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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놀이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1월
평점 :
작년 연말 조정래 작가님을 직접 뵌 일이 없었다면, 나는 조정래 작가의 작품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륜에서 보여질법한 선입견과 <한강><태백산맥>과 같은 대작을 쓰는 저자의 글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의 선입견과 달리 유쾌한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서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그렇게 처음 읽게 된 작품이 <허수아비춤>이었다. 작년 한해 서점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작품답게 놀라운 흡입력이 압권이었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의 비리와 정치,언론 등의 추악함이 허구를 통해서 잘 표현되어있어 조정래 작가의 또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 기대감이 커졌다. 그렇게해서 읽게 된 작품이 바로 이 책 <<불놀이>>다.

<<불놀이>>는 1982년 문예지에 발표했던 네 편의 중편소설 <인간 연습><인간의 문><인간의 계단><인간의 탑>을 장편소설로 묶은 책으로 1997년 영어판, 1999년 프랑스어판, 2005년 독일어판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현재 중국어와 스페인어로 번역 중에 있다고 하니,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뛰어남은 구지 말할 필요가 없을 듯 싶다. 30여 년전에 기록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내용이나 구성면에서도 현대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여순반란사건과 6.25전쟁을 바탕으로 한 살육과 복수를 다룬 이야기라 결코 유쾌하지 않은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흥미롭게 진행되어 재미있게 읽어내려 갈 수 있었다.
"배점수 씨, 당신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본문 40p) 라는 한 통의 전화로 황복만 사장은 29년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쉽아홉살의 황복만은 절반은 배점수로, 그 나머지 절반은 황복만으로 살면서 철저하게 배점수라는 인물을 숨겨왔지만, 험악한 기억들이 무시로 불쑥불쑥 나타나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스스로를 황복만이라 주문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그의 숨겨둔 과거를 알고 전화를 건 신범호로 인해, 황복만 아니 배점수는 두려움과 충격으로 병이 악화되었고, 자신이 애써 지우려던 과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버지 어머니의 원수때문에 전화를 건 신범호는, 황복만의 장남 황형민에게도 전화를 걸어 최소한 아버지의 진실을 알아야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아버지의 과거를 확인토록 한다.
심봉산이라 불리며 신씨 문중 사람들이 사당만큼이나 떠받드는 영험이 큰 산아래 자리를 잡은 신씨 집안은 지주라는 사실을 앞세웠고, 이에 힘없고 못가진 점수네는 그들에게 꼬리를 사타구리 사이로 말아 넣고 빌빌거리는 겁 질린 강아지꼴을 면하지 못했다. 점수는 동생 순월이가 몹쓸 짓을 당하자 보복을 하게 되고, 점수의 성깔을 염려한 아버지에 이끌려 대장장이가 된다. 그런 점수에게 다가온 방 선생은 점수에게 빨강물을 들이고, 결국은 점수는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38명을 죽이는 살육을 하게 된다.
점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되풀이해서 듣게 되면서 차츰차츰 자신이 정말 장하고 큰일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굳혀져갔다. 그때는 분을 견디다 못해서,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사사로운 분풀이 때문에 저질렀던 일들이 뜻밖에 영웅적 투쟁으로 변하고, 혁명의 기수로 변모하는 바람에 점수는 은근히 아랫배에 힘이 짱짱하게 오르고 항시 주눅들어 오그라들기만 하던 어깨가 슬슬 펴지는 것을 느끼며, 나모르게 세상 살맛을 생전 처음으로 쇠고기 등심살을 씹듯 즐기게 되었다. (본문 42p)
노동자 농민들의 해방과 양반이나 지주 계급을 처치할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살육과 광기로 보냈던 것도 잠시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된 점수는 아내의 죽음과 충격으로 바보가 된 아들을 등지고 새로운 인물 황복만이 되어야만 했다.
