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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매화나무 흰 그늘 속에 그가 앉아 있다. (본문 23p)

이 소설에는 일흔 넷에야 비로소 치매에 걸린 일흔하나의 남편을 사랑하게 된 윤희옥을 통해 노부부가 살아온 과거의 시공간을 오가면서 부부의 삶과 사랑에 대해 펼쳐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스토리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경직이 된 남편을 씻기고 검은 연필로 눈썹을 그리고 붉은 댕기처럼 붉은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춘 은옥은 이 년 전 매화나무가 죽자 잠깐 온전한 정신이 돌아온 남편 주호백이 매화가 없으니 마당이 텅 빈 것 같다는 말에 죽은 것과 비슷한 홍매를 주문하고 크레인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구덩이까지 파놓고 떠난 그 자리를 인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삽으로 파고 호미로 긁어 합지박에 담아 일일이 위로 올려놓고는 빨간 넥타이에 회색 양복을 입힌 그를 안으로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 년 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어느덧 칠십대 후반이 된 은옥에게는 힘겨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아침, 정원사는 어제 인부들이 파놓은 그대로인 구덩이 밑바닥위로 매화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은옥은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가 나지막하게 울부짖으며 실종신고를 한다. 죽은 게 아닌 영원한 실종으로.
갚아야 할 죄가 있다면 남은 인생에서 다 덜어내어 살아 있을 때 그와 수평을 이루고 싶다. 남은 꿈은 그것뿐이다. 내게 남겨진 시간은 그러므로 당연히 실종된 그를 찾아 헤매는 고단한 과정에 바쳐질 터이다. 발바닥엔 물집이 생기고, 입술은 부르트고, 삭은 관절들은 걸음걸음마다 내려앉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다. 굽잇길마다 비바람이 불고 물길마다 그 법이 깊을망정, 죄를 벗어 기워 사랑의 값을 완성하고자 하는 길일진대. 그 굽잇길 그 물길이라 할지라도 왜더러 꽃인들 피어 있지 않겠는가. (본문 30p)
은옥이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이 과거의 시공간을 종횡으로 오가는 과정 속에서 펼쳐지게 된다. 2009년 봄 뇌출혈로 쓰러진 주호백은 뇌수술을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행동은 전과 달라졌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언제나 은옥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라준 사람이 뇌수술 이후 자주 자기주장을 앞세웠고, 전엔 도무지 없었던 일이기에 크게 화를 낸 적은 없었어도 짜증스러운 어투만으로도 은옥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그랬다. 그는 은옥의 충직한 시종으로 전 생애를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실종 신고로 미국 남부 잭슨 시에 살고 있는 딸 인혜가 왔다. 인혜는 아버지의 실종을 믿지 못했다. 지난가을에만 해도 아빠가 잘 걷지 못한다고 엄마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혜는 엄마가 파출소에 찾아가 실종 신고를 하고, 그의 사진을 보탠 심인 전단지를 주문한 것보다는 아빠의 고향에 먼저 가봐야 되지 않겠냐고 했고 그렇게 은옥은 딸 인혜와 함께 남편의 고향으로 가보게 된다. 은옥은 주호백을 처음 만났던 그 고향에서 초등학생 시절 코흘리개였던 주호백과 마주하게 되었고, 쫓겨가는 인민군에 의해 할아버지가 희생당하고, 임신중이었던 아내가 죽게 되면서 전 재산을 정리해 삼촌이 지은 암자에서 김가인을 만나게 되는 스무살의 젊음 날을 떠올렸다.
가인의 아이를 임신한 자신을 받아준 주호백은 은옥의 딸 인혜와 은옥에게도 헌신적이었으며, 이후에도 수두를 앓고 있는 딸을 두고 가인과 두 달을 살다 돌아온 은옥을 아무말 없이 받아주었다. 그랬던 호백이 치매를 앓고 그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나쁜 년이라 호통을 쳤고, 자신을 죽이려 칼을 들었다. 호백에게 단 한 번도 뜨거운 눈길을 준 적이 없었던 은옥은 그 순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공평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야!" (본문 154p)
은옥은 그와 자신 사이에 너무도 불공평한 규칙이 적용돼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참고 견디었고, 항상 자신의 가슴만을 오로지 할퀴었고, 또 항상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그의 에너지를 다 썼다. 그에 비한다면 은옥 자신은 자신 감정만을 따라 살았고, 그의 가슴을 자주 할퀴었으며, 또 자신의 기쁨만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 뭉치고 뭉쳐서 치매를 불러온 게 틀림었다는 것을 은옥은 자신을 죽이려던 호백을 보면서 깨달았고, 동시에 자신이 살아서 그에게 반이라도 갚을 기회가 온 것에 대해 한없이 감사했다.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전적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사는 동안 이런 각성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은옥은 기뻐했다.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본문 267p)
소설은 죽은 남편을 마당에 묻고는 사망 신고가 아닌 실종 신고를 한 이야기로 시작되었지만 희옥은 돌아오지 못할 남편을 기다린다. 치매는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쌓은 삶과 사랑과 관계 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병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치매는 희옥에게 오히려 외면해왔던 주호백의 인내와 헌신과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불과 며칠 전, 친정 아버지는 치매라는 무서운 병으로 인해 힘겨워했던 시간을 내려놓고 돌아가셨다. 그런 탓에 내게 치매는 무서운 병이고 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관계를 철저하게 외면하는 병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치매를 역설적이게도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꽃잎처럼 슬프면서도 매혹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본문에 수록한 이미지처럼 잔잔한 한 폭의 그림같다고나 할까. 작가 박범신은 이 책을 나이 일흔에 나의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라 했다. 그래서일까? 함께 나이를 먹고 함께 늙어가고 그렇게 함께 죽음을 천천히 받아들여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평온하게 느껴진 것은.
희옥이 그러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의 이유를 아직은 어린(그들에 비해) 나는 이해하기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죽음이 눈앞에 있는 순간에서 사랑을 깨닫고 그의 인내와 헌신이 가득한 사랑을 깨닫게 된 희옥을 응원할 수는 있었다. 사랑했기에 호백은 희옥을 인내했고, 사랑했기에 희옥은 호백을 그리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마흔이 넘은 이 순간에도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이 내게는 더욱 그러하다. 사랑의 끝엔 당연히 사랑이 있다는 작가의 당신, 우리네 삶은 그렇게 사랑으로 만들어가고 사랑으로 정리해가는 것은 아닐런지. 남편과 내가 그렇게 함께 나이를 먹고 함께 늙어가고 함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랑은 그러한 것일테니.
(이미지출처: '당신' 본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