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 마로니에북스 35
미시마 유키오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예상 외로 재밌는 책이었다
제목이 좀 고리타분 하고 미학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지루할 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문장력이 장난 아니다
아주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하긴 1956년에 발표한 책이니 현대적인 게 당연하지
제목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이 소설이 아주 옛날식 문장일 거라 생각했다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로부터 문장력이 훌륭하다는 칭찬과 함께 문단에 추천됐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이문열의 소설을 보는 기분이다
문득 이 소설가가 꽤 잘 생겼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본 가서 금각사를 봤는데 아주 멀리 떨어져서 봤다
연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형태만 봤다
1950년에 절에 사는 어린 스님이 커플끼리 절에 놀러 오는 거 보고 질투심을 느껴 금각사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 후로 아예 접근을 통제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 멋진 절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생각만큼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금각사" 라는 소설 때문인지 왠지 모를 신비감을 주는 절이었다
아빠가 "금각사" 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책을 읽지 않은 나도 덩달아 감동하면서 절을 봤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나"는 스님인 아버지에게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깅가쿠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말더듬이라는 불구를 안고 살았기 때문에 친구도 없었고 자신의 불완전한 육체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깅가쿠지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환상을 품고 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깅가쿠지의 주지에게 도제로 맡겨진다
어머니는 그가 노사의 눈에 들어 깅가쿠지의 주지가 되길 바란다
"나"는 어머니를 혐오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기 집에 얹혀 살던 친척과 관계 갖는 걸 본 까닭이다
그 장면은 아버지도 목격했는데 아버지는 어린 "나"의 눈을 가린 채 그 일을 묵과한다
폐결핵 환자였던 아버지로서는 젊은 아내의 육욕을 만족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대학에서 만난 가시와기다
그는 안짱 다리라는 불구를 안고 살지만 (아마도 선천성 고과절 탈구증일 것 같다 어린 시절 수술해 줬어야 하는데 부모의 방치로 평생 불구가 됐다는 말로 미루어 봐서) 자신의 불구를 동정의 대상으로 삼아 여자를 끌어 들일 만큼 노회하면서 또 독설가이기도 하다
문득 가난하면 선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던 니체가 생각난다
가시와기는 같은 불구라는 점 때문에 동지 의식을 느끼고 접근한 "나"에게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 준다
자기 불행을 직시하는 것, 혹은 남의 결점에 대해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 대단한 베짱과 뻔뻔함이 아닐 수 없다
왠지 그의 삶이 비틀렸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오히려 비틀린 사람은 말더듬이라는 결점을 숨기려 했던 "나" 로 드러난다
가시와기는 불구라는 점을 이용해 연애를 걸 만큼 어찌 보면 삶에 대해 도전적인 자세를 잃지 않지만, "나"는 결국 마음으로부터 극복하지 못하고 금각사에 불을 지르고 마니까

가시와기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던진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한다
깅가쿠지에 불을 지를 "나"의 마음을 읽은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충고를 던진다
아마도 "내"가 인식 대신 행위에 의존할 거라는 느낌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가시와기는 "나"와 도제 생활을 함께 하던 쯔루가와가 보낸 편지들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쯔루가와는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쯔루가와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상처가 없는 영혼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는 놀라운 고민을 불구자인 쯔루가와에게 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쯔루가와는 말더듬이인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가시와기의 독설을 싫어해 그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인생의 통찰력 면에서 가시와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가시와기의 인간성 자체는 경멸하지만 연애 상담 면에서만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행위 대신 인식을 바꾸라는 가시와기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 "행위" 를 실행하고 만다
자살을 한 것이다

