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이 워낙 좋아 기대를 많이 한 책인데,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다

열하일기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저자의 서술 태도는 아무래도 과장과 비약이 심하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은 많이 시도되야 할 일이지만, 평범한 독자들에게까지 그 감동을 전하는 일은 녹녹치 않다

지금까지 읽은 역사 에세이 중 가장 재밌고 원본에 충실한 책으로 나는 늘 "조선국왕이야기"를 꼽는데, 실록의 행간을 이 책처럼 잘 짚어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덕일이 쓴 에세이들에서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과장이나 논리의 비약이 지나치면 원본의 가치까지 훼손되는 법이다

 

저자는 박지원을 유목민으로 본다

하나의 사상에 정착하지 않고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적인 노마드로 여긴다

패관잡기로 분류될 정도로 박지원은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한다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으로 유명한데, 고문 대신 잡문을 쓴다고 정조로부터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명을 받는다

지금 생각하면 고문이야 말로 정형화 되고 딱딱한 죽은 글처럼 느껴지는데, 18세기 조선은 소설이나 개인적 감상의 묘사마저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였던 것 같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국땅에서 낯선 문물을 보고 느낀 점이나 여정, 들은 이야기 등이 어우러진 재밌는 여행기인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잡문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글이란 모름지기 학문적이고 나라에 도움이 되며 충효 사상을 구현하는 당위성을 지녀야 한다는 분위기 탓이었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죽은 글로 치부할 것이다

박지원은 개인의 감정을 가장 중시하는 현대적 감각을 가진 사람인 셈이다

 

박지원은 과거에 뜻을 버리고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한다

노론의 명문 대가에서 태어났는데도 과거 시험을 거부한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출세로부터 자유롭기는 참 어렵다

집안 환경이 좋아 친구나 친적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데 자신만 뒤처졌다고 생각하면 심적 압박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안이 좋고 학식이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으면 스스로 선택한 자유에 대해 당당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능력이 되도 안 하는 것이니, 오히려 더 멋지게 보일 수도 있다

패문잡기를 즐겨 쓴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반성문까지 요구받을 정도이면, 과거라는 시험 제도 자체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저자는 박지원과 정약용을 나란히 비교한다

두 사람은 일생이 불우했다는 점만 빼고는 겹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다

박지원이 노론 출신이고 정약용이 남인이었다는 점만 봐도 벌써 그 성향을 알 만 하다

덩치가 커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박지원은 과거를 거부하고 일평생 벗과 교우하며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한 유목민이었던 반면, 단아한 풍채의 선비였던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당시의 지배 이념을 쫒아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다

둘 다 18세기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천재들이라 인정받는 만큼 누가 옳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둘의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는 게 흥미롭다

남인들은 조선 사회에서 계속 소외당하면서 천주학을 스스로 받아들이는데, 저자는 천주교 자체의 배타성을 지적하면서 남인 역시 사상의 경직성을 피할 수 없었다고 논평한다

 

사실 이 문제는 실학이 정말 근대성을 지니고 주자학을 벗어나고자 하는 주체적 학문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18세기에 부흥한 실학을 두고 근대의 맹아가 보였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주자학의 극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먼 과거로 회귀를 바란다고 한다

즉 현재의 폐단을 바로 잡아 과거의 명징함과 옮음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저자를 완전히 사로잡은 이 멋진 연암 선생도 청나라 학자에게, 조선의 자랑은 부녀자들이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이라고 했다니, 그들의 기본적 사상이 주자학이였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한 논평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열하일기를 여러 번 읽었을텐데도 아무런 언급이 없어 아쉬웠다)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사상이 혁명적이었다기 보다는, 기존 질서의 경직성을 탈피해 보다 자유로운 학문 추구를 원했다고 해 두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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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4-11-11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이책도 인문학 베스트 셀러인데 아직 보지 못한... 보고픈 책이죠. 고전의 리라이팅붐에 한 몫 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