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정말 힘들게 읽은 책이다

독일어 책들은 대체적으로 지루하다

왠지 감성이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쉽게 몰입이 안 된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다가, 희곡 등이 추가되서 읽기 더 힘들었다

어지간해서는 책을 가운데 놓지 않는 약간은 강박적인 성격 때문에 간신히 읽은 책이다

 

요즘 유행하는 주제인 본성과 양육 중, 본성 쪽을 신뢰하는 나로서는 남녀간의 일반적인 차이도 슬슬 인정해 가고 있다

소위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우리 문화에만 있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자주 접한다

다만 우리 문화가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유달리 그 차이를 강조한다는 생각이 든다

독이 남자들 역시 한국의 남자들처럼 내면적 세계 보다는 외면적 세계를 더 중요시 한다

저자는 재밌는 예를 드는데, 동창회에서 남자들이 수십년 전의 장난꺼리나 선생님 얘기를 떠드는 이유는 자기 속마음을 얘기하기 싫어서라고 한다

여자들이 감정의 교류를 중시하는 반면, 남자들은 외부적 성취를 더 우선시 한다

남자가 여자의 감성에 귀기울이고 동감하는 때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쓸 때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남녀는 아주 다른 족속이 아닐까?

 

남자가 사회성을 중시하고 여자가 친밀함을 우선시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오래 통용된 것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지배 이념이었던 까닭에 남녀평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는 형편이다

확실히 최근까지 여성은 사회적 성취로부터 소외되어 가정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진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자가 사회적 성취 보다는 개인간의 친밀함을 중요시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여성들이 가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을 겪고 있다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자연스럽 결합도 가능해질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실용 지침서 보다는 수준이 높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리라는 근본적인 맥락에서는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이제는 남성학이 연구된다고 하는데,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볼만한 문제다

남성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도를 시작한 걸 보면, 이제 그들도 사회의 절대 강자는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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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녀 혁명 - 아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메들린 케인 지음, 이한중 옮김 / 북키앙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로 몰아 세운다면, 아이를 낳은 사람의 이기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아이를 낳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하고 인류의 영속성을 이어 가려는 고귀한 사명감 때문에 출산을 결정하는 것인가?

사회 구성원을 키워 다음 세대를 안정화 시키는 가정의 노력을 폄훼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자녀 가정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달린 문제이므로 스스로에게 선택권을 줘야만 한다

더불어 여성과 모성애의 관계는 남성과 부성애의 관계 수준으로 좀 떨어뜨릴 필요가 있다

실제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권리는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하지 않으면서 (즉 남자의 성씨를 따른다거나 친권이 아버지에게 있는 것 등), 정작 출산과 양육에 따른 의무감은 온통 어머니에게 부과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생각만큼 혁명적이거나 주장이 강한 책은 아니다

"무자녀 혁명"이라는 책 제목만큼 충격적인 책은 아니다

아마도 저자 자신이 늦은 나이에 출산을 경험한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더욱 중립적이고 올바른 시각을 제시한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 아이를 간절히 희망했기 때문에 아이가 주는 기쁨을 충분히 알고 있는 저자는, 가정에서 아이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자녀 여성들을 편견없이 바라 보자고 제안한다

이제 무자녀 가정은 동성애 커플처럼 보호받아야 할 소수 세력이 됐다

실제로 2001년 현재 미국 가임기 여성의 53%가 아이를 갖기 않는 상태일 정도로 수적으로 증가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주류가 아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힐 수가 없는 처지인 것이다

 

저자는 아이가 없는 상태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childless 대신 chuldfree라는 용어를 쓴 저자는 종교적, 환경적, 확신 등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종교적인 경우야 수녀들을 떠올리면 되고, 확신에 의한 경우라면 아이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해당된다

그런데 재밌는 건 환경적인 이유를 아이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출산률 저하가 국가 경쟁력을 악화시킨다고 걱정하지만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보면 인구는 포화 상태다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들은 인구를 줄이는 것이 자원을 보다 많이 나눠 가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환경의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된 셈이다

 

확신에 의해 아이를 안 갖는 사람들은 모성 신화와 부딪치게 된다

우리 사회는 모성이 본능임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자는 뭔가 잘못된 거라는 편견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쥐 실험을 통해 새끼를 키우고자 하는 모성 유전자가 없는 쥐들도 발견된다고 한다