신범호의 전화로 아버지의 과거를 쫓아 아버지의 고향 전라도 횡정리에 가게 된 형민은 이러한 사실을 들으며, 그들의 가슴 속에 담겨진 한(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이복형 칠성을 만나게 되면서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한이라는 것 - 그것은 무엇일까. 마음의 깊은 상처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거기에 무언가가 더 보태져야 될 것 같은 그것, 형민은 알 듯 말 듯한 감정으로 한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본문 181p)
아버지가 꼭 그렇게 많은 죽음을 죽여야 했을까.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천민의 서러움과 공산 혁명과를 구분하지 못 한 것은 너무도 빤한 사실이다. 천민으로서 대장장이 일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서러움은 그렇게도 큰 것이었을까. (본문 189p)
신범호라는 이름으로 전화를 걸었던 찬규는 남편의 죽음과 배점수에 당한 고통으로 평생을 가슴에 한이 맺힌 채 살았던 어머니의 유언으로 배점수를 찾았다.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로 그려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성적인 그는 배점수의 철저한 변신을 꾀한 뻔뻔스러운 생존을 미워했지만, 그가 이룩한 엄청난 경제적 성공은 결코 질투하지 않았고, 전 시대에 일어난 일이기에 저지른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도록 했다. 천천히 배점수에게서 죄책감과 두려움을 끄집어 내었고, 그를 망령들 앞으로 보내려 했다.
배점수, 황형민 그리고 신찬규 세 인물을 통해서 그려지는 과거의 모습은 살육과 광기만이 가득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지주 집안에서 억눌리며 살아야했던 배점수의 한은 학살과 반란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결국 죽은 자들과 가족들의 한으로 남는 악순환이 된 것이다. 찬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풀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비록 봉건제도로 인해 신분과 재산때문에 억눌리고 핍박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들의 한이 점수의 살육으로 드러나고 있으나, 살육이나 광기는 그 어떤 이유로도 보상받을 수 없으며, 또다른 한을 만들어내는 악순환만 남게 됨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아픔을 가진 것은 배점수에게 고통을 받은 가족보다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했던, 결코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없었던 점수의 큰 아들, 칠성이가 아니었나 싶다.
지주 계급이라는 이유만으로 없는 자들을 핍박했던 신씨 집안, 그 고통에 한을 갖게 된 점수와 그의 여동생 순월 역시 봉건제도가 가져온 피해자였다. 자식을 갖지 못하게 된 순월은 결국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했으며, 그 한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신씨 집안에게 쏟아졌던 게다.
갖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던 한을 광기와 살육으로 나타난 아버지, 그 아버지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어야 했던 어머니, 죽어가는 어머니를 보며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못한채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았던 칠성을 누가 헤아려줄 수 있을까?
칠성은 자신의 한을 풀려고 했던 이들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물이 아닐까 싶다.
한 풀이, 한 맺음의 악순환은 계속 되고, 이러한 한 풀이는 또다른 칠성이를 낳게 될 것이다. 찬규의 말처럼 서로의 한풀이를 통한 유치한 논법으로 인해 칠성은 가장 고통 받았으며, 이런 논법이 계속 된다면 역사의 악순환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
신씨 집안으로 인해 갖게 된 마음 속의 한이 또 다른 한이 되어 고통 속에서 산 배점수, 배점수로 인해 마음 속 한을 갖게 된 신씨 집안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악다구니에 가장 큰 한을 안고 살게 된 칠성. 이들 모두 역사 속의 피해자가 아닌다 싶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용서하진 않지만 내 입장에서 미워하지도 않소. 왜냐하면 당신 아버지가 처했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이오. 이 말은 우리 신씨 문중이 저지른 횡포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것이오. 그러나 당신 아버지가 자행한 행위는 분명 옳지 않았고 용서될 수 없는 일이오. 당신 아버지의 논법대로 한다면,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당신 아버지는 이제 누구의 손에 찔려 죽어야 되는지 알겠소? 바로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손이오. 이 얼마나 유치한 논법이오?" (본문 417p)
(이미지출처: '불놀이' 표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