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애
변영주 감독, 김윤진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전경린의 소설 때문에 꼭 보고 싶던 영화였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지만 뒤로 갈수록 빼어난 문장력과 함께 독자를 흡입하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이종원을 떠올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규는 이종원과 딱 어울릴 것 같아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읽었다
솔직히 실망스럽긴 하다
이종원은 역시 탤런트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것일까?
잘 생기고 분위기 있긴 한데 연기가 너무 밋밋하다
얼마 전 애정의 조건에서 보여 준 평범하기 그지 없는 그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않는다
좀 더 강렬하고 사실적인 연기를 보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잘 생긴 배우의 평범한 연기는 참 안타깝다
김윤진 역시 삶의 의욕을 잃은 미흔을 표현하는데는 별로였다
그녀는 오히려 규를 만난 후 새로운 사랑에 불타는 밝은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린다
남편이 바람핀 후 삶의 의욕을 잃고 마치 시체처럼 살아가는 불행한 여자의 연기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뻔해서 지루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규와 정사를 벌이면서 의욕적으로 변한 모습은 아주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자기 이미지를 탈피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이 영화에서 제일 돋보이는 사람은 미흔의 남편으로 나온 계성용이다
신인이라고 하는데 정말 연기 잘 한다
세월이 지나면 훌륭한 주연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바람을 핀 후 아내에게 들켜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애쓰는 소심한 남편 역에 딱이다
특히 참다 참다 못해 폭발해 그녀에게 소리지르는 씬이나, 욕정에 불타 아내의 눈치를 보며 섹스를 기대하는 씬 등은 가히 최고라 할 만 하다
나중에 미흔이 바람핀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장면도 괜찮았다
그런데 실은 영화보다 소설에서 훨씬 생생하게 묘사된다
나는 늘 글로 읽는 소설보다는 눈으로 직접 장면을 보여 주는 영화가 훨씬 생생할 거라 기대하는데, 왜 이 믿음을 배반하는지 모르겠다
감독의 연출력 한계인가?
심리 분석은 자세히 묘사하는 소설이 탁월하지만 장면 묘사는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실감날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글로 묘사하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다
미흔이 모텔에서 나온 것을 본 규는 혹시나 하면서 그녀를 다그치다가 규에게 쓴 편지를 발견한 후 미친듯이 분노하면서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까지 한다
자기는 가족을 위해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까지 내려와 헌신하는데 정작 마누라는 다른 남자랑 놀아 났다는 걸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인가!!
처음에는 잡아떼아가 편지가 발각되자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미흔은 체념한 듯 말한다
"날 용서하지 마, 날 버려"
남편 효경은 더욱 분노하며 내가 누구 좋으라고 널 버리겠냐며 그녀에게 폭행을 가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서 나는 질투심에 불타는 남자의 끔찍한 폭력성과 아내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떠는 그 분노를 실감나게 느꼈는데 영화에서는 너무 밋밋하고 단순하다
분노하는 효경역은 실감나는데, 거기에 대응하는 미흔역이 정말 별로였다
어떻게 해서든 변명을 하려고 하지만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발견된 후 자기보다는 규의 신변을 걱정하며 죽는 한이 있어도 규의 이름을 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미흔의 절박한 심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남편 손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만은 어떻게 해서든 남편의 분노와 복수심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은 그 안타까운 심정이 영화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바람핀 정부의 이름을 불지 않는 것에 더욱 분노한 효경은 미흔의 목을 졸라 죽이려고까지 하고, 미흔은 거의 순교하는 심정으로 버틴다
소설가 전경린이 감독 변영주 보다 몇 수는 위다