즉 모든 여성이 다 아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이성을 사랑하지만 동성에게서만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듯, 대부분이 자신의 아이를 원하지만 그렇지 않는 소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건 타고난 정서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못 낳는 불임 여성의 사례들은 눈물겹다

워낙 입양이 활발한 나라라 불임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3세계 국가에서까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사람들이라 불임이면 간단히 입양을 결정하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자기를 닮은 2세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평범한 정서를 가진 사람임을 알게 됐다

불임 시술에 들어가는 엄청난 경제적, 감정적, 시간적 노력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부분은 10년 가까이 고통을 맛본 후에야 비로소 포기를 한다

그리고 주변 아이들에게 눈을 돌린다

나는 아이에 대한 욕구가 약한 사람이라 만약 나나 파트너가 불임이라면 담담하게 받아 들일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입양도 활발하고 대를 잇는다는 생각이 약한 미국에서도 불임 부부의 고통이 이 정도라면, 불임 정도가 아니라 아들 못 낳는 것을 칠거지악의 으뜸으로 여기던 우리 나라는 어떨지 알 만 하다

아들을 못 낳아도 쫒겨 날 판인데, 아예 임신 자체를 못한다면 그녀는 정상적인 여자로 간주되지 못할 것이다

혈통의 순수함을 강조해 입양을 매우 꺼리는 (그래서 고아 수출국이 된) 우리 정서상 불임으로 판정나면 다른 대안 없이 상실감 속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요즘은 어쩌다 보니 무자녀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늘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사회적 성취를 위해 출산을 늦추다 보니 임신하기 힘들어 지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출산을 미루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DINK 족이 늘어 양육에 드는 비용을 스스로에게 투자하고자 한다

 

무자녀 가정에는 이처럼 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단순히 그들을 이기적이다고 몰아 세울 수 없다

오히려 아무 준비 없이 부모가 된 후 아이들을 팽개쳐 두는 것 보다는, 과연 내가 부모 노릇을 하기에 적합한가를 먼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사회는 점점 다양해지고 구성원들의 욕구를 가능한 많이 수용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

과거와 같은 획일적인 잣대로 무자녀 가정의 이기주의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인종차별이나 남녀차별 등과도 비슷한 문제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좀 더 많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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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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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평이 워낙 좋아 기대를 많이 한 책인데,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다

열하일기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저자의 서술 태도는 아무래도 과장과 비약이 심하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은 많이 시도되야 할 일이지만, 평범한 독자들에게까지 그 감동을 전하는 일은 녹녹치 않다

지금까지 읽은 역사 에세이 중 가장 재밌고 원본에 충실한 책으로 나는 늘 "조선국왕이야기"를 꼽는데, 실록의 행간을 이 책처럼 잘 짚어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덕일이 쓴 에세이들에서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과장이나 논리의 비약이 지나치면 원본의 가치까지 훼손되는 법이다

 

저자는 박지원을 유목민으로 본다

하나의 사상에 정착하지 않고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적인 노마드로 여긴다

패관잡기로 분류될 정도로 박지원은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한다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으로 유명한데, 고문 대신 잡문을 쓴다고 정조로부터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명을 받는다

지금 생각하면 고문이야 말로 정형화 되고 딱딱한 죽은 글처럼 느껴지는데, 18세기 조선은 소설이나 개인적 감상의 묘사마저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였던 것 같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국땅에서 낯선 문물을 보고 느낀 점이나 여정, 들은 이야기 등이 어우러진 재밌는 여행기인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잡문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글이란 모름지기 학문적이고 나라에 도움이 되며 충효 사상을 구현하는 당위성을 지녀야 한다는 분위기 탓이었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죽은 글로 치부할 것이다

박지원은 개인의 감정을 가장 중시하는 현대적 감각을 가진 사람인 셈이다

 

박지원은 과거에 뜻을 버리고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한다

노론의 명문 대가에서 태어났는데도 과거 시험을 거부한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출세로부터 자유롭기는 참 어렵다

집안 환경이 좋아 친구나 친적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데 자신만 뒤처졌다고 생각하면 심적 압박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안이 좋고 학식이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으면 스스로 선택한 자유에 대해 당당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능력이 되도 안 하는 것이니, 오히려 더 멋지게 보일 수도 있다

