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뒷모습 - 전시회 개최부터 미술품을 둘러싼 사건, 큐레이터의 업무까지
다카하시 아키야 지음, 박유미 옮김 / 재승출판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편한 수필집을 읽었다.

300 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편집이 헐거워 내용은 훨씬 적은 듯하다.

도쿄의 이치고칸 미술관의 관장이라고 한다.

이치고칸이 어딘가 찾아봤더니, 일본여행 갔을 때 우연히 미켈란젤로 소묘전 한다고 들어가서 봤던 곳이었다.

그 때는 정말 계획에 없이 호텔 바로 옆에서 전시회 하길래 들어간 거라 무슨 미술관인 줄도 몰랐다.

묘한 인연인 것 같아 책도 흥미롭게 읽었다.

관장 정도 되는 분이면 미학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좀 풀어내면 깊이있는 책이 될텐데 업무적인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춘 것 같아 아쉽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이 쓴 <예술이 되는 순간>과 비교되는 밀도다.

그렇지만 사립 미술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전시회가 개최되는 과정 등은 흥미롭게 읽었다.

이른바 블록버스터 전시회에 익숙해 외국에서 오는 작품들은 전부 돈을 주고 빌려 오는 걸로만 알았다.

그런데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명 미술관끼리 무상으로 교환해서 전시회를 연다고 한다.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양의 후발 주자들은 교환 전시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들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고 빌려 와야 하는데, 대여비는 차치하고 운송비만도 어마어마 하기 때문에 신문사나 방송국 같은 미디어들이 끼어 들고, 수익성을 내기 위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서양 명작 전시회들 후원사들이 신문사나 방송국이었던 것 같긴 하다.

그래서 학구적인 주제로 전시회 열기가 어렵고 인상파 같은 인기 전시회가 주로 개최된다.

일본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전시회가 열리는 것 같아 여행가서 보고 정말 부러웠다.

관람객 숫자도 엄청난 것 같다.

<전설의 큐레이터, 예술가를 말하다>에서는, 작품의 해외 전시를 보존 문제 때문에 매우 꺼려하고 명작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직접 미술관으로 오는 수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해외여행이 흔해졌어도 유럽이나 미국까지 미술관 순례를 자주 하기는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작품들이 자주 해외전시 하기를 바라고, 직접 명작을 대하면 예술에 대한 관심이 훨씬 증폭되기 때문에 저변 확대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유명 미술관들도 경영 규모가 커져 상업적인 목적의 전시회를 많이 개최하고 순회 전시도 자주 한다고 한다.

특히 미국 같은 경우는 대부분 사립 미술관으로 기부금과 관람 수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미술관 관장의 경영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나라답게 미술계의 경쟁도 아주 치열한 듯 하다.

맨 마지막에 왜 미술관을 찾는지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 나와 있다.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전시회장으로 사람들을 모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미적 호기심을 감상의 욕구로 표현했고 나도 그런 것 같다.

여행을 하거나 전시회장에 가서 작품을 보는 것도 그렇고 또 책을 읽는 것도 새로운 것을 알고 싶은 욕구의 표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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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한국미술 2 - 변화와 도전의 시기
김영나 지음 / 예경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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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영나 교수는 글을 참 쉽게 잘 쓴다.

현대미술은 너무 사변적이라 어렵고 공감이 힘들 때가 많은데 저자의 책들은 수준있는 내용들을 평이한 문체로 쉽게 설명해 줘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권은 더 옛날에 나온 책이라 흑백 도판이 많아 아쉬웠는데 2권은 전부 컬러라 그림 보는 즐거움도 크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1) 밀레는 농민화가인가?

사실은 부농 출신으로 가난한 화가가 아니었고 파리의 근대화에 거부감을 느끼고 바르비종으로 들어가 과거 회귀적으로 농민들의 삶을 이상화 시켜 그렸다는 점은 전에도 들었던 것 같다.

<만종>에 그려진 바구니에 죽은 아기가 있었다는 설도 있을 만큼 가난한 농민의 삶을 고발한 체제 전복적인 그림이다는 주장은 이제 한물 간 이론인 듯하다.

19세기 자본주의화 되어 가면서 농민들은 소외되어 갔고 사실은 근대화에 발맞춰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싶었으나 밀레 등의 도시민은 옛날 농민의 삶을 예찬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느낌도 든다.