가시와기는 독특한 캐릭터다
그는 불구인 신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결점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다
자기 결점을 똑바로 바라보고 남에게도 아무 감정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뻔뻔해진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상대의 결점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미 나 자신의 결점을 세상에 까발릴 수 있는 베짱이라면 거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는 놀랍게도 그 불구인 다리를 이용해 여자를 꼬신다
아마 생긴 건 잘났을 것이고 말도 잘했을 것이다
말솜씨와 얼굴을 이용해 접근한 후 여자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그는 여자와 즐긴 후 미련없이 차 버림으로써 자신이 여자에게 매달릴 수도 있는 비참한 상황을 모면한다
오래 사귀게 되면 여자가 질릴 것이고 더 이상 동정심을 써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일탈을 시도하기 위해 돈을 빌릴 때도 선선히 꾸어 주지만, 차용 증서까지 쓰게 한다
"나"를 친구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마도 누구에게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가타와시는 인생을 냉정한 눈으로 보는 만큼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감정 따위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솔직히 "나"에게 계속 이자와 원금을 요구하는 걸 보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너 역시 잘난 척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인간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노사에게 돈을 받아낸 후 "나"에게 인식과 행위의 차이를 충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그의 그릇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는 인생에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다

절의 주지 스님인 노사에 관한 묘사도 인상 깊었다
일본의 중들은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관계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노사는 독신이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가 노사의 후계자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정작 "나"는 노사를 경멸한다
사실 노사의 모습은 일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일 수 있다
종교적인 지위를 이용해 절이나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시주받은 돈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는 모습!!
종교인이라는 말 자체가 직업을 의미한다면 어쩔 수 없는 현상 아닌가
노사는 결혼을 하지 않은 대신 술집 여성들을 끼고 논다
"나"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위선적인 노사를 마음으로부터 경멸하지만 그의 총애를 받아야 후계자가 될 수 있다
이 갈등을 괴로워 하다가 결국 "나"는 노사가 데리고 논 술집 여자의 사진을 노사에게 보내질 않나, 대학 수업을 빠지질 않나 어떻게 해서든 일탈을 저지르려고 애쓴다
완전히 눈 밖에 나버려야 일말의 기대마저도 포기할 것 같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만약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주지가 되라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대로부터 훨씬 자유로웠다

"나"는 한 때 노사를 죽일 생각도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내 손으로 해치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절대미의 존재가 아니므로 불태울 가치조차 없다
반면 금각사라는 건축물은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미의 상징이므로 불태울 가치가 있다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금각사를 불태우면서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가 죽으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계획을 바꿔 산으로 도망치고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면서 살아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충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반면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난 후 충동감이 해소되면 그 때부터는 현실을 직시하고 살 궁리를 찾게 된다
주인공 역시 절대미의 상징인 금각사를 불태울 때까지만 해도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막상 그 절이 사라져 가자 현실을 깨닫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주인공은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자위대의 결성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 저자의 특이한 이력과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절대미의 세계에 집착하는 저자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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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12-0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토에 갔을때 금각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너무 금칠을 해놔서 ...영.

미시마 유키오의 전력에 대한 편견땜에 그의 책은 한권도 본적이 없습니다.님의 리뷰에 깐깐한 별점 평가를 유추해볼때 다섯은 상당히 좋은 책이 아닐까 하는데 .. 관심이 아주 많이 가는군요.잘봤습니다.

marine 2004-1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아주 인상깊게 본 소설입니다 전 일단 작가는 문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미려한 문장이 돋보인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각사로 대표되는 절대미, 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의 추구, 이런 것들이 잘 어우러져 있답니다 재밌는 소설입니다 읽어 보세요
 
클래식, 아는 만큼 들린다
최영옥 지음 / 문예마당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보다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을 추천합니다

가격 차이가 6천원 정도 나는데 그 책이 훨씬 화려하고 재밌고 유익합니다

솔직히 좀 실망스럽네요

에피소드라고 삽입한 것도 너무 일상적인 내용이고  깊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두 책에서 작곡가나 곡 설명하는 게 거의 똑같더군요

누가 누구 걸 베꼈는지, 아니면 외국에서 만든 원전을 같이 베꼈는지 완전히 일치하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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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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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평들이 대체적으로 좋은 책을 비판한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대체 그는 자기 책을 낸 것인가? 아니면 여러 책을 종합한 요약본을 낸 것인가?