패문잡기를 즐겨 쓴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반성문까지 요구받을 정도이면, 과거라는 시험 제도 자체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저자는 박지원과 정약용을 나란히 비교한다

두 사람은 일생이 불우했다는 점만 빼고는 겹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다

박지원이 노론 출신이고 정약용이 남인이었다는 점만 봐도 벌써 그 성향을 알 만 하다

덩치가 커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박지원은 과거를 거부하고 일평생 벗과 교우하며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한 유목민이었던 반면, 단아한 풍채의 선비였던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당시의 지배 이념을 쫒아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다

둘 다 18세기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천재들이라 인정받는 만큼 누가 옳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둘의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는 게 흥미롭다

남인들은 조선 사회에서 계속 소외당하면서 천주학을 스스로 받아들이는데, 저자는 천주교 자체의 배타성을 지적하면서 남인 역시 사상의 경직성을 피할 수 없었다고 논평한다

 

사실 이 문제는 실학이 정말 근대성을 지니고 주자학을 벗어나고자 하는 주체적 학문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18세기에 부흥한 실학을 두고 근대의 맹아가 보였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주자학의 극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먼 과거로 회귀를 바란다고 한다

즉 현재의 폐단을 바로 잡아 과거의 명징함과 옮음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저자를 완전히 사로잡은 이 멋진 연암 선생도 청나라 학자에게, 조선의 자랑은 부녀자들이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이라고 했다니, 그들의 기본적 사상이 주자학이였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한 논평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열하일기를 여러 번 읽었을텐데도 아무런 언급이 없어 아쉬웠다)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사상이 혁명적이었다기 보다는, 기존 질서의 경직성을 탈피해 보다 자유로운 학문 추구를 원했다고 해 두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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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4-11-11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이책도 인문학 베스트 셀러인데 아직 보지 못한... 보고픈 책이죠. 고전의 리라이팅붐에 한 몫 한 책.
 
음식혁명
존 로빈스 지음, 안의정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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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런 책을 접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늘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웰빙 열풍이 불면서 운동을 중요시 하고 유기농 야채를 먹는 채식주의자가 되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육식이 건강을 망칠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심지어 육식이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정말 그럴까?

 

차를 타는 대신 가까운 거리는 걷고, 칼로리가 높은 패스트 푸드 섭취를 줄이는 대신 야채를 많이 먹으라는 기본적인 명제는 동의한다

사실 우리는 지나치게 편하고 풍족해진 탓에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오너 드라이버라면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의 거리 외에는 거의 걷지 않을 것이다

대신 맥도널드나 T.G.I.F.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즐기는 신세대라면 그는 틀림없이 넘쳐 나는 칼로리를 배나 허리에 저장하고 다닐 것이다

요즘처럼 음식이 넘쳐 나는 시대에 적정 체중을 유지하면서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전통적인 식단으로 돌아가는 길 뿐이라고 생각한다

식욕을 억제하지 않고도 살이 찌지 않기 위해서는 채식을 즐길 수 밖에 없다

또 자동차를 멀리 하고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굳이 수십만원을 피트니스 클럽에 갖다 바치지 않아도, 자동차가 주는 편안함을 포기한다면 얼마든지 날씬한 체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들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상의 논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쩌면 아직까지 내 가치관 정립이 안 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환경을 살리고 동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대하기 위해서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외치는데, 환경주의자가 곧 채식주의자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또 유전자 변형 식물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지만, 그의 주장들을 모두 받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인류가 기아로부터 벗어난 가장 큰 이유는 화학 비료와 품종 개량 덕이 아닌가?

전체적인 이익 대신 부분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저자의 주장대로 모든 곡물에 유기농 기법을 도입하고 자연 그대로에 맡겨 둔다면 요즘 같은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우유와 달걀의 폐해를 주장하는 대목에서도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완전한 채식주의자라는 신념에 따라 안 먹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 식품 자체가 우리 몸에 피해를 준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은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다

우유나 달걀은 영양학적으로 완전 식품에 가깝다고 여겨져 왔다

그런데 단순히 이것이 낙농업자들의 로비 탓이었다는 식으로 넘길 수 있는 문제인가?

