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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책 에세이들은 언제나 나에게 작은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나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 특히 요즘 사회에서는 자칫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되기 쉬운 책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과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힘이 불끈 솟는다
사는데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남들이 시간낭비 한다고 비웃더라도 나는 내 길을 가련다는 베짱을 부릴 수 있게 된다
한편 동지 의식도 느낀다
요즘처럼 인문학이 죽어가는, 그야말로 인문학의 위기인 시대에, 전자책으로 인해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예측이 난무하는 시대에, 새 책도 아닌 헌 책 모으기에 열정을 불사르는 이런 책들은 꼭 읽어 줘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다
저자는 책 좋아하는 사람을 열독가와 수집가로 나눈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소유하는 데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라 가끔 내가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지 의심될 때도 있다
그런데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나 같은 성향의 사람들도 꽤 있나 보다
아빠의 경우 수집가 쪽이다
사실 어린 시절에는 아빠의 탐욕적이다시피 한 책 수집에 불만이 많았다
한 권을 제대로 읽은 다음 다른 책을 살 것이지, 왜 일단 모아 놓고 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이란 모아서 장식하려고 있는 게 아니라 읽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책 자체를 숭배하는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 놈의 책들 때문에 주거 공간을 침해당하면서 감히 내 책까지 쌓아 놀 엄두를 못내고 읽는 즉시 처분했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책을 읽는다
요즘처럼 독서열이 왕성할 때는 원하는 것만큼 책 사려면 월급이 꽤나 축날 게 뻔하다
저자는 자신과 같은 수집가는 소유 보다 읽는 것에 더 열심인 열독가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워낙 많은 책을 모으다 보니 읽는 속도가 사 들이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그래도 열심히 모으다 보면 내 서재에 꽂혀 있는 이상 언젠가는 읽게 되리란 기대감 때문에 행복해진다고 고백한다
아빠 역시 그랬다
책에 대한 아빠의 철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싼 것이 책이니까 책 사는데 돈 아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 내 손에 들어 온 책은 결국 다 읽게 되니까 미처 못 읽더라도 일단 모으고 보자는 것이다
다행히 아빠의 경우 헌 책들을 모으지는 않고 대신 서점에 나오는 책을 바로바로 사는 스타일이라 서재는 비교적 깔끔한 편이다
저자의 경우 헌책 수집에 열정을 가지고 있어 책을 들여 오면 일단 표백제로 표면을 깨끗하게 닦은 후 아스테지로 표지를 싸는 정성까지 들인다
이쯤 되면 헌책 수집도 하나의 취미가 되어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 같다
사실 나는 헌 책에 별다른 애정이 없다
저자는 신영복의 옥중서한을 영인본으로 묶은 "엽서" 를 최고로 치지만 나는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뒤 읽기를 포기했다
남들은 신영복이 직접 옥중에서 깨알같이 써내린 엽서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감동한다던데 나는 일단 읽기가 불편해 감동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영인본을 포기하고 깨끗하게 인쇄되서 나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을 택했다
말하자면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책 자체가 갖는 형식은 아닌 셈이다
그래서 같은 책도 기왕이면 새로 나온 개정판을 본다
나는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때문에 가끔 오래된 판본을 본다
그런데 일단 종이질이 떨어지고 인쇄 상태가 좋지 못하면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나서 가능하면 요즘 나온 책, 혹은 개정판을 보려고 한다
이 책의 저자와는 정반대인 셈이다
책 자체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서인지 읽은 책도 쉽게 선물하곤 한다
더구나 새로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워낙 왕성해 같은 책을 또 펼쳐 본 적은 별로 없다
다시 읽으면 그 때 느꼈던 감동이 쇠퇴할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헌책 사랑을 읽으면서 수집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헌책인 값도 싸기 때문에 나처럼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돈은 없는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또 책을 먼저 소유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원하는 책을 서점에서 쉽게 사는 것 보다 헌책방을 뒤져서 갖게 될 때의 기쁨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독서는 당연한 것이므로 취미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말을 들으면 책 읽는 것 자체를 즐기기 보다는 무엇인가 목적 있는 책읽기를 하라는 소리 같아 반발심이 생긴다
책 읽기는 공부가 아니다
우표를 수집하듯, 골프를 즐기듯, 대중가요를 듣듯, 그저 재미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오락거리고 취미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이런 책 에세이를 보면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기 힘들지 않을까?
저자는 이윤기의 전작주의자를 자처하는데 실제로 그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이윤기의 글세계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으면 생면부지의 그에게 편지를 써 주례를 부탁했을까?
나는 아직, 재밌게 읽은 책은 많아도 반드시 만나 보고 싶은 작가는 찾지 못했다
가끔 작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해 봤지만 만나 본 적도 없는 작가에게 간곡한 편지를 써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책은 없다
그런 점에서는 저자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이나 "환상의 책" 등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캐릭터 분석을 열심히 해서 정말 작가가 이렇게 생각했는지 편지를 보내고 싶은 생각은 해 봤다
워낙 빠져든 책이라 작가가 창조한 인물의 내면 세계, 즉 책에 드러나지 않는 성격까지 나름대로 분석해 본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미국 작가라 내가 느낀 감동을 제대로 전달하기란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또 그의 모든 책을 읽고 싶거나 그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누군가의 전작주의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독서인으로서 최고의 행복인지도 모른다
자기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앞으로 삶의 방향을 제시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기쁨일테니까 말이다
저자는 넘쳐나는 책들을 기막힌 방법으로 소장하고 있다
사실 책장이란 것이 책 소장이라는 본래의 목적 보다는 인테리어 역할이 더 큰 법이다
그래서 책장은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그만큼 책 놓을 공간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일본의 유명한 독서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사과 상자에 책을 저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과 상자에는 책이 안 들어간다고 한다)
저자는 벽돌과 합판을 이용해 책을 꽂는다
이렇게 하면 벽 한 면을 책으로 가득 채울 수 있고 공간도 훨씬 덜 잡아 먹는다고 한다
대략 700권 정도를 쌓을 수 있다고 하니,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멋진 책장을 갖는 것 보다는 보다 많은 책을 쌓을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이 많은데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방법이다
허접한 베스트셀러나 유행타는 깊이가 얇은 책 말고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깊은 울림을 가진 책들로만 서재를 꾸미겠다는 저자의 야무진 다짐이 아름답다
저자는 "숨어 있는 책" 이라는 동호회를 통해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과 만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시대에 헌책 수집이라니, 게임이나 당구 등에 미칠 젊은이들이 헌책에 미치다니, 놀랍고도 감사할 따름이다
반드시 책이 모든 활동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열정은 천박하지 않고 순수하며 고귀한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책에 대한 열정을 읽으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수집가의 책을 읽었으니 이제 나 같은 성향의 사람, 즉 책 자체 보다는 읽는 것에 더 열정적인 열독가의 책을 읽고 싶다
저자는 그래도 성공한 사람이다
용감하게 직장을 때려 치우고 취미을 직업으로 선택했으니 말이다
이제 그는 본격적인 글쟁이로 나설 것이다
독서 칼럼만 써도 밥벌이가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저자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