대중문화라면 그의 전공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전체를 남의 책 요약으로 일관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없고 90% 이상을 남의 얘기로  채울 뿐이다

그나마 원전을 밝혀서 다행인 셈인가?

불행히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여기 인용되는 몇 권의 책을 먼저 읽었다

보보스나 명품에 관한 챕터는 정말 원전 그대로의 내용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강준만이 쓴 책을 읽는 이유는 강준만의 의견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원전이 다 번역되서 팔리고 있는데 그 요약본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차라리 여기 인용된 원전들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깊이의 정도가 다르다

또 그가 인용한 원전들은 어렵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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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4-11-1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책... 강준만 교수의 고전(?)이네요. ^^;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항상 다른 새로운 책들에 관심 쏟느라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책.

야클 2004-11-12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인물과 사상>은 여러권 봤는데요.재미있고 일부분 공감하지만 또한 많은 부분에서 거부감이 드는 묘한 사람이란 느낌을 갖고있어요.이책은 안읽어봤는데....별로 읽고싶은 생각도 안드네요. ^^
 
쇼핑의 유혹 - 쇼핑의 역사와 문화에 얽힌 인간 욕망의 9가지 얼굴
토머스 하인 지음, 김종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쇼핑을 하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소비 생활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고, 직접 물건을 구매할 때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다
쇼핑 중독자의 경우 백화점 순례하는 게 최고의 여가 활동 아닌가?
돈을 주고 물건을 구입할 때의 그 희열감은, 비록 지불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래서 외상 구매, 혹은 신용 카드가 생긴 거 아니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합리적인 소비만 한다면 충동 구매를 부축이기 위한 신용 카드 같은 제도는 애당초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쇼핑은 하나의 여가이자 소비 활동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다양한 관점으로 쇼핑을 분석한다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쇼핑을 한다
쇼핑과 소속감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그룹에 끼기 위해 비슷한 물건을 구매한다
저자의 분석처럼 취향과 유행은 좀 다른 개념인데, 유행이 잠깐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비해 취향은 거의 영구적으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
유행이야 무시할 수도 있지만, 취향은 그 사람의 본질을 지배하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중년의 남성은 유행 따위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대신 자기가 갖는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은, 누가 뭐라 한다 해서 쉽사리 바뀔 만한 취약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단히 견고한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쇼핑을 한다
말하자면 그의 쇼핑 목록은, 나는 이런 사람이오, 라고 현시적으로 보여 주는 도구가 된다

이 취향을 공유하는 소수의 집단들은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비단 쇼핑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동호회 같은 것도 여기게 속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으로 개성적인 존재다
대중 매체에 의해 끊임없이 똑같아지라는 압박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독특한 생각과 스타일을 어떻게 해서든 드러내려고 애를 쓴다
요즘 같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는, 곧 비슷한 취향의 소비자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 주기 쉽다

오늘날 쇼핑의 특징으로는 브랜드 네임 밸류가 있다
옛날에는 점원들의 설명을 듣고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구매를 결정했는데, 20세기 후반의 소비자들은 브랜드 이름만 가지고 제품의 품질을 판단한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바로 광고다
광고를 통해 대중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그 제품 품질이 좋다는 것을 수많은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겠는가?
현대 사회는 정말 모든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됐다는 생각이 든다
부어스티니 주장하는 그 이미지의 환상도 결국 매스 미디어 시대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 요소다
광고가 없는 21세기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기업들은 광고를 통해 이미지를 팔고, 소비자들은 그 이미지로 제품의 질을 판단한 뒤 대량 구매를 한다
대량 생산과 대량 구매는 광고라는 중간자가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쇼핑의 새로운 개념으로 책임감이라는 게 있다
대체 쇼핑과 책임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쇼핑이라는 단어에는 과소비와 무절제라는 속뜻이 숨어 있는 기분인데, 쇼핑을 책임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한 푼이라도 아껴서 꼭 필요한 물건만을 구입하는 가정 주부들을 예로 든다
그들은 한정된 액수 내에서 가족에게 최대의 효용성을 안겨 줄 물품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따지고 보면 자급자족 시대가 아닌 이상, 시장에 나가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먹고 살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내가 필요한 제화를 구입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쇼핑의 속성에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리는 "책임"이라는 덕목이 들어 간다
(나 역시 그런 면에 해당된다)

