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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미술의 미의식에 대하여
이주영 지음 / 미술문화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운 미학서일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술술 잘 읽힌다.
뒷부분의 추상주의 개념에 대한 설명은 현학적인 기술이 많아 좀 지루하긴 했다.
그렇지만 소재가 우리에게 친근한 한국 근현대 미술이라 그런지 훨씬 친숙하고 편하게 다가온다.
단점은 역시 도판!
좋은 도판을 싣는다는 게 참 어려운 문제인가 보다.
어둡게 인쇄가 돼서 작품이 갖는 강렬한 색감을 느낄 수 없어 너무 아쉽다.
그렇지만 본문에 언급된 작품들을 가능하면 많이 소개하고 있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오지호의 <남향집>이나 임직순의 <모자를 쓴 소녀> 같은 작품들은 색채감이 워낙 밝고 강렬해서 그런지 한 톤 낮춰서 인쇄된 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김관호의 자화상이나 김인승의 인물 등을 보면 정말 너무 잘 그리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미학적 기쁨을 주는데 그럼에도 세계적인 화가가 못 되는 걸 보면 미술사에 이름을 널리 남긴 이들은 도대체 얼마나 천재들인가 싶다.
성재휴나 이응노, 김기창 등 수묵담채의 추상적인 표현도 참 좋았다.
먹이 갖는 특성을 잘 이용해 형식은 전통적이나 내용은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개성적이고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본 책에서는 고희동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나 실력이 별로라서 귀국 후에도 계속 작품 활동을 못하고 동양화로 돌렸고, 협회의 이권 다툼에 추한 말년을 보냈다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고희동의 자화상 두 점을 소개하면서 미학적으로 훌륭하고, 특히 일제에 협력하기 싫어 서회협회전에만 출품하고 선전에는 일체 작품을 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친일 경력이 없음을 높이 평가했다.
사실 자화상만 보면 평범한 감상자의 눈에는 고전적이고 멋지게 느껴진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한복만 고집한 점도 인상적이다.
왜 화단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항상 추상에 대해 모호하기만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끌어내려는 시도, 형태가 아닌 선과 색채의 순수조형요소에서 실존에 대한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곧 추상회화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이인가?
감각 저 너머의 실존적인 것, 작품을 보고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관람객의 몫인데 보통 형상이 표현된 구상회화에서 정서적 환기는 훨씬 쉬우니, 60년대의 앵포르멜 운동이나 모노 크롬 회화가 관념성에 치우쳐 지나치게 형식적이라는 비판도 이해가 된다.
예술의 본질은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정서의 환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설명하는 비판적 리얼리즘, 간단히 말해 민중회화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주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느낌이라 미학적 기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쉽게 말해 너무 노골적이고 주제의식이 선명하여 마치 그림이 서사의 하위 개념인 것 같다.
민중회화를 이렇게 공들여 설명한 책은 못 본 것 같아 의미있게 읽기는 했으나 수단으로서의 회화는 매력적이지가 않다.
관람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둬야지 선명한 주장으로서의 회화는 불편하다.
책의 주제인 한국적 미의식에 대해 저자는 자연합일을 꼽는다.
자연을 극복하는 것이 서양회화라면 한국인은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되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미감을 추구한다.
간단히 말해 기교보다는 무기교 무장식 소박미의 달항아리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화려한 찻잔보다 이도 다완을 최고로 치는 일본의 경우도 비슷할 듯하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하는 조선미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엄격한 비례미의 기하학적 추상보다는 정서적 환기를 일으키는 서정적 추상이 대세를 이룬다.
김환기의 작품을 보면 한국적 미가 무엇인지 금방 느껴진다.
형상이 있는 반추상이 아니라 완전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한 유영국의 산 시리즈를 봐도 확실히 차가운 서양 추상과는 다른 느낌이다.
궁금하면 바로 미술관으로 달려가서 직접 작품을 볼 수 있는 우리 회화들을 대상으로 한 미학서라 훨씬 실감나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근현대 우리 회화에 대한 책들이 더 많이 나와 감상하는 기쁨을 많이 누렸으면 좋겠다.
난 추상은 잘 모르기도 하고 관심이 적었는데,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정규 전시회를 보고 색다른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서 보고 말로 설명하는 것과 직접 작품을 대면했을 때 받는 감정의 고양은 또다른 것 같다.
가급적 많은 작품들을 직접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