기존의 학설을 뒤엎으려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와 많은 자료들을 제시해야 하는데, 저자는 그저 관념에 의존해 몇몇 사례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칼슘 섭취가 적은 사람이 오히려 골절 위험이 낮다는 도표에서는 솔직히 할 말을 잃었다

저자가 정말로 이런 주장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면 이 조사가 얼마나 많은 표본 집단을 대상으로 했는지, 변수 통제는 어떻게 했는지, 가설과 결론에 어느 정도의 상관 관계가 있는지 등 수많은 고려 사항들을 다 언급해야 할 것이다

즉 학술적인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가축들의 끔찍한 사육 환경에 대한 성토는 깊이 공감한다

흔히 서양인들은 우리나라의 보신 문화를 경멸하는데, 만약 개를 가축에 포함시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 역시 가축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게 대한다

소나 돼지는 잡아 먹으면서 왜 개는 안 되냐는 주장은, 개를 가축의 범위에 넣는다면 문화적 상대성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브릿지 바르도가 채식주의자라면 그녀의 비판은 일관성이 있다

만약 그녀가 육식을 하면서 한국의 보신 문화를 야만적이라고 비판한다면, 그녀는 자기 모순에 빠진 셈이다

 

동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걸 보면 확실히 도덕 관념은 진보하는 것 같다

백년 전만 해도 버젓이 노예제가 시행됐는데 이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개념을 당연시 하고, 수천년 동안 약자였던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투표권을 준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대명제가 받아들여지자, 이제는 그 개념을 동물에게까지 확장시킨다

어쩌면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동물들 역시 인간에 준하는,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육식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가축 사육의 열악한 환경은 분노할만 하다

언젠가 한 박물관 앞에서 자연 체험의 일부로 곰 두 마리를 우리에 가둬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아직 새끼인데도 우리가 비좁아 보이는데, 과연 저들이 자라게 되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 갔다

동물 학대라고 분노했는데, 가축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저자가 자세히 기술한 축사 환경은 말 그대로 움쩍달싹도 할 수 없는 최소한의 공간이다

닭 같은 겨우 수백마리를 한 우리에 집어 넣으면 날개를 못 펴는 건 물론이고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를 쪼게 되므로, 심지어 부리까지 잘라 버린다고 한다

송아지는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운동을 못하도록 체인을 감아 놓는다

돼지들이 좁은 축사에서 배설물과 한 덩어리가 되야 함은 물론이고 너무 좁은 나머지 서로의 꼬리를 물기 때문에 단미까지 한다고 한다

 

체중 증가를 위해 지나치게 사료를 먹이고 운동을 못하게 하므로 대부분의 가축들은 심장병에 걸린다

이들에게 먹이는 항생제가 사람에게 축적됨은 물론이다

도살할 때 전기봉을 쓰는데 한 번에 죽지 않는 경우는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절단한다

돼지 같은 경우는 항문에 쇠꼬챙이를 집어 넣어 던진다고 한다

사진까지 실린 설명들을 읽으며 우리가 단지 그들을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이런 식으로 훼손시켜도 되는지 부끄러워졌다

이미 유럽에서는 공장식 축산제가 금지되어 좁은 우리에 가두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죽지 않은 상태에서 도살하는 것도 금지됐다고 한다

그들이 외치는 동물 보호가 단순한 구호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야생 동물만 보호되야 하는 게 아니라, 가축들 역시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살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개를 먹는 것은 분노하면서 왜 돼지나 소, 닭등이 끔찍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것에는 무심하냐는 저자의 비판에 깊이 공감하는 바다

사실 나도 우리의 보신 문화를 혐오하긴 했지만, 가축들이 그런 환경에서 사육되고 도살되는지는 미처 몰랐다

저자는 고기 먹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목축업자들과 맥도널드 같은 자본가다

가축에게 최소한의 환경도 제공하지 않은 채 광고의 이미지를 이용해 돈을 버는 그들의 뻔뻔함을 비난한다

저자 같은 환경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덕에 맥도널드는 닭에게 좀 더 넓은 평수의 계사를 제공하기로 했다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사실 내가 패스트푸드를 안 먹는 까닭은 지나친 칼로리 과잉 때문이었다

정크 푸드라는 명칭답게 영양소는 적으면서 칼로리는 많은 햄버거 등이 콜레스테롤을 높히는 등 몸에 좋은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음식의 영양학적 가치를 떠나 이렇게 끔찍한 환경에서 기른 가축으로 햄버거를 만든다면,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불매 운동을 벌일 만 하다

이제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 푸드 기업들은 가축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들이 생명의 존엄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문제는 남는다

가축들의 고통에 공감을 느낀다면, 햄버거 뿐 아니라 계란과 우유 등도 먹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가축 그 자체를 먹는 건 아니지만, 역시 우유와 달걀을 얻기 위해 소와 닭 등은 좁은 우리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한다

양식장에서 항생제로 길러지는 생선은 또 어쩌란 말인가?

