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 탐사와 산책 9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진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철학을,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아픈 사람의 육체적 고통을 없애 주는 게 의사의 몫이듯, 영혼의 문제로 괴로워 하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 철학자의 몫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따지면 철학은 21세기의 죽은 학문이 아니라,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함께 가야 할 본질적인 학문이 될 것이다

인문학의 존재 의의에 대해 회의를 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왜 철학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요소인지 깨닫게 될테니까

 

드 보통은 스물 다섯의 나이로 사랑의 본질에 대해 경쾌하게 풀어 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영어 제목은 Essay in Love, 참 소박하다) 철학 소설을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의 입을 빌어, 사랑을 비롯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여러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이론이 현실에서 이렇게 적용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감탄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피부로 와닿는다

 

이 책에서 가장 흥분되는 발견은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라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과 함께 (그 말도 본인이 한 게 아니라지만) 우민 정치에 희생되어 독배를 마신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몰랐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나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 채 그저 단순 지식의 나열 정도로만 인식됐다는 얘기다

(아마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주는 명성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설명을 들어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격 없는 다수의 비판을 두려워 하지 말고 철저한 논증을 통한 진리를 얻기 위해 애쓰라고 가르쳤다

상식적이라고 받아 들여지는 대부분의 명제들은, 사실 제대로 된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우리는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왜 옳은가를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사유와 논증을 통해 옳다고 증명된 일에 대해, 다수가 비판한다면 그것은 무시해도 좋다

자격없는 대중의 비판을 두려워 하는 대신, 전문가의 통찰력은 늘 무서워 해야 한다

그가 어리석은 대중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사형 언도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논리적인 사유 과정 없이 그저 분위기에 휩싸여 잘못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신념은 틀렸고 자신은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었다

 

집단에 속해 살면서 과연 다수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을 베짱이 있을까?

흔히 상식이라고 불리는 범위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나 주장을 할 경우, 끔찍한 비난과 따돌림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흔히 남과 대화할 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애쓴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깊은 사색을 통해 옳다는 확신이 든다면 대중의 비판을 가치없는 것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예를 든다

올림픽에서 우승하기 위해 체력 단련을 하는 선수를 보고, 운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비웃겠지만, 전문가가 본다면 그의 훈련을 훌륭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자격없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비난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의 평가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격언의 의미를 깨닫는 기분이다

 

쾌락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의 사상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윤리 시간에 배운 기억으로는 고통 대신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 사는 철학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쾌락이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행복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 거라 믿지만, 실상 물질이 주는 쾌락은 미미하다

굶주림이나 추위 같은 기본적인 욕구들만 해결된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옷을 입는다 해도 행복 지수가 크게 증가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광고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사막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짚차 선전에서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은, 짚차 그 자체가 아니라 광활한 사막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다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행복하게 음료수를 마시는 광고에서 얻고 싶은 것은 음료수가 아니라 우정일 것이다

사람들은 큰 집과 멋진 차를 원하지만, 실상 진짜 원하는 것은 그것들을 소유하므로써 타인에게 받게 될 부러움과 호의적인 태도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결정짓는 여러 감정들을 물질로 착각하고 있다고 힐난한다

그가 주장하는 행복의 3대 조건은 우정, 자유, 사색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존재 의의를 찾기 때문에 사랑이나 우정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대신, 누구와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충고한다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욕구도 인간의 본성이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샐러리맨들이 가장 원하는 덕목일지도 모른다)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대신 하고 싶은 일과 관심있는 분야에 몰두하는 삶을 꿈꿀 것이다

사색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왜 그런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불안을 다스리는 가장 큰 해결책은 바로 깊은 사색이다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할 때 비로소 우리는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충고는 나에게 큰 위안을 준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더 갖기 위해 애쓴다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과거인들에 비해 기본적인 욕구가 거의 충족된 상태에 사는지도 모른다

즉 불행할 까닭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진짜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 물질에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쾌락주의라는 어감 속에는 물질에 대한 갈망이 들어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정신적 쾌락의 추구에는 실상 물질이 별 필요가 없다는 역설이 재밌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네로에게 죽임을 당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해답을 준다

세네카는 우리가 분노하는 까닭을,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근거없는 낙관에 있다고 갈파한다

리모컨이 제자리에 없으면 갑자기 화가 치민다

그렇지만 왜 꼭 리모컨이 제자리에 있을 거라 기대한단 말인가?

오히려 지정된 단 하나의 장소에 존재할 확률이 훨씬 낮다

세네카는 운명의 여신이 얼마나 무심한가를 강조한다

어떤 일이 되어가는데 있어 인간의 행동은 그저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운명의 여신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는 미래의 불행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늘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혹시 내가 왕의 미움을 받아 낮은 신분으로 떨어진다면, 내 운명에 대해 분노할 것이 아니라 원래 낮은 신분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현명하다

세네카는 이를 두고 체념의 기술이라 부른다

 

정신에 비해 열등하다고 믿는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몽테뉴나 (그가 쓴 "수상록"의 어감으로는 정신의 가치를 중시했을 것 같은데 의외다), 삶의 고통을 무시하는 대신 극복함으로써 더 높은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고 역설한 니체의 철학도 가슴에 와 닿는다

생의 의지로 요약되는 생철학의 대가 니체는, 잘 될 거라는 위안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를 혐오했다

그래서 기독교와 알콜을 거부했다

기독교는 몰라도 알콜은 담배와 더불어 철학자에게 필수품일 것 같은데, 니체가 술을 멀리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고통을 직시해야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를 얻을 수 있는데, 기독교와 술은 근거없는 희망을 주므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절름발이가 착할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니체의 독설이 떠오른다

 

드 보통은 철학을 일상 생활로 끌어 들이는 놀라운 매력이 있다

혹시 난무하는 인생 지침서들 사이에서 수준있는 책을 원한다면, 반드시 이 책을 고르라고 권한다

(사실 그런 책의 저자들이 남에게 이렇게 살아라고 말할 수준이 되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더불어 위대한 여섯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드 보통처럼 철학을 우리 삶 가까이로 끌어들일 좋은 철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철학이야 말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학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철학자를 키워내는 학과를 폐지한다고 드는 요즘의 세태가 슬프기 그지없다

이제 철학자들도 세속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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