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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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를 통해서였고, 김려령 작가를 뇌리에 각인시키게 된 것은 <완득이>였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가시고백><우아한 거짓말> 등의 작품도 접했지만 김려령 작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완득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일까? 김려령 작가의 책을 읽을라치면 기대를 먼저 하게 되고, 읽다보면 어느 새 <완득이>와 비교하게 되면서 조금은 야박한 평을 하게 된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인간관계와 사랑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낸 그녀의 신간 <<트렁크>>에서 작가는  결혼과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형식과 내용을 꼬집고 비틀고 그 이면을 들춰내며 관습이 얼마나 고루한 것인지,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지는 현실적 욕망이 얼마나 속물스러운 것인지 이야기하고자 했다. <완득이>와는 전혀 다른 주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음에도 나는 전작과 빗대어 평한다. 그것이 그릇된 평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이는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며, 그녀의 폭 넓은 사유에 대한 평이 아님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중산층으로 그럭저럭 살다가 회비가 밀리고 혼인성사자금도 없어 자동 탈퇴된 회원도 있다. 미련으로 계속 NM으로 연락하지만 NM의 답변은 간단하다. 법적 결혼을 하세요. 그게 제일 싸게 먹힙니다. 값진 조언도 잊지 않는다. 잘하면 공짜로 눌러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혼인신고를 하세요. 법적으로 큰소리 칠 수 있고, 한몫 챙기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본문 73,74p)

 

얼마 전 뉴스를 통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가 아니여도 주변을 둘러봐도 30대 중반을 넘어섰음에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은 지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경제적인 불안과 어려움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 문제이다. 집 장만을 위해 3년간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그동안 집 값을 다시 오르는 바람에 결혼을 연기해야 한다는 한 남성의 인터뷰는 지금 우리 사회의 사랑, 결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에 작가는 '기간제 배우자'라는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결혼과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하도록 하고 있다.

 

마지막 밤이다. 남편은 적당히 친절했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이런 남편만 만나면 직장생활 참 편하겠다.

"결혼 괜찮았어?"

"생각보다. 당신은?"

"나도." (본문 7,10p)

 

스물아홉 살의 인지의 결혼생활은 트렁크 하나로 막을 내렸다. 인지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결혼정보회사인 W&L의 VIP 전담부서인 NM(new marriage)의 소속이다. NM은 W&L의 한 부서로 위장했을 뿐, W&L이 숨겨둔 비밀 자회사로 인지는 와이프팀 FW(field wife)에서 현장근무를 하고 있는 차장이다. NM은 미혼남녀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아내(FW)와 남편(FH)를 보낸다. 회원의 희망 배우자로 선정된 FW나 FH는 납득할 만한 사유 없이 세번 이상 노가 누적되면 권고사직을 당하기도 한다. 졸업을 앞두고 안국동에 있는 출판사에서 면접을 본 후 헛헛한 마음에 인사동까지 걸어와 미술관에 들어간 인지는 우연히 NM 스카우터를 만나게 되고 취업을 권고받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4대 보험을 적용받는 고액 연봉 접대부였으며, 체계적인 변형된 성매매였다. 유명 결혼정보 회사가 알고 보니 성매매 알선책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언론사 선배한테 찔러주면 수습 하나는 얻을 것 같았지만 인지는 남자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결국 자신을 떠나게 만든 어머니에 대한 반감과 면접 본 회사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서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와 손을 잡게 된다.

 

"접대부 렌탈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회원은 섹스리스도 있고, 성생활이 불가능한 배우자도 있어요. 조금 다른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끼리 연결해주면 되잖아요."

"마음만 맞는다고 되나요. 지불한 만큼 누려야죠." (본문 25p)

 

네번째 결혼 생활을 마치고 업무 복귀를 위한 회복 기간를 받은 인지는 친구 시정의 부탁으로 소개탕을 한 엄태성이라는 남자와 소개팅을 하게 되는데, 인지의 거절에 엄태성은 인지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후 인지는 전 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 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엄태성은 그런 인지를 또 찾아온다. 인지는 남편과 함께 사는 집에 찾아온 엄태성을 NM 구조대에 신고를 하게 되고 구조대는 엄태성을 제압해 인지 몰래 격리시킨다. 다섯 번째 결혼 생활 동안 인지는 남편의 초대로 그의 이혼한 전 부인을 만나면서 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10년 전 삼총사였던 친구 혜영의 죽음도 떠올리게 된다. 엄태성이 격리 된 것을 알게 된 인지는 남편의 도움으로 엄태성을 풀어주고, 혜영의 죽음 뒤에 숨겨진 시정과 혜영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이 혜영이 죽던 10년 전 수능 본 날 클럽에서 만나 도움을 받았던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열아홉에 그리고 스물아홉에 다시 만나게 되었던 남편은 위기 때마나 자신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출장 결혼의 계약이 끝나고 인지는 승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십대 때 원한 이십대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이제 서른이 된 인지는 삼십대를 마치고 또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이십 대의 상징인 트렁크를 버리기로 한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인지 앞에 엄태성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

 

십대 때, 나는 어떤 이십대를 꿈꿨었나. 벌써 이십대의 마지막까지 왔는데 모든 것이 엉켜버렸다. 나의 이십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에 전처를 초대한 남편과 섹스를 할 줄이야. 듣지도 않은 「오리온」이 귀에 울린다. 얼핏 남자가 우는 것 같기도 했던 곳이다. 낯선 곡에 꽂혀 온종일 그 곡만 들었도 좋았던 예쁜 시절이 있었다. 괜찮아? 아파. 뚜거덕뚜거덕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본문 99p)

내 삶을 꾸역꾸역 구겨넣고 다녔던 트렁크를 버려야 한다. 손 안에 꼭 쥘 수 있는 금장단추,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본문 201p)

 

 

 

계약결혼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소재로 한 이야기 <<트렁크>>는 사랑, 결혼에 대한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완득이>처럼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소리내어 이야기해야 하는 내용이였음에는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김려령 작가를 떠올릴 때 <완득이>만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만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작가라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김려령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 <완득이>를 떼어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 작품 외에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임을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듯 싶다. 이제 그녀가 보여주는 놀라운 변신을 주목하려한다.

 

(이미지출처: '트렁크' 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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