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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의 목적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단숨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한 때 <sex and the city>를 재미있게 보던 때가 있었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네 명의 여자들의 성 담론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 묘한 일체감을 느꼈다고 해야할까? 사실 주인공들은 미혼여성이었고, 나는 기혼여성이었음에도 같은 여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공유한다는 느낌이었고, 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서 나와 다른 이들의 생각과 생활을 엿보는 것도 참 즐거웠다.
2012년 일본 KTV12부작 드라마로 방영된 바 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 연애소설의 여왕 다나베 세이코의 원작소설 <<침대의 목적>>이 일본판 'sex and the city'라고 하여 호기심이 느껴졌다.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은 영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로 익숙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은 처음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나이 40인 나에게 침대의 목적은 'HAVE A 굿잠'이 전부다. 회사와 집안 일로 지친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건 가족이지만,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건 침대일게다. 지친 몸을 침대로 내던졌을 때의 그 편안함은 일상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듯하다. 침대는 나에게 그런 의미지만, 일본판 'sex and the city' 그리고 <<침대의 목적>>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야릇함 또한 즐겁기만 하다.
"침대는 어땠어?"
"그런대로 괜찮았어."
"혼자 자기엔 너무 넓지?"
"가끔 혼자 자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고."
"허세 부리기는. 거짓말인 거 뻔히 보이거든. 억울하면 너도 누구랑 같이 한번 자보시든가." (본문 8p)
서른한 살 싱글인 와다 아카리와 그의 절친 야마나 요시코의 전화 통화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첫 시작부터 '침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대번에 상상하게 한다. 결혼을 꿈꾸지만 마음같이 안되자 아카리는 남자를 찾기보다는 우선 남자가 생겨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을 갖추기 위해 침대가 있고, 욕조가 있는 원룸을 구입하고야 만다. 아카리는 이것으로 '좋은 여자' 스타일의 상차림을 완성한 셈이다. 아카리는 부모님 집에서 살기 때문에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느끼는 요시코와 '남자를 이해하는 내조 잘하는 여자'라는 인생의 기본 노선을 정해놓기까지 했는데, 일본과의 문화적 차이인지 아니면 세대간의 차이때문인지 몰라도 서로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친구들과의 이런 대화들이 내게는 조금 낯설면서도 신선한 느낌이었다.
'정성 들인 침대에서는 정성 들인 정사를' 이라고 나는 살며시 말해본다. (본문 22p)
이쯤되면 아카리에게는 침대의 목적이 무엇인지 답이 나온다. 그녀에게 침대는 '남자' 이자 '결혼'이다. 그렇게 정성 들인 침대로 상차림을 완성한 아카리에게 느닷없이 2~3년 전에 잠깐 장난삼아 만났던 대학생 야마무라 후미오의 전화가 걸려오게 되는데, 연하남인 후미오는 이미 읽어버린 소설의 페이지를 다시 들추고 싶어 하지않는 아카리와 달리 오직 그녀와 함께하고 싶을 뿐이다. 아카리 주변에는 후미오 외에도 같은 직장에 다니는 잘생겼지만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우메모토와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데 능력이 있는 유부남인 스미타니가 있다. 아카리는 우메모토를 친구 요시코에게 소개하지만 처녀가 싫다는 우메모토와 처녀성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요시코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카리는 우연한 기회에 옆 건물 수학 강사인 규타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연애와 침대를 동일시하는 아카리와 달리 규타는 지금껏 만나왔던 남자들과 다르게 아무것도 없는 강변에서의 평화로운 휴식을 원한다.
"그쪽이 '갈까'라고 하시기에 영락없이 호텔이구나 했어요."
"저, 저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한텐 그런 말, 못합니다. '갈까'라는 둥..."
그 침대, 둘이서 쓰기엔 좁을까? 하지만 그 침대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빨리 둘이서 침대를 써주길 바라고 있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본문 343p)
<<침대의 목적>>은 남자를 원하고 결혼을 원하지만 결코 초라해보이지 않는 서른한 살의 여성을 통해 연애와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카리와 요시코와의 대화를 비롯하여 우메모토, 후미오 등과의 대화는 연애관이나 결혼관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데다, 모순적인 여자의 마음도 잘 표현되어 있다. 여성에게는 성욕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나, 유부남인 스미타니와의 대화 등을 통한 노골적인 표현도 거침없이 쓰여졌다.
연애, 결혼관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가진 등장인물들은이 현 미혼여성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결혼 16년 차인 나와는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거리감보다는 재미있게 다가온 듯 하다.
가족이라는 건 현실 그 자체다.
하지만 올드미스란 꿈 그 자체라고.
올드미스와 가족은 양립할 수 없어! 대발견을 이루었다. 만일 양자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올드미스는 가족에 의해 철학적 발견을 강요당한다는 점, 단 한 가지일 것이다. (본문 198p)
노골적인 표현이 서슴치 않았던 스토리와 달리 결말은 좀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느낌이 엿보인다. 아카리와 큐타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두었지만, 결국 결혼이나 연애는 욕망을 가진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은근슬쩍 깔아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으로 다가온 남자, 전혀 성적 매력이 없지만 자상한 남자,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바람둥이인 남자를 통해 남자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결국 아카리가 선택한 남자는 이들이 아니었다. 결국 연애나 결혼이 침대에서 비롯되면 안 된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스턴트식 사랑이 난무하고, 욕망에 의한 사랑의 모순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등장인물을 통해 독자 스스로에게 자신의 연애, 결혼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일본판 'sex and the city' 를 표방하기에는 조금 아주 조금은 무리가 있는 듯 하지만 연애와 결혼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거침없이 잘 표현한 신선함, 여성의 심리를 잘 드러냈다는 공감대 형성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