쇼핑을 하는 또다른 이유로는 주목(attention)을 들 수 있다
물품 구매를 통해 타인의 주목을 받고 싶은 심리를 말한다
이것은 부유층일수록 더욱 그렇다
유한 계급이란 생활에 필수적이지 않는 것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계층이라고 누군가 정의했다
여기에는 사치 품목 뿐 아니라 오페라나 클래식, 발레 같은 예술도 포함된다
부유층들은 보다 값비싼 물품을 구입함으로써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계층과 차이를 두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들을 흉내내기 위해 한 달 월급을 명품에 쏟아붓는 서민층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명품을 소유했느냐, 안 했느냐는 본질이 아니다
명품, 혹은 사치품은 그저 차이를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 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갖는 몇몇 물건들을 소유했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소득 격차를 인정하고 각자의 능력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쇼핑을 하는 다른 이유로는 축하를 들 수 있다
제일 쉬운 예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하면 된다
흔히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이 데이를 관련 업계의 상술이라고 비난하지만, 저자의 말을 들어 보면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사실 인간이 얼마나 영리한 동물인데 남의 말에 속아서 돈을 지불하겠는가?)
선사 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축제를 즐겼다
생산력이 부족한 시대에 축제는 거의 유일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였다
더구나 축제 때는 귀족들이 자선의 은혜를 베푼다
(크리스마스의 불우 이웃 돕기란 이런 맥락의 전통이었나 보다)
1년 중 단 며칠을 쉴 수 있는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므로써 개인적인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한다
사실 아무 날도 아닌데 친하게 지내자고 선물을 건넨다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사람들이 기념일을 찾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크리스마스 등의 축일을 기념함으로써 그들은 새로운 인간 관계를 다진다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인터넷 쇼핑과 홈쇼핑이 빠질 수 없다
세계가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쇼핑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기 힘들어진다
대형 쇼핑몰이 번창하는 이유도, 바쁜 현대인을 위해 모든 물건들을 한 곳에 모아 놨기 때문이다
이제 인터넷 쇼핑이니 홈쇼핑이 대중화 되면서 고객들은 원하는 물건을 앉아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직접 눈으로 볼 수 없고, 조언자도 없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가 있지만, 환불 제도를 통해 극복해 가고 있다
저자는 쇼핑의 마지막 특징으로 이러한 편의성을 들고 있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깊이가 얕긴 하지만, 비교적 일목 요연하게 쇼핑의 심리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지나친 비약을 피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문제들을 예로 든 것도 이해를 돕는다
일반인이 현상을 분석한 책을 읽었으니, 이제는 보다 학문적으로 접근한 글을 읽고 싶다
확실히 인간은 소비하는 동물이다
도구적 인간, 정치적 인간 등등 인간을 정의하는 수많은 개념 속에 소비하는 인간도 함께 포함시켜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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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알랭 드 보통 지음 / 한뜻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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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일상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생활 속의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줘도 괜찮을 작가다

"삶의 철학 산책"이라는 에세이에서도 대가들의 철학을 일상성 속에 잘 녹여 놓더니만, 이 책에서도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훌륭하게 풀어 놓는다

이 책과 더불어 그의 첫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꼼꼼히 읽는다면 다른 연애 지침서는 평생 안 봐도 좋을 듯 싶다

 

이 철학 소설의 주인공은 앨리스라는 24세의 영국 여자다

그녀는 일곱 살이나 많은 에릭이라는 부유한 금융가와 사귀고 있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것은 에릭이 원래 의사였으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금융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의대 6년과 수련 5년을 다하고 군대 3년까지 다녀 와야 비로소 정상적인 의사로 대접받는 우리 사회에 비하면 영국 의사들의 성취는 왜 이렇게도 빠른 것인지!!

