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정규웅 지음 / 이가서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연말에 조정래 작가님을 만난 적이 있다. 집필하는 작품마다 좀 난해한 느낌이 많았던 데다가, 풍기는 외모에서 굉장히 고지식한 분일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자상하면서도 유머러스하여 만난 그 순간 저자의 팬이 되어버렸다. 
독자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 혹은 외모를 통해서 저자에 대한 크고 작은 편견을 갖곤 한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저자와 사이버 상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각종 방송매체를 통해서 저자의 실생활이나 생각 등을 엿볼 수 있어서 저자의 인간적인 면을 많이 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에세이를 통해서 작가의 모습이나 작품의 뒷 이야기 등이 많이 공개되고 있어 책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70년대는 어땠을까? 인터넷도 없고 작가와의 만남이 활발하던 시기도 아니였던 그때는, 책을 통해서 저자와 만나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가끔 드라마 혹은 책 등에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닌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접하게 되는 뒷이야기를 듣다보면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재미와 감동이 1970년대 문학기자 일을 시작하면서 저자가 겪었거나 느꼈던 문단의 뒷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이 책 속에 담겨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황석영 작가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교과서에서 많이 접해왔던 박목월, 박두진, 김동리의 모습 등 그들의 사생활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의 작품 못지않게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어, 읽는내내 상당히 흥미로웠다.
문인들의 발걸음이 비교적 잦았던 청진동 뒷골목의 풍경 속에는 ’문당통’이니 마당발이니 하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한국문단 전체를 꿰뚤혹 있는 이문구가 있었고, 그들 사모하는 사람은 여자 뿐만 아니라 ’이문구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느닷없이 청진동을 찾는 지방문인도 있었다.
1970년의 청진동은 문인들에게는 고향과는 같은 곳이라고 하는데, 많은 문인들의 그리움이 있는 곳이자, 문학을 토론하고, 실천적 의미를 함양하고, 구체적 방법론을 분석하고, 신념과 투지를 확인했던 간판 없는 회관이자 전선의 영내였다고 이문구는 말했다고 한다.

죽은 누나를 생각하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며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끼적이는 게 전부였던 박용래,
정치체제가 살벌하고 시대는 암울했지만 문단 친구들에게 푼돈이나 얻어 술만 마시며 세상을 낭인처럼 살아가던 천상병은 실종으로 인해 뜻하지 않는 유고시집을 친구들에 의해 발간하게 되었는데, 실은 술에 취한 채 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유고집에 담겨진 뒷이야기가 꽤나 황당하면서도 유쾌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아무래도 현존하는 작가들의 그 시절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데뷔 초기인 70년대 초부터 ’황구라’라는 애칭으로 통했는데, 특유의 재담실력 뿐만 아니라, 약장수 열두 마당, 신파극 변사 흉내, 각종 중계방송 시늉, 성교육 강연 뿐만 아니라 꼽주춤, 각성이타령에서부터 동서양 유명 배우들 흉내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고 한다.
초기 대표작인 <객지><삼포 가는 길> 등 노동자의 밑바닥 삶을 그린 작품들이 열정적인 현실체험의 소산이라고 하니, 그의 집념은 정말 대단했던 듯 싶다.
젊은 시절에도 낡은 작업복을 아무렇게나 입은 데다 머리와 수염을 자랄 대로 자라고 온몸에 땟국이 흘러 깊은 산속에서 오랜 세월 도를 닦다가 방금 속세에 내려온 도인의 풍모를 가져 ’제3의 기인’이라 불렸던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던 이외수 작가와 '술-병고-가난’의 악순환으로 ’어지러웠던 시대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고 아들 김훈은 아버지 김광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으며, 가난으로 아버지의 묘지를 할부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반세기에 걸친 우정을 나눈 김광섭과 이헌구, 명동이 살아있는 전설 이봉구, 병상에 누워서도 글을 쓴 유주현 등의 작가들의 뒷 이야기와 70년대 가장 빛났던 작품 별들의 고향, 성의 개방 시대를 연 겨울 여자 등 작품에 대한 뒷 이야기도 흥미롭다.
’감성의 천재’라 불렸던 최인호는 한국문학사상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면서 동시에 ’상업주의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고, 한동안 연예계에 은밀하게 나돌던 스캔들과 닮아 있던 김승옥의 재기작품 과 이 책의 저자 정규옹과의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박범신의 신춘문예 당선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책 속에 숨겨졌던 작가와 작가의 삶이 흥미롭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학 활동에 제재가 많았던 1970년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꿋꿋했던 문인들의 모습이 간과해서는 안된다.

첫날은 몽둥이로 전신을 난타당하고 이튼날은 그 멍들고 부은 몸뚱이 위 군복을 벗기고서 내복 위로 ㅅ싸릿대가지를 후려치면서 내 몸 마디마디를 자근자근 후려갈겼다. 싸릿대로 순등을 맞기도 했는데 손톱이 터져 끈끈한 피가 엉겨 붙기도 했다. 셋째 날은 어느 방에 불려가 다수의 수사요원들로부터 무지막지한 구둣발 세례를 받아야 했다. (본문 130,131p)

’현실 참여’의 문학을 추구할하는 입장에서는 소재나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했던 그때,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문학이 존재하고 있고, 현재의 작가들이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듯 하여, 가슴이 뭉클해진다. ’뒷 이야기’라는 말로 70년 대 문학과 문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 시절 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가 더 크게 전달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문학적인 감성으로 시대를 이해하려하고, 시대를 바로잡으려 했던 그들은 때로는 좌절로, 때로는 환희로 우리나라의 문학을 이끌어 왔으니 말이다.
’문학을 하려다 하려다 안 돼 문학기자가 되었다’는 저자는 그들과 함께 문학 속에서 호흡하며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한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70년대 문학을 이끌었던 이들이 있기에 다양한 소재와 표현이 담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나 역시도 감사함을 전한다.
시대는 변했지만, 그 시절 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학의 열정은 변하지 않았고, 이들의 열정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작가들에게도 귀감이 되리라 생각된다. 문학의 발전은 70년대 문인들이 만들어놓은 튼튼한 기반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