마치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근대화 된 것을 어쩌다 한 번 시골에 와서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밀레의 농촌 지향성은 청교도 정신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1920년대에 일본과 한국으로 건너와 크게 유행을 한다.

오죽하면 이발소 그림으로 불려졌을까 싶다.

계급 투쟁이 벌어졌던 19세기 파리에서는 위험한 그림일 수 있었으나 미국에서는 있는 그대로 농촌의 건강함을 표현하는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재밌는 것은 미국에서도 그렇고 훗날 일본이나 한국, 중국에서도 산업화가 활발해진 시점에 농촌에 대한 향수 때문에 밀레의 그림이 유행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밀레의 농민들은 마치 로랭이나 푸생의 풍경화처럼 성스러운 분위기로 이상화 되어 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 쿠르베의 사실주의와는 차이가 난다.


2) 평양의 거대 기념물과 김일성 동상에 대한 고찰이 신선했다.

더불어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히틀러 등을 함께 비교하는데 개인 숭배라는 점에서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매우 닮아 보인다.

히틀러의 파시즘은 전 세계가 비난을 하면서 정작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체제 안에서 개인을 한 부속품으로 취급하는 공산주의의 비판은 왜 주저하는 것일까?

공산주의는 독재자를 숭배하고 개인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미술도 개인의 창작 욕구를 억압하고 수단으로 전락해 프로파간다화 돼버린다.


3) 김세중이라는 유명 조각가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국가의 대형 프로젝트에 주로 참여하고 행정직을 독차지 해서 관권지향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개인으로서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회환이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광화문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상을 건립한 그는 20대의 나이에 서울대학교 교수에 임용되고 천여 개에 달하는 공공조각에 참여한 유명 인사였지만 5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기 전, 행정적인 일 말고 내 예술적 작업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해방 직후 조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많은 작품을 의뢰받고 높은 행정적 지위를 누리기도 했지만 한 예술가로써의 야심을 실현하기에는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어려웠을 것 같다.

전에 읽은 큐레이터의 자선전에서도, 이미 당대에 매우 유명해진 작가들이라 해도 여전히 역사에 길이 남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야심을 불태우면서 작업 현장을 떠나질 않는다고 했다.

해방 직후 불모지에서 예술하던 사람이 갖는 딜레마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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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미술의 미의식에 대하여
이주영 지음 / 미술문화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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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미학서일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술술 잘 읽힌다.

뒷부분의 추상주의 개념에 대한 설명은 현학적인 기술이 많아 좀 지루하긴 했다.

그렇지만 소재가 우리에게 친근한 한국 근현대 미술이라 그런지 훨씬 친숙하고 편하게 다가온다.

단점은 역시 도판!

좋은 도판을 싣는다는 게 참 어려운 문제인가 보다.

어둡게 인쇄가 돼서 작품이 갖는 강렬한 색감을 느낄 수 없어 너무 아쉽다.

그렇지만 본문에 언급된 작품들을 가능하면 많이 소개하고 있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오지호의 <남향집>이나 임직순의 <모자를 쓴 소녀> 같은 작품들은 색채감이 워낙 밝고 강렬해서 그런지 한 톤 낮춰서 인쇄된 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김관호의 자화상이나 김인승의 인물 등을 보면 정말 너무 잘 그리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미학적 기쁨을 주는데 그럼에도 세계적인 화가가 못 되는 걸 보면 미술사에 이름을 널리 남긴 이들은 도대체 얼마나 천재들인가 싶다.

성재휴나 이응노, 김기창 등 수묵담채의 추상적인 표현도 참 좋았다.

먹이 갖는 특성을 잘 이용해 형식은 전통적이나 내용은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개성적이고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본 책에서는 고희동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나 실력이 별로라서 귀국 후에도 계속 작품 활동을 못하고 동양화로 돌렸고, 협회의 이권 다툼에 추한 말년을 보냈다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고희동의 자화상 두 점을 소개하면서 미학적으로 훌륭하고, 특히 일제에 협력하기 싫어 서회협회전에만 출품하고 선전에는 일체 작품을 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친일 경력이 없음을 높이 평가했다.