마지막에 교통사고로 규가 죽는 걸로 처리된 것도 불만이다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다
사랑의 도피를 한 주인공 중 한 명이 사고로 죽는 설정은 너무 통속적이고 진부하다
소설에서는 세련되게도 규의 소식을 듣지 못한 걸로 처리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마을에서 들리는 무성한 소문만이 미흔의 가슴을 괴롭힐 뿐이다
맨 마지막에 남편과 이혼한 미흔히 일용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가면서 사진관에서 혼자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제일 멋진 장면 같다
나름대로 꾸몄지만 어딘지 모르게 남루해 보이는, 일상의 비루함과 고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민층의 모습으로 변한 미흔은 애써 웃으려고 하지만 미소는 슬플 수 밖에 없다
억지로 웃어 보지만 눈가는 촉촉히 젖어 있는 김윤진이 이 장면에서 제일 예뻤다
사실 이 장면은 소설에는 없다
소설에서는 효경과 이혼한 후 단칸방에서 근근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걸로 끝난다
불륜의 댓가가 이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소설에서는 너무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경제력이 없어 감히 그와 헤어질 꿈조차 못꾸던, 남편의 표현대로 시체같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
어쨌든 이제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니까 말이다
하나 뿐인 아들과 이별해야 함이 가장 가슴 아프겠지만 뭘 하든 댓가는 따르는 법이다

TV를 틀어 놓은 채 하루 종일 멍하게 앉아 있는 미흔이 효경에게 중얼거린다
"삶이 하찮아 견딜 수가 없어, 도무지 진정한 것이라곤 없어 니 옆을 떠나지도 못한 채 벌레처럼 붙어 있는 내가 견딜 수가 없어"
이 말에 효경은 분노를 떠트리며 너 진짜 독한 여자다, 내가 서울 생활 다 접고 촌구석에 처 박혀 너와 수진이만 위해 살려고 이렇게 애쓰는데 넌 맨날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고, 그렇다고 내가 한 번이라도 뭐라 한 적 있었어? 너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니?...
규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미흔의 고통도 이해가 간다
단 한 번 바람핀 걸 가지고 몇 년을 괴롭히는 아내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고, 두통에 시달리는 아내 때문에 서울 생활까지 접고 내려와 오직 가족에게만 충실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아내는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는다
사실 미흔이 좀 독특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어지간 하면 용서할 만 하건만, 더구나 남편의 외도를 묵인해 주는 우리 관습에 비춰 보면 확실히 미흔은 집요한 구석이 있다
한 번의 배신감을 견디질 못하는 것이다
그녀 자신이 한 곳에 몰두하는 타입이고 옳고 그름을 칼 같이 긋는 성격이라 배신감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소설에서 보면 미흔의 배신을 안 뒤 효경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왜 하필이면 이 때니... 내가 너와 수를 위해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곳에 내려와 애쓰는 바로 지금 왜 나를 배신했니...
효경이 느낀 그 절망감과 안타까움, 혹은 분노를 공감할 수 있다
사실 서울 사람들은 시골에 내려가는 걸 대단한 결정을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워낙 서울 중심이라 지방에 대한 부담감이 클 것이다
사실 효경이 내려온 시골은 지방의 군 단위나 돼 보이는데 일상이 너무나 지루하고 무료해 보인다
도무지 변화라곤 없을 것 같다
사실 살아 보면 그렇게까지 지루한 곳은 아닌데 영화나 소설의 묘사를 보면 지방은 항상 서울에 비해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나온다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의 편견이 많이 느껴진다
소설에서 규는 사립 우체국장으로 나오는 반면, 영화에서는 의사로 나온다
의사라고 하면 샤프하고 세련되며 부유할 것 같은데 시골 의원인 규를 보면 좀 심란하게 느껴진다
"사" 자 신랑감으로 결혼 시장에서 최고의 주가를 구사하는 (옛날 말이긴 하지만) 그 가치가 시골 의사에게서는 별로 느껴지질 않는다
그의 시골 진료소를 또 어찌나 초라하게 셋팅을 갖췄던지...

메이킹 필름을 통해 변영주 감독을 처음 봤다
전혀 예상 외의 모습이었다
일단 덩치가 남자만큼 크고 중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여자 감독의 어감이 주는 부드럽고 가냘픈 이미지가 전혀 없다
확실히 감독은 현장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격정멜로 밀애" 라는 홍보 문구는 마음에 드는데 솔직히 시나리오나 영화 편집 등은 너무 지루하고 뻔하다
배우도 이미지 보다는 연기력으로 골랐으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섹스 어필 쪽에서는 딸리지만 김윤진 보다는 배종옥이 훨씬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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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2-16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영화에서 사진관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제 홈피 "소설 vs 영화" 에 전경린 소설이랑 밀애 대비해서 쓴 글이 있거든요.

시간되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저랑 <밀애> 보고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신 것 같아서요.

marine 2004-12-1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요? 읽고 코멘트 달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