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2020)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독서일기] (소설을 읽은 인상 외에 주요 줄거리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문학이 아직 생소하지만 작년에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박형규 옮김, 문학동네]를 읽고 뿌듯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소설가로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톨스토이가 중년에 쓴 이 소설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양상을 폭넓게 담고 있었다. 특히 결혼을 중심으로 한 가족과 친인척의 범주 속에서 발생하는 삶의 모순들과 농노제 문제를 포함한 계급갈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의 대문호로 언급되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 이 《안나카레니나》를 읽고 ‘예술작품으로 완전무결하다’고 까지 격찬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소설 전체를 상당히 인상깊게 읽었는데, 지인 한 명은 소설 중간에 톨스토이의 잔소리 같은 부분이 많아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이런 기억이 있었기에 토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어떨까하고 한동안 궁금했었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죄와 벌》이 새로 출간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읽어보게 되었다.
독서일기를 쓰는 오늘까지 《죄와 벌》1·2권을 모두 읽고, 1권 1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 번 읽고 받은 인상은,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카레니나》를 읽고 평한 표현(‘예술작품으로 완전무결하다’)이 오히려 《죄와 벌》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하는 점이었다. 러시아 대문호들의 두 작품을 읽은 인상만을 비교하면(내 독서 경력이 짧기에 매우 주관적이고 한정적인 비교다),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는 ‘이야기로 들려주는 사회학 연구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폭풍이 휘몰아치듯 정신없이 전개되는 한 편의 범죄 심리 드라마였다.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까지 거의 힘이 빠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죄와 벌》은 개인적인 기준으로 보면 주말에 모든 약속을 잡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후, 지나간 시즌의 드라마를 한 방에 몰아쳐서 보는 드라마 같은 작품이다.
길지 않은 독서 경험이지만 이렇게 몰아치듯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혹은 이렇게 읽었던) 책들이 몇 권이 있다. 우선 첫 번째가 연암 박지원 선생의 완역판 《열하일기》 [김혈조 옮김, 돌베개]이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밤새 읽고 회사에서 졸게 만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이제 ‘이런 짓’은 다시 하지 않는다. 체력이 되지 않아 후폭풍을 감당하기란 이제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두 번째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이다. 이 책은 젊었을 때 읽었다면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을 책이다. 삶이 더 이상 만만치 않다는 자각이 지나간 뒤에 만나게 된 책이기에, 어떤 배경지식 보다는 내 삶의 경험치로 읽은 소설이다. 이 책 역시 처음에 우연히 읽게 되었지만 ‘이 책 정말 물건이네’라는 강한 느낌을 받으며 밤새 읽었다. 다음 세 번째 책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송무 옮김, 민음사]였다.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구성된 이 소설은 실제로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서머싯 몸이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40대 중반에 발표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인 조르바》와 《달과 6펜스》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두 소설 모두 어느 한 면으로는 ‘자유’ 혹은 ‘자유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소설 모두 젊은 시절에 읽었다면 이렇게 밤을 새면서 하루만에 읽어낼 만큼 나와 공명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회가 부과하는 규범과 속박 속에서 ‘자유인’의 조건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내게 던져준 소설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죄와 벌》이 있다. 내가 몰아치듯 읽었던 네 번째 책이다. 나는 이 소설의 어디에 그렇게 끌렸던 것일까. 이 책은 한편으로 범죄 추리 소설같은 구도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죄를 지은 주인공 로쟈(라스콜리니코프)의 내밀한 심리 묘사가 독자에게 공개된다. 예심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와의 치열한 심리 대결 또한 흥미롭고 놀라운 대목이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소설 속에서 이렇게 녹여 내었는가다. 물론 이 점만이 도스토옙스키의 대문호로서의 장점은 아닐 것이다. 천천히 재독을 하면서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속에 배치해둔 섬세한 장치들을 재발견하고 음미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톨스토이의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비교할 때, 유사점이 있다. 《부활》의 남자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여자 주인공 카츄샤의 구도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구도가 유사한 것이다. 네흘류도프와 라스콜리니코프는 모두 죄를 짓는 인물로 등장하고, 재판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그리고 이 남자 등장인물들이 사랑했던/사랑하게 되는 카츄사와 소냐는 범죄의 대상이 된 충격과 가난이 결합된 이유로 유곽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구도의 유사성에 주목을 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무엇보다 네흘류도프와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가 규범으로 정해 놓은 선을 넘어버린 ‘범죄자’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런 모티브의 설정은 두 대문호의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성 자체가 악하다고 규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빈곤’과 같은 사회적 조건 및 배경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부활》과 《죄와 벌》모두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 이들을 따르며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카츄사와 소냐의 존재로 주인공들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 역시 공통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톨스토이의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 중 하나가 ‘죽음’ 혹은 ‘죽음에의 공포’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 예를 들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중간 중간 드러나듯 ‘모비 딕’이라는 이 특이한 향유고래의 ‘흰색’이 주는 공포감과 마찬가지로, 사방이 흰 눈으로 뒤덮인 벌판에서 톨스토이가 실제로 느꼈던 ‘백색공포’의 경험은 곧바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포감이다. 이 ‘죽음’과 관련한 주제는 《죄와 벌》에서 여러 등장 인물들의 다채로운 죽음의 순간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전당포집 노파와 나이 어린 젊은 동생이 로쟈에 의해 도끼로 살해된다(여기 까지의 내용은 책소개에 공개되어 있으므로 공개하겠다). 또 어떤 인물은 가난에 찌들고 술에 절은 절망의 상태에서 마차에 치여 죽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권총으로 자살하기도 한다. 이 처럼 소설에는 다양한 죽음의 순간들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로쟈가 지인의 죽음 직후 그 집을 나오면서 아이러니하게 ‘강렬한 생명의 느낌’은 받는 대목은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정치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사형되기 직전에 사면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직접 ‘인지하고 예상된 죽음’ 앞에서 죽음을 직감하고,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었기에 써 내려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이 강렬한 죽음-삶의 경계감은 도스토옙스키만의 작가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정리해보면,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는 한편의 사회학적 소설이라고 한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한편의 범죄 심리 드라마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톨스토이처럼 표면적으로 혹은 설명을 통해 작가의 문제의식이 수면 밖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상황 설정과 등장 인물 사이의 대화를 통해 수면 아래에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독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그 메시지를 재발견하고 추출하여 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제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으므로, 작가가 남겨 놓은 보다 풍부한 의미들을 보다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