은 엄청난 학식과 명예, 부를 얻은 존재이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 인간 각자의 내면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 ‘악’의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사랑’이 없다는 것은 지구의 모든 존재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 ‘사랑’이라는 인간애, 인간 존중이 없다면 이성의 극단에 치우친 인간은 허무주의나 냉소주의로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랑’을 앞에서 언급한 ‘연민’으로 바꾸어도 본질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또 생각해볼만한 것은 괴테의 광범위하고 방대한 글쓰기 역시 모든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괴테의 시집을 포함한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색채론, 식물학, 동물학, 기상학, 광물학, 그리고 60년에 걸쳐 집필한 《파우스트》가 자리 잡는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전영애 교수의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에 관한 글에서 좀 더 언급해보려 한다. 어쨌든 괴테의 글쓰기는 자신이 파악하고자 한 대상에 대해 읽고 쓰면서 인식을 넓히고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룰루 밀러가 이 책에서 보여준 글쓰기와 서로 통한다고 여겨진다.
다시 보면 이런 모습은 나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준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고, 그럼으로써 타인에게 많은 고통과 슬픔을 주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실수’라는 이름으로 덮어두기에는 이 시절이 너무나 태만하게 느껴진다. 젊은 시절의 배움은 ‘지식’뿐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존중하기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급하고 거칠게 정리하긴 했지만, 이것이 내가 룰루 밀러의 글을 어떻게 읽었는지 다시 정리하며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 중년의 나이에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또 하나의 소감은 우리가 ‘능력제일사회’와 무한경쟁사회에서 살아나가는 데 배워야할 것 중에서 어쩌면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 곧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과 애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일도 ‘사람에 대한 애정과 진심’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