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의 기억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동화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폭넓은 집필 활동을 해나가면서 참신한 감각과 세련미를 겸비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독특한 추리 형식의 장편소설 <<등 뒤의 기억>>을 만나보게 되었다. 서정적인 느낌과 상큼한 느낌이 드는 표지 삽화와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의 신뢰도가 합쳐져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가 사뭇 컸다. 더불어 가공의 여동생과 차를 마시면서 6번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히나코로 출발하는 이야기는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공의 여동생이라니? 하나코에게는 어떤 등 뒤의 기억이 존재하는 걸까? 그 신비함에 이끌려 읽게 된 이야기 속에는 기억이라는 것, 상대방을 마음에 품고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가를 느끼게 했다.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끝난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람이 마음을 품고 있는 한 그것은 유효하다. -에쿠니 가오리

 

밀크 티에 비스킷을 적셔서 먹고 있는 쉰네 살의 히나코는 가공의 여동생과 함께였다. 가공의 여동생과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은 그녀들의 어머니와의 기억을 이야기하며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에 빠져있는 그녀에게 옆집 남자가 찾아온다. 심심하면 놀러 오는 이 옆집 남자가 히나코도 싫지않다. 둘째 아들에게 점점 더 오락가락 하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은 히나코는 가공의 인간과 현실 속의 인간이 한 공간에 있을 때에는 현실 속의 인간을 우선시하며 정신 상태를 의심 받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히나코의 이야기에 그녀가 살고 있는 고령자 아파트의 옆집 남자인 단노 류지와 그의 아내 단노 게이코, 5층에 사는 도루코와 그의 아내 게이코의 이야기가 스며든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아내와 태어난 지 6개월 된 갓난아기와 함께 사는 마사나오와 마사나오의 배다른 남동생 마코토와 그의 여자친구 아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갑자기 동떨어진 듯 3학년이 된 아이 나쓰키의 학교 생활이 펼쳐진다. 아빠가 해외로 발령이 나면서 캐나다로 오게 된 나쓰키는 일본인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엄마와 아빠에게도 친구인 드류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고지마 선생님에게만은 털어놓는다. 선생님은 비밀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하고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사연을 털어놓는다. 각각의 인물들과 사연들, 그 어떤 개연성도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스토리를 이해하는데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인물간의 관계가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맞추어질때마다 히나코의 과거와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졌다.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여덟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서서히 맞춰지는 진실의 조각들. 그 조각들이 모인 귀퉁이, 귀퉁이마다 히나코의 그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슬픔이 조용히 스며 있다. 사람이 살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히나코의 방 안, 허망하리만치 고요한 풍경처럼. (표지 中)

 

히나코는 현실속 여동생의 존재여부를 알지 못한다. 히나코는 현실 속에서 행방불명이 된 여동생을 찾으려 한다기보다 가공의 여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택한다. 그런 모습이 히나코를 더욱 고독하고 슬프게 보이게도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추억은 히나코와 여동생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처럼 보였다. 그 기억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어주었고,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히나코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들이 가진 기억에 대한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누군가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과거의 내가 만든 모습이다. 과거의 시간이 만들어낸 후회와 그리움이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했던 기억에 의존해 사는 히나코,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증오하는 한편 그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사나오, 과거에 얽매여 히나코 주변을 맴도는 단노,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에 간 열두 살 소녀 나쓰키가 만난, 어딘가 비밀을 가진 듯한 고지마 선생님. 그들이 가진 기억의 파편들과, 그 안에 담긴 후회와 두려움, 그리고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출판사 서평 中)<<등 뒤의 기억>>은 그렇게 독자들 각자의 잃어버린 추억과 마주하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이었다.

 

과거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의 무덤에서 헤어나와 현재의 삶을 뒷받침할 때다. 얘기들이 하나둘 맞물려 등장인물들의 연결 고리가 원의 중심에 모였을 때, 현재의 히나코에게 내민 손, 그 손을 마주잡는 순간 뒤로 밀려났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고 히나코의 삶은 소설의 지평을 떠난다. (본문 202,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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