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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 - 가장 어두울 때의 사랑에 관하여
짐 디피디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1년 9월
평점 :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
: 가장 어두울 때의 사랑에 관하여
(The Day the World Came to Town: 9/11 in Gander, Newfoundland)
짐 디피디(Jim DeFede) 지음 |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 - 인간의 선함은 우리 안에 있다
오늘(2021년 9월 11일)은 미국의 ‘9·11 사건’이 발생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에 복학생이었던 나는 TV를 통해 강박적으로 재현되던 영상을 기억한다. 한 대의 비행기도 아니고 여러 대가 납치되어 미국의 상징적인 무역센터 건물 두 동과 펜타곤을 공격했던 사건. 수천 명의 사람들은 전 세계가 목격하는 가운데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이 가상현실과도 같은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20년. 이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 이들의 가족, 친구들은 각각 어떤 경험을 하고 또 트라우마를 겪었을까 상상해보곤 했다.
사건이 있던 당일 미국의 영공은 순식간에 폐쇄되었다. 당시 미국 상공에 있던 4546대의 비행기는 미국 내 착륙이 금지되었다. 이들은 하늘에서 출발지로 회항하거나 주변국 공항에 임시착륙을 해야 했다. 이렇게 머나먼 곳에서 발생한 한 사건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캐나다의 소도시에 모이게 되었다. 저널리스트 짐 디피디의 기록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은 9·11사건 당일,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의 작은 섬 갠더(Gander)에 위치한 공항에 임시 착륙했던 사람들이 경험한 6일간의 기록이다.
캐나다 동쪽 귀퉁이에 위치한 뉴펀들랜드 주 갠더 섬은 인구 1만 정도의 소도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승객과 승무원 6595명을 태운 비행기 35대가 비상착륙을 했다. 도시 인구의 과반수가 넘는 인구가 순식간에 나타나 언제 이륙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황은 딱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안타까워만 할 것인지, 아니면 ‘뭐라도 도움을 주어야 겠다’라고 결심하고 몸을 일으킬 것인가. 갠더 시 주민들은 본능적으로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지체 없이 실천에 옮겼다.
하늘 길이 곧바로 열리지 않게 되자 이 뉴피(뉴펀들랜드 주민)들은 집에서 이불과 담요, 베개를 가져와 건네주려고 3 km에 가까운 줄을 섰다. 구세군과 적십자는 지원품을 여기 저기 떨어진 대피소로 실어 날랐다. 어느 약사는 지역 약국과 협력하여 세면도구와 칫솔을 대량 주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 상인들은 수천 달러어치의 물품을 무상으로 기부했다. 많은 가정이 사람들을 자신이 집에서 샤워를 하고 편히 쉴 수 있게 배려했다. 민·관이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주도적으로 찾아 움직였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싶다. 갠더 주민들의 행동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단지 물질적인 도움만 제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안해하는 승객들이 충격과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이들의 감정마저 돌보아 준 부분이 인상 깊다. 주민들은 이 불청객의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공감했다. 또 자신들과의 공통점을 찾고 승객들이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갠더 주민들은 인종과 종교의 이질성에 주목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했으며, 최대한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이 뉴피들은 타인을 도우려는 의지가 본능인 듯 보였다.
한 가지 더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갠더에 내린 사람들 중에 구소련 국가 몰도바 출신의 난민 서른여덟 명이 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영어를 몰라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갠더 주민들은 일주일 동안 ‘무언극과 몸짓’의 달인이 되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저자는 아마도 소통의 문제로 이들의 이야기를 책에 풀어놓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아프가니스탄인 390명을 구출해온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9·11사건 발생 후 한 달 뒤, 미국이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년이 지나 올 8월 말일, 미군의 철수를 끝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므로 ‘특별기여자’ 신분으로 국내에 들어오게 된 아프가니스탄인의 운명은 바로 20년 전 발생한 9·11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수년 전 예멘 난민과 관련한 이슈로 처음 몸살을 알았던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난민이 발생하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는 나중에 고려해보더라도, 갠더 주민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히 우리에게 유대감의 가능성과 환대의 상상력을 전달해주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개인을 보호하기위한 정치·사회적 장치가 부족했던 과거에 생존을 보장하는 길은 서로 힘을 모으는 것, 그리고 환대를 통해 가능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바탕으로 의지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길만이 집단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을 테다. 우리는 현재 ‘단절의 시대’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대, 종교, 성별, 경제적 격차 등으로 분리되고 서로가 고립되어 간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구성원이 원자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없이 유대감을 느끼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뉴펀들랜드인들은 임시 착륙한 항공기 승객을 받아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곁을 내주고 이들이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9·11사건이 있고 일주일이 지나면서 이들은 갠더 주민들과 가족처럼 유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해 가족과 같은 유대감과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짧은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우리 인간은 모두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가족처럼 연결될 수 있으며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임을 갠더 시민들은 입증했다. 종교, 피부색, 교육 수준과 상관없이 말이다. 정확히 20년 전 ‘오늘’ 있었던 사건은 인간의 ‘선함, 그리고 천국’이 바로 우리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를 발견하는 일은 오로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뉴펀들랜드인은 포위당한 사람처럼 산다. 섬에 고립된 채 거친 날씨를 속수무책으로 겪다 보니, 살아남으려면 서로 의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17)
"뉴피가 이름 모르는 사람을 그냥 ‘친구‘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록샌과 클라크도 곧 알게 되었다." (78)
"온 세상이 망가지는 와중에 지금, 바로 여기, 지구상의 구석진 조그만 마을에서만큼은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니 안심이 되었다." (215)
"갠더에는 증오도 분노도 공포도 없었다. 오직 공동체 의식만이 살아 있었다. 여기서는 모두가 동등하고, 누구나 똑같이 대접받았다." (216)
"갠더는 살기 안전한 곳이었다. 문을 잠그지 않고 이웃과 가까이 지내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이제는 16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비극이 자기 삶과 어떻게 직결되는지 알게 되었다. 온 세계가 마을에 왔을 뿐 아니라, 세계의 문제도 함께 다가왔다." (259)
"갠더가 마법 같은 공간이라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마다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 재난 앞에서 한마음으로 친절을 베풀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구든 똑같이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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