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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 ㅣ 푸른도서관 50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5월
평점 :
신작이 출간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읽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작가가 있다. 이금이 작가는 내게 바로 그런 작가이다. 작가 이름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신뢰를 느낄 수 있는데, 이번 <<신기루>>는 나에게 더 특별한 작품이다. 이유인 즉, 주인공 다인이가 내 딸과 너무도 꼭 닮아있는데다, 다인를 대하는 엄마의 모습 역시 나와 너무도 흡사하여 지금까지 읽어본 책 중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주인공 다인이와 열다섯 살 동갑내기인데다, 연예인 팬픽 카페에 글을 쓰는 것도 닮아있다. 쓰는 것도 모라자, 시간이 나면 주구장창 다른 사람이 쓴 팬픽도 열심히 읽는다. 그 모습을 보는 엄마의 심정은 화산이 터지기 일보직전과 비슷하리라.
한창 사춘기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는 중2 딸과의 대화는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나마 열심히 하던 공부도 이제는 아예 나 몰라라~하고 있으니, 요즘 사춘기 딸을 둔 엄마, 나의 심정은 그야말로 좌절 그 자체다. 내려놓자, 내려놓자...마음을 다잡아봐도 쉽게 내려놔지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식에 대한 욕심이가보다.
아이들은 알까? 엄마도 10대라는 청춘이 있었다는 것을. 늘 공부해라~ 잔소리하는 것도 그 청춘에 꿈꾸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실패를 일깨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자신의 꿈이나 인생보다는 아이들의 꿈과 인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나는 기억하고 있나? 나도 연예인을 좋아하던 열다섯 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신기루>>는 1부,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열 다섯살 다인이가 화자가 되고, 2부에서는 엄마가 화자가 되어 여행지에서 느끼는 깨달음을 수록하고 있는데, 엄마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는 다인이,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응어리와 아들을 의사나 교수를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진 엄마 숙희의 이야기가 사막의 '신기루'를 통해서 얽힌 실타래를 풀어간다.
고등학교 문학 동아리 친구들과 해외 여행을 가는 엄마를 따라 몽골로 여행을 따라가게 된 다인이는 여섯 명의 아줌마들의 주책스러움에 창피함을 느낀다. '듣보작가' 서영 아줌마, 아들이 올해 카이스트에 붙었다는 '카이스트' 주희 아줌마, 논술 교사로 떼도을 번 '대박논술' 인경 아줌마, 남편한게 배신 당한 '바람맞은' 경화 아줌마, 실적 못 올렸다고 푸념하는 보험 설계사 '실적미달' 정순 아줌마' 그리고 엄마는 슈퍼울트라 '아들바보'다. 몽골 여행이 불만 투성이었던 다인이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지노 오빠와 닮은 가이드 바뜨르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잘생긴 바뜨르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섯 아줌마들의 주책스러움에 다인이는 더 화가 난다. 여행 중 다인이는 엄마가 제일 먼저 작가가 될 줄 알았다는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만, 가정통신란에 글 몇 줄 쓰는 것도 끙끙거리는 엄마가 작가가 될리 만무하다. 할 줄 아는 말이라고 공부해라와 돈 없다는 것뿐인 줄 알았던 엄마가,
"내가 저 초원 위를 말 타고 달릴 거 생각하니까 막 가슴이 뛰는 거 같다." (본문 70p) 라는 뜻밖의 말과 별을 보며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작은 일에 감탄하고 감사할 줄 아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된다.
빈정거리듯 말하고, 늘 부루퉁한 얼굴과 말투를 하는 다인이는 속을 긁어놓는다. 저는 다 잘하는 줄 아는 다인이를 보며 엄마, 숙희는 화를 꾹 눌러 참는다. 바뜨르는 다인이에게만 호감을 준 인물이 아니었다. 아줌마들에게도 나이를 잊고 여고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바뜨르의 부재는 열여덟 살에서 곧바로 마흔다섯 살이 된 것처럼 당황스럽고 억울함을 주었다. 사라진 시간에 대한 허망함, 지금 숙희가 느끼는 그 허망함은 사막의 신기루같다. 얼마전 자궁암 초기 진단을 받은 숙희는 열여덞 살 늦가을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에 대한 증오, 엄마로 인해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벗어버린 자신, 엄마의 부재로 인해 받은 상처를 치유해 준 아들 형인을 떠올린다. 숙희는 함께 꿈꾸었던 작가가 된 춘희보다는 아들을 카이스트에 보낸 주희가 더 부럽다. 그러나 여행을 통해 숙희는 삶의 목표가 흔들리게 된다.
"모래 언덕에서 봤을 때는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기만 했고, 길 잃어버렸을 때 신기루를 두 번 봤잖아. 그때마다 진짜 호순 줄 알고 막 좋아했다가 아니라서 엄청 실망했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속임수 같아서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진짜 호수를 만나고 길도 찾고 나니까 만약에 그때까지 신기루를 한 번도 못 봤으면 어떻게 불안하고 무서운 걸 참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리고 엄마, 그런 일 아니더라도 사막에 신기루가 없으면 더 지루하고 심심할 거 같지 않아?" (본문 201,202p)
엄마한테 늘 부룽퉁한 얼굴을 보이는 다인이가 원하는 건 엄마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이제 숙희는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의 목표가 헛된 것임을 깨달아가는 숙희의 내적갈등 역시 신기루와 맞물려있다.
사막의 신기루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눈 앞에 펼쳐진 듯 하지만 결국 허상 그 자체다. 우리네 삶도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삶이 목표라 생각했던 것이 결국 허상일 때도 있으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회를 잡을 때도 있는 법이다. 길을 잃었을 때처럼 막막하고 두려울 때가 있지만, 신기루가 아니었다면 불안하고 무서운 걸 참지 못했을 거라는 다인이의 말처럼 희망은 존재한다. 막막해져 버린 숙희의 삶에도 분명 희망은 존재할 것이다.
다인이와 딸은 너무도 닮아 있다. 연예인을 좋아하고 팬픽을 쓰는 동갑내기, 공부 외에는 모두 쓸데없는 거라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 다인이가 열일곱 살이었던 엄마의 꿈과 작은 일에도 감탄할 줄 아는 감수성을 알게 되면서 엄마와의 교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신기루>>는 나와 딸의 교감을 느끼게 해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역할을 해준 듯 싶다. 한창 연예인을 좋아하던 열다섯 살의 내 모습을 기억해내면서 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딸에게도 숙희의 모습이 엄마인 나를 조금이나마 이해해주는 기회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분명 그리해줄 것이다.
"고비에 사는 유목민처럼 살믄 욕심 부릴 것도 아등바등 살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내는 집에 가믄 쓸데없는 것들 싹 다 버릴끼다. 집 안 꽉꽉 채워 놓은 기 다 욕심덩어리들인기라." (본문 183p)
이제 내 속에 꽉꽉 채워 놓은 욕심을 내려놓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