결국 동물들이 갖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완전한 채식주의자, 즉 배전이 되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

음식에 대한 욕구를 떠나서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게 과연 저자의 주장처럼 오히려 건강에 이롭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심지어 저자는 꿀도 벌을 가둬 키워 얻는 것이라고 제한을 두려 하는데, 참 난감하다

(다행히 난 꿀은 싫어한다)

먹이 사슬이라는 자연의 법칙 면에서 봐도 우리가 육식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부당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면서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을 정도의 도덕적 의무를 병행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릴 권한을 줬다고 하지만, 그들을 마음대로 짓밟고 멸종시키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나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는 될 수 없고, 또 도덕적으로나 환경적으로도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범위를 좀 더 확장시켜 동물에게, 또 가축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보다 생태적인 사육 환경을 제공하고 (영국이나 스웨덴처럼 공장식 축사를 금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도살할 때도 최소한의 고통으로 끝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더불어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축산 자본 역시 환경과 가축들을 위해 보다 많은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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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슴 2005-12-0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유와 달걀의 폐해를 주장하는 대목에서도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칼슘 섭취가 적은 사람이 오히려 골절 위험이 낮다는 도표에서는 솔직히 할 말을 잃었다-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게 과연 저자의 주장처럼 오히려 건강에 이롭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선생이 지적하신 이 3가지는 부연설명이 빠졌지만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선생께서 무지하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marine 2005-12-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할 때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합니다 현재 의학책에서는 위의 세 가지 주장을 그르다고 봅니다 댓글 쓰신 분께서 기존의 학설을 부정하시려면, 기존 학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정확한 근거를 대는 게 먼저겠죠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 탐사와 산책 9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진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철학을,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아픈 사람의 육체적 고통을 없애 주는 게 의사의 몫이듯, 영혼의 문제로 괴로워 하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 철학자의 몫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따지면 철학은 21세기의 죽은 학문이 아니라,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함께 가야 할 본질적인 학문이 될 것이다

인문학의 존재 의의에 대해 회의를 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왜 철학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요소인지 깨닫게 될테니까

 

드 보통은 스물 다섯의 나이로 사랑의 본질에 대해 경쾌하게 풀어 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영어 제목은 Essay in Love, 참 소박하다) 철학 소설을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의 입을 빌어, 사랑을 비롯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여러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이론이 현실에서 이렇게 적용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감탄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피부로 와닿는다

 

이 책에서 가장 흥분되는 발견은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라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과 함께 (그 말도 본인이 한 게 아니라지만) 우민 정치에 희생되어 독배를 마신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몰랐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나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 채 그저 단순 지식의 나열 정도로만 인식됐다는 얘기다

(아마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주는 명성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설명을 들어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격 없는 다수의 비판을 두려워 하지 말고 철저한 논증을 통한 진리를 얻기 위해 애쓰라고 가르쳤다

상식적이라고 받아 들여지는 대부분의 명제들은, 사실 제대로 된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우리는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왜 옳은가를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사유와 논증을 통해 옳다고 증명된 일에 대해, 다수가 비판한다면 그것은 무시해도 좋다

자격없는 대중의 비판을 두려워 하는 대신, 전문가의 통찰력은 늘 무서워 해야 한다

그가 어리석은 대중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사형 언도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논리적인 사유 과정 없이 그저 분위기에 휩싸여 잘못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신념은 틀렸고 자신은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었다

 

집단에 속해 살면서 과연 다수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을 베짱이 있을까?