사실 자화상만 보면 평범한 감상자의 눈에는 고전적이고 멋지게 느껴진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한복만 고집한 점도 인상적이다.

왜 화단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항상 추상에 대해 모호하기만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끌어내려는 시도, 형태가 아닌 선과 색채의 순수조형요소에서 실존에 대한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곧 추상회화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이인가?

감각 저 너머의 실존적인 것, 작품을 보고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관람객의 몫인데 보통 형상이 표현된 구상회화에서 정서적 환기는 훨씬 쉬우니, 60년대의 앵포르멜 운동이나 모노 크롬 회화가 관념성에 치우쳐 지나치게 형식적이라는 비판도 이해가 된다.

예술의 본질은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정서의 환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설명하는 비판적 리얼리즘, 간단히 말해 민중회화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주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느낌이라 미학적 기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쉽게 말해 너무 노골적이고 주제의식이 선명하여 마치 그림이 서사의 하위 개념인 것 같다.

민중회화를 이렇게 공들여 설명한 책은 못 본 것 같아 의미있게 읽기는 했으나 수단으로서의 회화는 매력적이지가 않다.

관람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둬야지 선명한 주장으로서의 회화는 불편하다.


책의 주제인 한국적 미의식에 대해 저자는 자연합일을 꼽는다.

자연을 극복하는 것이 서양회화라면 한국인은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되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미감을 추구한다.

간단히 말해 기교보다는 무기교 무장식 소박미의 달항아리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화려한 찻잔보다 이도 다완을 최고로 치는 일본의 경우도 비슷할 듯하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하는 조선미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엄격한 비례미의 기하학적 추상보다는 정서적 환기를 일으키는 서정적 추상이 대세를 이룬다.

김환기의 작품을 보면 한국적 미가 무엇인지 금방 느껴진다.

형상이 있는 반추상이 아니라 완전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한 유영국의 산 시리즈를 봐도 확실히 차가운 서양 추상과는 다른 느낌이다.


궁금하면 바로 미술관으로 달려가서 직접 작품을 볼 수 있는 우리 회화들을 대상으로 한 미학서라 훨씬 실감나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근현대 우리 회화에 대한 책들이 더 많이 나와 감상하는 기쁨을 많이 누렸으면 좋겠다.

난 추상은 잘 모르기도 하고 관심이 적었는데,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정규 전시회를 보고 색다른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서 보고 말로 설명하는 것과 직접 작품을 대면했을 때 받는 감정의 고양은 또다른 것 같다.

가급적 많은 작품들을 직접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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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그림 - 명화 속 눈먼 욕망과 연애 유희
최정은 지음 / 세미콜론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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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을 때의 기쁨이랄까,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지적 충만감이 가득 느껴진다.

작은 판형에 비해 도판의 인쇄 상태도 훌륭하고 활자 크기나 편집도 가독성 있고 가벼워 보이지 않아 참 좋다.

다만 제목이 너무 진부하다.

이렇게 좋은 책이 이렇게 뻔한 제목으로 출간되다니, 책의 매력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제목만 보고 로코코 시대 명화 소개인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읽었던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저자임을 알고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다.

네덜란드 정물화에 대한 흥미로운 책이었고 나를 그림의 세계로 인도해 준 책 중 하나다.

네이버에 연재된 글 모음이라는데 네이버 수준이 이렇게 높았나 싶을 정도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와 18세기 로코코가 유행하던 프랑스 사회를 그림을 소재로 하여 너무나 깊이있게 설명하고 있어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솔직히 17세기 네덜란드의 장르화는 별 재미가 없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 그냥 그림 자체로 좋을 뿐 거기에 담긴 사회상이 특별할 게 없어서인지 서술 내용도 심심했다.

그렇지만 18세기 로코코 시대로 넘어오면 정말 흥미진진하다.

역시 유럽 사회를 이끌던 프랑스의 문예사조라 그런지 프랑스 대혁명까지 이어지는 시대상이 정말 흥미롭다.

나는 루벤스 풍의 바로크 그림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와토나 프라고나르의 페트 갈랑트 회화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로코코 회화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회화의 매력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됐다.

<예술이 되는 순간> 이라는 책에서 와토의 그림 "제르생의 간판" 을 설명하면서 색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알게 됐을 때의 놀라움이랄까.

