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 한국과 일본, 라면에 사활을 건 두 남자 이야기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김윤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 이 책의 조리법

 

① 라면의 유래와 지식, 정보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② 기업가 정신을 배우고 경영 멘토링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③ 한일 양국의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④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고 싶은 분께 심리적 위안을 줍니다.

⑤ 다 읽고 난 후에는 라면 냄비 받침대로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표지 中)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울푸드 라면, 나 역시도 예외일 수는 없다. 간단하고 저렴한데다 당당히 한 끼 식사로 자리잡고 있는 라면을 사랑하지 않는 한국인은 많지 않으리라. 그런 까닭에 라면에 관한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고 선뜻 읽어보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받으면 책표지를 먼저 살펴보곤 하는데, 뒷표지를 보고는 빵 터지고 말았다. 라면 봉지에 써있는 조리법을 빗대어 이 책의 조리법을 써 놓은 것이다. 너무도 기발한 발상에 호감이 샘솟는다. 경제경영 도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센스에 딱딱하고 무겁게만 느껴질 법한 내용이 조금은 가볍게 다가온다.

 

이 책의 저자인 무라야마 도시오는 한국인의 영혼을 가진 일본인으로 한국식 라면 맛에 빠져 있다. 그는 잊혀져가는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뜻밖에도 한일 양국의 우정이 담긴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 우정은 한국의 삼양식품을 세운 전중윤과 일본 묘조식품의 창엽자 오쿠이 기요스미인데 인스턴트 라면이 맺어준 이 만남은 식민지 지배의 상처도 충분히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두 나라 사이의 국교도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에서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길 없다고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추억 하나쯤 있는 라면이 한일 양국에 우정이 얽혀있다니? 이 놀라운 이야기는 일본은 고도성장으로 막 진입하는 중이었고, 한국은 한국전쟁의 참화에서 간신히 일어나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1950~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에 등장하는 1950~1960년대의 일본은 고도성장으로 막 진입하는 중이었고, 한국은 한국전쟁의 참화에서 간신히 일어나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전쟁의 위기감이 감돌았고, 서민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그리고 열심히 살아보려는 에너지가 물씬 느끼지던 시대였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경영자 역시 그러한 시대적 뜻과 포부를 품고 저마다의 길을 걷다가, 운 좋게도 우연한 만남을 통해 더욱 거대하고 멋진 삶을 살았다. (본문 17p)

 

이 시기 청년 오쿠이는 동료 몇 명과 농림성의 가공 위탁을 받아 즉석 면을 제조하는 묘조식품이라는 회사를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오쿠이는 건면만으로는 수요에 한계가 있는데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제품을 만들 필요를 느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새로운 건조장치 개발을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1954년 2월, 일본 최초의 '이행식 자동건조장치'로 생산한 건면을 시장에 선봉였다. 그후 묘조식품은 건면업계에서 정상을 지키게 되었다. 허나 오쿠이는 더 높은 곳을 지향하기 위하여 무언가 획기적인 상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편 전중윤은 소년 시절의 인연인 일본인 호사카 히사마츠의 권유로 상업학교에 다니게 되고 식민지 통치의 최고기관인 조선총독부 체신국 보험과로 발령을 받는다. 희망과 불안을 함께 끌어안고 고민 많은 20대를 살아가고 있던 전중윤은 두 살 위의 형이 형수와 함께 전염병으로 쓰러져서 그대로 불귀의객이 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부모님이 계신 강원도로 돌아오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고민하고 달려온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따끔한 충고로 다시 체신부에서 행정관으로서 새 정부의 자재 공급 업무를 맡게 된다. 전중윤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재건을 위한 국가적 사명을 인지하는 순간, 지금이야말로 탄탄한 보험제도 정착이 절실한 급선무임을 깨닫고 동방생명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지만, 꿀꿀이죽이라고 먹기 위해 줄까지 서가며 허기를 채우려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며 보험은 의미가 없는데다 사치스럽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걸고 이루어야 할 일은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하여'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찾아내는 것이라 생각했고 모두가 배곯지 않고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기아에 허덕이는 한국 국민들에게 성금과 기부금 정도의 대책은 어림도 없었고 무엇보다 근본적인 치료 방법이 시급한 상황이었던 그때, 전중윤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을 경유하는 시철 여행에 올랐을 때 일본 호텔 방에서 시식해보았던 라면을 떠올렸다. 그렇게 전중윤은 제일생명 대표 자리를 반납하고 유지 제조회사인 민성산업 주식회사를 인수하여 회사 이름을 삼양제유로 바꾸면서 아직은 라면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험난한 항해를 떠나기 위한 첫걸음을 뗀다.