흔히 상식이라고 불리는 범위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나 주장을 할 경우, 끔찍한 비난과 따돌림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흔히 남과 대화할 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애쓴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깊은 사색을 통해 옳다는 확신이 든다면 대중의 비판을 가치없는 것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예를 든다

올림픽에서 우승하기 위해 체력 단련을 하는 선수를 보고, 운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비웃겠지만, 전문가가 본다면 그의 훈련을 훌륭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자격없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비난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의 평가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격언의 의미를 깨닫는 기분이다

 

쾌락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의 사상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윤리 시간에 배운 기억으로는 고통 대신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 사는 철학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쾌락이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행복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 거라 믿지만, 실상 물질이 주는 쾌락은 미미하다

굶주림이나 추위 같은 기본적인 욕구들만 해결된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옷을 입는다 해도 행복 지수가 크게 증가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광고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사막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짚차 선전에서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은, 짚차 그 자체가 아니라 광활한 사막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다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행복하게 음료수를 마시는 광고에서 얻고 싶은 것은 음료수가 아니라 우정일 것이다

사람들은 큰 집과 멋진 차를 원하지만, 실상 진짜 원하는 것은 그것들을 소유하므로써 타인에게 받게 될 부러움과 호의적인 태도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결정짓는 여러 감정들을 물질로 착각하고 있다고 힐난한다

그가 주장하는 행복의 3대 조건은 우정, 자유, 사색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존재 의의를 찾기 때문에 사랑이나 우정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대신, 누구와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충고한다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욕구도 인간의 본성이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샐러리맨들이 가장 원하는 덕목일지도 모른다)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대신 하고 싶은 일과 관심있는 분야에 몰두하는 삶을 꿈꿀 것이다

사색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왜 그런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불안을 다스리는 가장 큰 해결책은 바로 깊은 사색이다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할 때 비로소 우리는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충고는 나에게 큰 위안을 준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더 갖기 위해 애쓴다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과거인들에 비해 기본적인 욕구가 거의 충족된 상태에 사는지도 모른다

즉 불행할 까닭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진짜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 물질에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쾌락주의라는 어감 속에는 물질에 대한 갈망이 들어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정신적 쾌락의 추구에는 실상 물질이 별 필요가 없다는 역설이 재밌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네로에게 죽임을 당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해답을 준다

세네카는 우리가 분노하는 까닭을,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근거없는 낙관에 있다고 갈파한다

리모컨이 제자리에 없으면 갑자기 화가 치민다

그렇지만 왜 꼭 리모컨이 제자리에 있을 거라 기대한단 말인가?

오히려 지정된 단 하나의 장소에 존재할 확률이 훨씬 낮다

세네카는 운명의 여신이 얼마나 무심한가를 강조한다

어떤 일이 되어가는데 있어 인간의 행동은 그저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운명의 여신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는 미래의 불행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늘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혹시 내가 왕의 미움을 받아 낮은 신분으로 떨어진다면, 내 운명에 대해 분노할 것이 아니라 원래 낮은 신분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현명하다

세네카는 이를 두고 체념의 기술이라 부른다

 

정신에 비해 열등하다고 믿는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몽테뉴나 (그가 쓴 "수상록"의 어감으로는 정신의 가치를 중시했을 것 같은데 의외다), 삶의 고통을 무시하는 대신 극복함으로써 더 높은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고 역설한 니체의 철학도 가슴에 와 닿는다

생의 의지로 요약되는 생철학의 대가 니체는, 잘 될 거라는 위안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를 혐오했다

그래서 기독교와 알콜을 거부했다

기독교는 몰라도 알콜은 담배와 더불어 철학자에게 필수품일 것 같은데, 니체가 술을 멀리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고통을 직시해야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를 얻을 수 있는데, 기독교와 술은 근거없는 희망을 주므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절름발이가 착할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니체의 독설이 떠오른다

 

드 보통은 철학을 일상 생활로 끌어 들이는 놀라운 매력이 있다

혹시 난무하는 인생 지침서들 사이에서 수준있는 책을 원한다면, 반드시 이 책을 고르라고 권한다

(사실 그런 책의 저자들이 남에게 이렇게 살아라고 말할 수준이 되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더불어 위대한 여섯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드 보통처럼 철학을 우리 삶 가까이로 끌어들일 좋은 철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철학이야 말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학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철학자를 키워내는 학과를 폐지한다고 드는 요즘의 세태가 슬프기 그지없다

이제 철학자들도 세속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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