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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너무나 피곤한 아침이다. <<지옥계곡>>은 우연히 인터넷서점에서 보게 된 책이었는데, 스릴러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지 삽화와 제목에 일찌감치 찜 해 놓은 책이었다. 책을 받고 내일 출근을 위해 초반부만 읽어보겠다고 시작한 독서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서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음은? 그 다음은? 이 궁금증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나니 이미 새벽이다. 책을 읽는동안은 그 흡입력에 피곤한 줄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부족한 잠에 피곤함이 몰려온다. 그래도 궁금증에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에 피곤함을 날려보내버렸다. 정말 굉장한 흡입력을 가진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2009년 12월 1일 지옥계곡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여자가 악몽으로 가득한 수많은 밤의 기억 속에 낙인찍힌 길에 등산객들을 위해 세운 위험 표지판을 무시하고 자신을 뒤로 밀어내려는 바람과 등반을 어렵게 하는 눈보라에 맞서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계곡 높이 걸쳐진 다리위에 도착하더니 제일 아래쪽 가로대에 올라서더니 난간을 놓았다.
산악구조대원인 로만 예거는 겨울 시즌 동안 생각 없는 관광객들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는 문을 닫고 사무실에 열쇠를 가져다둘 생각이었으나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무시하지 못하고 따라갔다가 난간에 있는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로만을 발견한 여자는 공포와 경악으로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지만 로만이 재빠르게 여자의 오른손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러나, 여자는 공포와 경악으로 가득한 눈으로 손을 빼려고 비틀었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가득한 좁은 강에 떨어졌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여자의 눈을 로만을 잊을 수가 없다.
갑자기 로만의 손이 텅 비었다. 아주 잠깐, 계곡 허공에 떠 있는 듯하던 여자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암벽에 튕기며 추락하면 몸은 뾰족한 산마루에 다시 한번 부딪혔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가득한 좁은 강에 떨어졌다. 숨이 멎은 몸을 물결이 쓸어갔다. 사체는 저수지 모퉁이를 돌아 거품이 나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본문 19p)
그 시각, 절친이었던 라우라와의 소원해진 관계로 막막하고 슬퍼하는 마라에게 라우라로부터 "위로!"라는 단문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후 마라가 들은 건 라우라가 예전에 그룹 친구들과 함께 갔던 그 계곡에서 자살했다는 소식 뿐이었다. 이제 스토리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여자의 눈이 지워내지 못하는 로만, 그의 딸이 자살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는 그녀의 부모, 그리고 라우라의 자살을 둘러싼 친구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통해 라우라의 비밀을 파헤쳐가기 시작한다. 라우라의 아버지는 자살로 확신하는 경찰을 대신해 탐정을 고용하기로 마음먹게 되고 탐정은 라우라의 친구들과 로만을 지켜본다. 딸의 죽음에 함께했던 로만을 장례식에 초대한 라우라의 어머니로 인해 로만은 그녀의 두려움 가득했던 눈을 지우고자 참석하게 되고, 그것은 그녀의 친구 마라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마라, 그리고 탐정의 만남으로 로만은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탐정을 통해 마라의 과거가 하나씩 드러나게 되는데, 작가는 라우라가 자신의 죽음으로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친구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그려내고 있다. 친구이자 연인이었음에도 그 고통을 외면하려고 하며, 자신의 죄를 애써 부인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비밀이든, 거짓이든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친구, 여인의 죽음보다 우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라우나의 죽음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에 중첩적으로 수록되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한 군인의 이야기다. 도대체 그는 왜 라우나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에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등장하게 되는걸까? 라우라의 과거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군인의 관계도 드러나게 되고, 더불어 라우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할 친구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면서 이들은 코너에 내몰린다. 긴박한 상황에 손에 땀을 쥐게되고, 내가 모르고 있을 또다른 진실을 쫓는 흥분에 나는 지옥계곡의 난간을 붙들고 서있는 아슬함을 느끼게 된다. 그 아슬함 속에서 거듭되는 반전, 그리고 추악한 인간의 악으로 나의 내면이 벌거벗겨지는 기분도 함께 맛본다. 내 속에도 그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거짓, 이기심을 감추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
"그날 밤 나는......친구라고 믿었던 이들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똑똑히 보았고요. 그들은 되도록 자신에게 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만, 그래서 이 난관을 벗어나려고만 했죠.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나도 그들과 똑같다는 걸...깨달은 순간이었어요." (본문 152p)
호기심을 이끌며 강한 흡입력으로 빠르게 읽어나갔던 <<지옥 계곡>>이지만, 사실 아쉬운 점도 약간 있었다. '비슷하게 들리는 이름'으로 엮어가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버린 듯한 부분이 살짝 안타깝다. 노련한 경찰다운 모습이 포착되었다면 더욱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 탓에 누군가는 그 장면을 노련미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어쨌든간에, 전반적인 이야기의 구조나 탁월한 심리묘사, 강한 흡입력, 호기심을 일으키는 스토리 전개 등으로 기꺼이 덮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책에 흠뻑 빠져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뛰고 있는 심장의 쿵쾅거림이 정말이지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미지출처: '지옥계곡' 표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