우리 나라에서도 의사라는 직업이 예전같은 대우를 못 받고 있지만, 의사가 국가 공무원 신분인 영국 역시 돈을 벌기 위해 금융계로 향하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 번 보통의 소설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섹스는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앨리스는 이미 고등학교 때 성관계를 경험한 것으로 나온다

누가 처녀 딱지를 떼 줄 것인가에 골몰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치 총각 딱지 못 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우리나라 남자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 때문에 우리나라의 매매춘이 활발한 것인가?)

앨리스는 에릭과 만난 첫 날, 그와 섹스를 치루므로써 사귀기로 한다

사귄다는 의미가 곧 섹스를 해도 좋다는 뜻인 셈이다

 

에릭은 나이도 많고 돈도 많기 때문에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

오랫동안 남자 친구가 없던 앨리스는 한껏 비관해 있던 처지라, 신문에 소개된 멋진 레스토랑을 데려가는 에릭에게 완전히 빠져 든다

이 레스토랑의 음식맛에 대한 평가에서 성격이 드러난다

앨리스처럼 타인의 평가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들은 신문의 극찬을 받은 곳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녀와 함께 사는 친구는 자기가 맛있다고 느낀 곳만 훌륭하다는 평가를 한다

아무리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려도 자기가 맛없으면 형편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에 영향받지 않고 내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주체성을 갖기란, 요즘같은 대중 매체 시대에는 참 어려운 문제다

 

앨리스는 직장 생활에 주는 억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곳을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휴가지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피곤하고 괴롭다

사람들은 흔히 휴가지로 떠날 때 일에 지친 자신은 버려 두고 가길 원하지만, 근심까지 함께 비행기에 싣곤 한다

즉 우리는 여행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을 며칠의 휴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

약간의 기분전환은 될 수 있을지라도 결국 나를 둘러싼 일상은 늘 반복되기 마련이다

 

앨리스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전형적인 런던인인 에릭과는 취향이 사뭇 다르다

에릭의 취향은 주류이고 앨리스의 취향은 비주류다

앨리스는 끊임없이 에릭에게 자기 취향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당위감을 느낀다

은연 주에 에릭은 비주류 문화권자인 앨리스의 취향을 얕보는 것이다

만약 그들 사이의 주도권이 앨리스에게 있었다면 에릭은 그녀의 색다른 취향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일반적인 취향이 얼마나 평범한가 따위로 우울해졌을 것이다

 

에릭은 사회적 성취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 앨리스와의 약속을 일 보다 하찮게 여긴다

앨리스와 주말에 만나기로 했어도, 바이어와 약속이 잡히면 그녀와의 약속을 펑크낸다

그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앨리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는 앨리스가 회사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 까닭에 회사일을 열심히 하는 앨리스는 사랑하지만, 회사일로 징징 대는 꼴은 못 본다

그는 자랑스런 커리어 우먼을 원하는 것이다

 

이 둘의 역학 관계는 앨리스에게 새로운 남자, 필립이 나타나면서 깨진다

고가구를 좋아하는 앨리스의 취향을 에릭이 비웃었기 때문에 그녀는 필립과 전시회장에 간다

그녀는 자신의 자잘한 얘기들, 에릭이 하찮게 여기는 일상의 문제들을 열심히 들어 주는 필립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지 않는 에릭에게 점점 분노를 표출한다

대안이 생기면 당당해지는 법이다

에릭은 그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지만, 관성의 법칙에 익숙한 그는 계속 앨리스에게 주도권을 행사하려 들고, 결국 앨리스는 그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에릭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가 될 것 같던, 이 타인지향적 아가씨는 이제 에릭의 거드름을 받아 주기에 넌더리가 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몇 달 후 필립과 식료품점에서 재회한 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제 좀 더 평등한 관계가 시작될 것임이 분명하다

 

타인의 평가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앨리스라는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고 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쓴다

이런 여성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남성을 만날 경우, 주도권을 상실한 채 불평등한 관계가 되는 건 뻔한 수순이다

보통은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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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6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가끔 들러서 리뷰 곶감 빼먹듯 하나씩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