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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평점 :
이 작품 <<아주 오래된 농담>>은 2000년 가을에 출간한 고 박완서님의 장편소설로 출간 10주년을 기념한 개정판이다. 10년 전의 작품이지만 이야기나 구성에 촌스러운 면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본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저자는 심영빈을 주축으로 하여 두 가지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매제 송경호의 죽음을 통해 돈과 권력이 인간의 죽음에까지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한가지는 심영빈의 불륜을 통해서 결혼생활의 일탈과 사랑을 논한다.
의사인 영빈에게 한광, 유현금은 오랜시간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일이등을 다투어 무심할 수 없었던 한광과 ’의사’라는 같은 꿈을 꾼 그들 앞에 ’느네들 둘 다 의사 될 거라면서? 잘났어. 난 훌륭하고 돈도 많이 버는 의사하고 결혼할 건데. 약 오르지롱. 메롱’ (본문 12p), 하고는 분홍색 혀를 날름 드러내 보이곤 나풀나풀 멀어져 간 현금은 영빈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스럽고도 감미로운 떨림을 주었는데, 영빈은 이 사건 이후로 육 학년 때 딱 한 번 같은 반인 이후로 만난 적 없는 이들의 존재를 잊지 못하고 살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 노릇을 해야했던 형의 미국 행, 유복녀로 태어난 동생 영묘, 어머니가 그어놓은 금을 한 번도 우회하거나 이탈하지 않고 수월하고 반듯하게 걸어간 영빈.
현금에 대한 벽을 넘지 못한 채 결혼을 하게 된 영빈은 모교에서 박사가 된 후, 우연찮게 병원에 방문한 현금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일탈을 시작하게 된다.
반면 재벌로 알아주는 Y건업의 재벌아들 경호와 결혼하게 된 영묘의 시집살이는 영빈에게 측은함을 주었는데, 매제 경호의 병으로 영빈은 권력과 돈이라는 씁쓸함을 맞보게 된다.
송 회장이 나한테 찰싹 붙어앉아서 화면 속 명사들의 쟁쟁한 사회적 지위를 브리핑하는 건 정말 참아내기 힘들었어. 장례식 때도 조문객들이 들고 날 때마다 나한테 귓속말로 알은체하던 바로 그 짓거리를 또 하는거야. 그 많은 명사를 그러모은 걸 생각하면, 왜 그들이 와주었나에 상관없이 그냥 좋기만 한가 봐. 어떻게 그런 끔찍한 천격하고 사돈을 맺게 됐는지. 이번엔 그 사람들의 신상이 일 년 동안에 어떻게 부침했나까지 추가되는데, 그걸 그렇게 빠삭하게 꿰뚫고 있다는 걸 왜 나한테 과시하고 싶어하는지, 그건 존중도 친애감도 아닌, 재계나 정계에 연줄이 없는 문외한에 대한 연민과 경멸을 겸한 게 분명했는데도 박차고 일어나질 못했어. (본문 282p)
사람의 생명조차 권력과 돈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듯한 송 회장의 모습이 치졸하게만 보여진다. 돈 때문에 아들과 며느리까지 속이는 송 회장의 모습을 보면서 돈과 권력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해로움을 주고 있는가를 실감했으며, 장손에 대한 집착과 돈 욕심을 가진 이들이 결국 장손을 버리고 돈을 지켜낸 것을 보면서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반면, 현금과의 불륜 속에서 사랑을 느끼는 영빈은 아내의 임신을 통해서 사랑이 가지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마음을 다한 진실한 사랑의 현금, 마음이 아닌 현실에 순응하기 위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서로 다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진실과 위선이 공존하는 영빈의 사랑은 위태롭고 안타깝기만 하다.
처음 영빈의 과거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현금과의 달달한 로맨스를 통한 결혼 생활의 일탈 그리고 사랑에 대해 논하는 가벼운 내용일거라 지레 짐작했으나, 돈과 권력이 사람의 생명까지도 쥐락펴락하려는 삶의 무기력함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상처 입은 우리네 삶을 헤집고, 악을 쓰고, 쓰다듬고 핥아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억압된 것을 불러내고 재통합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본문 365p)
현실의 얽힘을 풀어주려 애썼던 박완서 작가님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