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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 그곳에 삼악산이 있었다.(본문 9p) 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경사가 완만하고 바위도 적고 아래에 너른 개천이 흐르고 있는 남쪽 면을 복개해 산복도로를 만들면서 생겨난 동네인 삼악동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이 곳은 산복도로 밑에서 올려다보면 수많은 다리만 안 보인다 뿐 꿈틀거리는 긴 벌레처럼 보인다고 하여 삼악동이란 이름을 놔두고 삼벌레 고개라 불렸다. 경사를 끼고 형성된 모든 동네가 그렇듯 재산의 등급과 등고선의 높이는 반비례 했는데, 여기는 주택의 소유자와 거주자의 관계가 복잡해지는 중턱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커다란 은행나무 옆에 말라붙어 못 쓰게 된 우물 앞에 있어 우물집이라 불리는 김순분의 집이 그 중심이 된다.
흙으로 만든 인형을 뜻하는 '토우'의 집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여 서둘러 읽어보게 된 책이다. 소설은 우물집의 주인 아들 은철과 우물집으로 이사오게 된 새댁네라 불리는 작은 딸 원의 우정과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싶었으나, 한 순간 인민혁명당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비극으로 넘어가면서 고통과 슬픔이 책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비로소 토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호기심에 읽게 된 책이었으나 책을 내려놓을 때에는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오랜 여운을 남기는 작품, 바로 <<토우의 집>>이다.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가팔라 모르네
남쪽은 산을 파내고 큰 길을 뚫어
골목마다 채국채국 집을 지었지
그래 봤자 동네 이름이 삼벌레고개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 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본문 331,332p)
우물집 큰 아들 금철은 새댁네 큰 딸 영에게, 작은 아들 은철은 작은 딸 원에게 호감을 갖는다. 일곱 살 동갑내기인 은철과 원은 목숨을 바치는 스파이가 되기로 하고, 두 아이는 어른들의 행동을 조심스레 감시한다. 두 아이는 다른 사람 얘기를 엿들어서 비밀을 알아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려내어 벽돌을 갈아 독약을 만드면서 복수를 감행하곤 했다. 그들을 통해 독자들은 동네 사람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은철은 스파이놀이를 하면서부터 삼벌레고개가 돌연 불길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이는 동갑내기 소년 소녀의 재미있는 일상을 담은 이야기 속에서도 갑자기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조금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스토리 분위기와도 닮아 있다. 스파이놀이로 은철은 영의 아버지가 도둑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들의 수집한 정보로 미루어 봐도 아버지 덕규가 '한 식구'라고 일컫는 무리는 수상쩍었다.
육체적으로도 고달팠고 정신적으로도 고달팠던 스파이놀이에 점점 흥미를 잃어갈 때 쯤 은철은 시간만 나면 새댁네로 뛰어가 은행놀이를 하거나 새댁아줌마가 들려주는 효자 효녀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은 양 소매와 치맛단에 흰 레이스가 달린 빨간 원피스를 입은 인형을 선물받고, 희라는 이름을 붙혀준다. 그렇게 세 딸의 이름은 '영, 원, 희'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졌다.
한편,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칠 일밖에 없는 눈꼴신 아랫동네 부유층 자제들 앞에서 중턱의 소년들은 고난도의 재주와 무적의 용기를 과시함으로써 그들을 주눅들이고 우월감을 맛보곤 했는데, 그날따라 개천가에 유난히 많이 모여든 똘마니들을 보자 가벼운 흥분을 느낀 금철은 은철을 안고 넓은 폭의 개천을 뛰어넘으려 하고, 그 일로 은철은 바닥에 추락하면서 다리를 크게 다치게 된다.
갑자기 '소라 껍데기 속의 안일을 청산하고'라는 오래된 선언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덕규는 지금 자신에게도 저들로부터 몸을 숨길 단단한 껍데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문 251p)
시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김밥을 싸서 산에 가기로 한 새댁네는 아버지 덕규가 이십대 후반의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에게 끌려가게 되면서 무산된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빨갱이 식구들은 당장 동네에서 몰아내는 게 상수라고 했으며, 새댁이 골목을 지나간 후면 언제나 통장집이 나와 소금을 뿌리곤 했다. 그 뒤 새댁 역시 붙들려 갔다가 걷지도 못하고 형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흘 만에 풀려 나왔다.
순분은 두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원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생각했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다고 했지. 눌은 놈 덜 된 놈 찔깃한 놈 보들한 놈. 순분은 그게 마치 사내들에 대한 형용 같다고 생각했다. 서슬이 퍼래서 당장 빨갱이 집을 쫓아내자고 설치고 다니는 통장 박가 같은 놈은 어떤 놈일 것이며, 밤마다 불안감에 사로잡혀 새댁네를 어떻게 내보낼 수 없을까 궁리하는 자기 남편 같은 놈은 어떤 놈일까. 같은 놈일까 다른 놈일까. 눌은 놈도 덜 된 놈도, 찔깃한 놈도 보들한 놈도, 어차피 그놈이 그놈 같았다. (본문 276p)
작가 권여선은 이 작품을 통해 한 가족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을 세밀하게 그리려 했다고 한다.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중앙정보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 그 중 8명은 사형 선고를 받은지 만 하루도 안되어서 형이 집행되었다. 유신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인 인혁당 사건으로 원의 아버지는 그렇게 딸들의 이름처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이 가족이 겪게 된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담담하게 그려진 이야기는 어느 순간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은 그들이 조금씩 일궈놓은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국가폭력에 의해 토우가 되어 캄캄한 무덤에서 살아가게 된 이들, 그들의 고통이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지금은 흐릿해져버린 이야기들, 그래도 그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이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토우의 집>>은 기억해야만 하는 일들을 되새겨보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