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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시 나의 책 - 손글씨로 만드는 나의 첫 시집
박준.송승언.오은.유희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평점 :
'손글씨로 만드는 나의 첫 시집'이라는 부제가 마음에 들어 읽어보게 된 책 <<너의 시 나의 책>>은 독자들이 시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적어보면서 오늘을 떠올리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구상하게 된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은 네 명의 시인의 대표시와 신작시를 수록된 시선집인 동시에 독자들이 자기만의 시를 직접 적을 수 있는 창작노트인 셈인데, 너의 시를 담았지만 나의 책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들에게도, 독자들에게도 굉장히 의미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는 부분을, 또 어떤 시는 전체를 옮겨 적는 일은 모두 당신의 마음이다. 경우에 따라 시의 부분, 부분을 비워두었다. 그곳에 당신의 사연을 적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비어 있던 자리에 당신의 이야기가 담기는 순간, 그리고 그 이야기들로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순간, 당신의 오늘은 당신의 인생이 되고 우리의 시들은 당신의 책이 될 것이다. (본문 8,9p)
시인 오은은 시구를 적는 일, 시 한 편을 백지 위에 옮겨 적는 일은 시간을 잠시 멈추는 일, 글자를 한 자 한 자 적으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 그리고 시의 화자와 스스로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가늠해보는 일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손글씨를 쓰는 일보다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더 많아졌으며, 짧은 메모 조차도 컴퓨터를 사용한다. 메씬을 하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손글씨로 편지를 썼을 때 편지를 받는 친구의 기분도 좋아지지만, 편지를 쓰는 동안 친구에 대한 내 마음도 키보드를 두드릴 때와 달라짐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런 탓에 시구를 적는 일, 시 한 편을 백지 위에 옮겨 적는 일에 대한 오은 시인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나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좋은 떨림이 생긴다.
간혹 시집을 읽기는 하지만 시를 읽을 때는 감성을 충만해지는 듯 하다가도 돌아서면 금새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 시집의 시들은 금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쓰다보면 나만의 시가 되어 마음에 새겨진다. 한 편의 시 옆에는 오롯이 나를 위한 '오늘 나'라는 페이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분에 맞는 시를 찾아 쓰다보면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 시 구절을 내가 완성해야 하는 시도 있다. 마치 내가 시인이 된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구절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롯이 '오늘 나'를 완성하는 시간인 게다.
1년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다
(중략)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본문 190~196p)
좀 길지만 왠지 공감이 많이 가는 시라 한 번 옮겨 담아보았다. 매 월말이 되거나 연말이 되면 느껴지는 공허함이 시 속에서 느껴진다. 이렇게 적다보면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내 시가 되는 기분이다. 내가 4명의 시인과 함께 나만의 시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인해 오늘 하루가 특별해진다. 오늘 나는 어떤 시를 선택해서 그 시를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적어가게 될까? 오늘 하루가 기쁘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너의 시 나의 책>>이 있다면 오늘 하루는 특별한 하루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수많은 책 중에 '나만의 책'이 생겼다.
당신의 오늘, 어떤 하루였나요?

(이미지출처: '너의 시 나의 책' 본문, 표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