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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알랭 드 보통 지음 / 한뜻 / 199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은 일상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생활 속의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줘도 괜찮을 작가다
"삶의 철학 산책"이라는 에세이에서도 대가들의 철학을 일상성 속에 잘 녹여 놓더니만, 이 책에서도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훌륭하게 풀어 놓는다
이 책과 더불어 그의 첫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꼼꼼히 읽는다면 다른 연애 지침서는 평생 안 봐도 좋을 듯 싶다
이 철학 소설의 주인공은 앨리스라는 24세의 영국 여자다
그녀는 일곱 살이나 많은 에릭이라는 부유한 금융가와 사귀고 있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것은 에릭이 원래 의사였으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금융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의대 6년과 수련 5년을 다하고 군대 3년까지 다녀 와야 비로소 정상적인 의사로 대접받는 우리 사회에 비하면 영국 의사들의 성취는 왜 이렇게도 빠른 것인지!!
우리 나라에서도 의사라는 직업이 예전같은 대우를 못 받고 있지만, 의사가 국가 공무원 신분인 영국 역시 돈을 벌기 위해 금융계로 향하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 번 보통의 소설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섹스는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앨리스는 이미 고등학교 때 성관계를 경험한 것으로 나온다
누가 처녀 딱지를 떼 줄 것인가에 골몰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치 총각 딱지 못 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우리나라 남자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 때문에 우리나라의 매매춘이 활발한 것인가?)
앨리스는 에릭과 만난 첫 날, 그와 섹스를 치루므로써 사귀기로 한다
사귄다는 의미가 곧 섹스를 해도 좋다는 뜻인 셈이다
에릭은 나이도 많고 돈도 많기 때문에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
오랫동안 남자 친구가 없던 앨리스는 한껏 비관해 있던 처지라, 신문에 소개된 멋진 레스토랑을 데려가는 에릭에게 완전히 빠져 든다
이 레스토랑의 음식맛에 대한 평가에서 성격이 드러난다
앨리스처럼 타인의 평가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들은 신문의 극찬을 받은 곳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녀와 함께 사는 친구는 자기가 맛있다고 느낀 곳만 훌륭하다는 평가를 한다
아무리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려도 자기가 맛없으면 형편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에 영향받지 않고 내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주체성을 갖기란, 요즘같은 대중 매체 시대에는 참 어려운 문제다
앨리스는 직장 생활에 주는 억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곳을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휴가지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피곤하고 괴롭다
사람들은 흔히 휴가지로 떠날 때 일에 지친 자신은 버려 두고 가길 원하지만, 근심까지 함께 비행기에 싣곤 한다
즉 우리는 여행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을 며칠의 휴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
약간의 기분전환은 될 수 있을지라도 결국 나를 둘러싼 일상은 늘 반복되기 마련이다
앨리스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전형적인 런던인인 에릭과는 취향이 사뭇 다르다
에릭의 취향은 주류이고 앨리스의 취향은 비주류다
앨리스는 끊임없이 에릭에게 자기 취향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당위감을 느낀다
은연 주에 에릭은 비주류 문화권자인 앨리스의 취향을 얕보는 것이다
만약 그들 사이의 주도권이 앨리스에게 있었다면 에릭은 그녀의 색다른 취향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일반적인 취향이 얼마나 평범한가 따위로 우울해졌을 것이다
에릭은 사회적 성취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 앨리스와의 약속을 일 보다 하찮게 여긴다
앨리스와 주말에 만나기로 했어도, 바이어와 약속이 잡히면 그녀와의 약속을 펑크낸다
그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앨리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는 앨리스가 회사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 까닭에 회사일을 열심히 하는 앨리스는 사랑하지만, 회사일로 징징 대는 꼴은 못 본다
그는 자랑스런 커리어 우먼을 원하는 것이다
이 둘의 역학 관계는 앨리스에게 새로운 남자, 필립이 나타나면서 깨진다
고가구를 좋아하는 앨리스의 취향을 에릭이 비웃었기 때문에 그녀는 필립과 전시회장에 간다
그녀는 자신의 자잘한 얘기들, 에릭이 하찮게 여기는 일상의 문제들을 열심히 들어 주는 필립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지 않는 에릭에게 점점 분노를 표출한다
대안이 생기면 당당해지는 법이다
에릭은 그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지만, 관성의 법칙에 익숙한 그는 계속 앨리스에게 주도권을 행사하려 들고, 결국 앨리스는 그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에릭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가 될 것 같던, 이 타인지향적 아가씨는 이제 에릭의 거드름을 받아 주기에 넌더리가 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몇 달 후 필립과 식료품점에서 재회한 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제 좀 더 평등한 관계가 시작될 것임이 분명하다
타인의 평가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앨리스라는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고 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쓴다
이런 여성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남성을 만날 경우, 주도권을 상실한 채 불평등한 관계가 되는 건 뻔한 수순이다
보통은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