로코코 시대의 우아한 귀족들의 그림들은, 그들이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했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동양의 초일적 이상향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너무나 공감이 된다.

바로크 시대의 고전문화가 절정에 다다라 귀족들의 삶이 곧 예술이 되는 시대, 그것이 로코코 시대였고 민중들의 피땀을 전제로 한 그들의 부유함과 번성함은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세기는 계몽주의가 꽃을 피운 이성의 시대인데 이 시대정신을 널리 퍼뜨린 사람들이 바로 살롱의 여주인들이다.

중세 궁정에서 귀부인을 숭상하는 기사도 문화가 살롱 문화의 배경이 됐다고 한다.

여성들은 비록 공식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사회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귀부인들은 살롱을 열어 사적으로 계몽주의자들의 토론의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함으로써 널리 퍼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이 대표적인 후원자이고, 그녀는 세브르의 도자기 산업을 이끌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규방에 갇혀 사회적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던 조선 사회 상류층 여성들의 삶이 안타깝다.

프랑스는 중세 신학으로부터 벗어나 계몽주의로 나갈 수 있었고 결국 프랑스 대혁명까지 이르러 세상을 바꾸었지만, 조선은 이렇게 꽁꽁 닫힌 사회였으니 자력에 의한 사회 변화는 불가능했던 것 같다.


좋은 책은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면서 관심의 폭을 넓혀 주고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255p

"어쩌면 그들은 풍족한 상류사회의 삶을 누리는 유쾌하고 초연한 자신들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보고자 한 것은 아닐까. 동아시아권의 표현으로 超逸 에 비할 만한, 가벼우나 경박하지 않고 초연하면서도 정중한, 우아함이 깃든 당당한 모습은 엘리트 계층이 그들 자신을 보고자 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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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그림으로 읽기 아트가이드 (Art Guide) 2
키아라 데카포아 지음, 김숙 옮김 / 예경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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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책이니 벌써 14년 전에 나왔구나.

세월의 흐름이 참 빠르다.

책 판형이 작아서 도판 인쇄 수준은 좋지만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기는 어려워 아쉽다.

유명 화가의 그림들도 많은데 이 책에 나온 도판만으로는 훌륭한 그림인지 느끼기가 참 어렵다.

기왕이면 좀더 큰 판형으로 명화들을 실어주면 좋겠다.

처음 읽었을 때 열심히 메모하면서 봤던 흔적들이 있어 잠깐 감상에 젖었다.

지루하고 간략한 설명들 위주라 이런 그림이 있구나 넘어가는 수준이라 아쉽다.

유대인들은 형상을 배격하는 민족이라 그런지 확실히 구약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많지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그리스 로마 신화가 훨씬 더 소재로 많이 이용된 것 같다.

렘브란트가 그린 구약성서 그림들이 많아 신기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딧의 그림은 너무 잔인한데 구약성경의 일화라는 이유로 많이 그려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목이 잘린 부위의 동맥과 정맥까지 세심하게 그려낸 그림들을 보면 확실히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전통은 매우 다른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89p

이 일화는 고대 근동사회가 생존보장의 수단으로서 후손을 갖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친상간은 중죄에 해당되었고 거의 모든 문화에서 금지되었다.

274p

토비트의 이야기는 욥의 이야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안나조차 정직함이 벌을 받고 관대함이 경멸당하는, 즉 정의와 질서가 전복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304p

욥은 불행이 닥쳐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의인이다. 이 현자의 체험담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모든 의문을 종합하고 있다.

 욥기는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주제로 다룬다. 욥은 번영이 하느님의 호의를 의미하고 곤경이 하느님을 저버린 자에게 내려진 벌을 나타낸다는 평범한 믿음에 도전한다.

307p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항상 올바르게 살아온 자가 어떻게 이러한 고통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느님이 실수할 수도 있는가?' 같은 딜레마로 인해 욥이 괴로워할 때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다. 결국 욥은 자신에게 내려진 고난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는 고통을 통해 하느님과 좀더 완벽한 영적 교감에 다다를 수 있음 깨닫는다.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정당한 이유를 종교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기는 어려운 일 같다. 결국 도덕과 종교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오류>

135p

11번째 형 르우벤은 요셉을 죽이자는 다른 형제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 르우벤은 첫번째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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