 

오쿠이는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재해 때도 라면은 비상식량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데다 휴대가 편리하고 오래 보관할 수도 있어 바다나 산에 나갈 때도 좋다는 것을 깨닫고 연구에 몰두한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묘조식품은 전국 인스턴트 라면 콩쿠르에서 품질을 인정받아 식량청 장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고 시판되고 있는 인스턴트 라면 중에서 '묘조맛라면'이 뽑히는 쾌거를 누린다. 한편 전중윤은 본격적으로 라면 제조의 기본을 정비하기 위해 1961년 회사 이름을 삼양공업주식회사로 바꾸게 되고, 이후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이 첫선을 보이기까지 2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갖게 된다. 오쿠이는 삼양식품이라는 회사의 사장이 라면 제조 기술협력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는 내용을 전해듣게 되고, 가깝고도 낯선 나라에서 온 그 사람에 대한 소박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외국에서 기술을 배우러 온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던 전중윤과 오쿠이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1963년 라면 기계설비를 실은 배가 일본항을 떠나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해 9월 15일, 한국 최초의 라면이자 삼양라면의 기념비적인 제1호 라면이 탄생의 축포를 쏘아 올리게 된다. 오쿠이는 삼양식품과 기술제휴를 한 뒤에도 수시로 한국을 방문해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봐주었으며 삼양식품 쪽에서도 종종 오쿠이 가족을 한국에 초대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나갔으며 두 사람은 사업 때문이 아니라더라도 1년에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형제와 같은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대한민국 식탁 위의 혁명이 된 라면은 조리의 유연성, 간편함으로 현대사의 동반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배고픈 시절을 건너온 라면은 인스턴트 식품에 쏟아지는 온갖 비난을 한 몸에 받고, 다이어트와 건강에 해로운 음식의 대명사가 되는 천덕꾸러기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라면 뒤에 한일간의 우정과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함께 탄생하고 성장한 역사가 있음이 놀랍기만 하다. 싼 값만큼의 가치밖에 인정받지 못했던 라면에는 허기졌던 국민들을 향한 한 경영자의 노고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주말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서양의 와인 리스트, 파스타의 종류, 커피의 역사는 그렇게 자세히 알면서도, 출출하면 바로 뜨거운 물 부어 먹는 '우리의 라면'에 그리 무지해서는 안 된다. (중략) 추운 겨울 밤, 보초근무를 교대하고 들어와 페치카의 시뻘건 불에 라면 끓여 먹으며 그렇게 행복해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 라면이 어떻게 군대 페치카에까지 왔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있어야 한다. 라면 값이 싸다고 라면이 가지고 있는 문화사적 가치까지 그렇게 무시하면 정말 안 되는 거다. 양은 냄비에 대충 끓여 먹는 음식이라고 그렇게 하찮게 여겨서는 안된다. (본문 10,11p)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은 경제경영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두 경영자의 실제 이야기와 한국과 일본의 라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수록되어 있다. 이익보다는 국민들의 배고픔을 생각하고 만들어진 라면이었다. 뜨거운 라면 국물을 마실 때 느껴지는 속풀림, 포만감은 아마 그런 경영의 비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잠시 생각해본다. 주말 점심이면 라면을 끓여 먹는 1인으로서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가난한 드라마 주인공이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을 먹고 있는 장면은 빈번하게 사용되는 장면이다. 그 라면은 빈곤과 좌절, 작은 희망과 꿈이 모두 흥축되어 있는데 이는 라면의 문화사와도 너무 닮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했던 그 시절 바다를 건너 한국에 오게 된 라면, 라면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성장과 함께 했던 것이다. 무더운 여름 밤이지만 선풍이 틀어놓고 뜨거운 라면 위에 김치 하나 올려놓고 후후 불어가며 먹고 싶은 날이다. 라면을 땡기게하는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이다. 여전히 라면은 허기진 몸을 위안해주는 최고의 식품이 아닌가 싶다. 

 

(이미지출처: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표지,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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