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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그림 - 명화 속 눈먼 욕망과 연애 유희
최정은 지음 / 세미콜론 / 2013년 8월
평점 :
좋은 책을 읽을 때의 기쁨이랄까,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지적 충만감이 가득 느껴진다.
작은 판형에 비해 도판의 인쇄 상태도 훌륭하고 활자 크기나 편집도 가독성 있고 가벼워 보이지 않아 참 좋다.
다만 제목이 너무 진부하다.
이렇게 좋은 책이 이렇게 뻔한 제목으로 출간되다니, 책의 매력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제목만 보고 로코코 시대 명화 소개인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읽었던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저자임을 알고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다.
네덜란드 정물화에 대한 흥미로운 책이었고 나를 그림의 세계로 인도해 준 책 중 하나다.
네이버에 연재된 글 모음이라는데 네이버 수준이 이렇게 높았나 싶을 정도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와 18세기 로코코가 유행하던 프랑스 사회를 그림을 소재로 하여 너무나 깊이있게 설명하고 있어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솔직히 17세기 네덜란드의 장르화는 별 재미가 없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 그냥 그림 자체로 좋을 뿐 거기에 담긴 사회상이 특별할 게 없어서인지 서술 내용도 심심했다.
그렇지만 18세기 로코코 시대로 넘어오면 정말 흥미진진하다.
역시 유럽 사회를 이끌던 프랑스의 문예사조라 그런지 프랑스 대혁명까지 이어지는 시대상이 정말 흥미롭다.
나는 루벤스 풍의 바로크 그림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와토나 프라고나르의 페트 갈랑트 회화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로코코 회화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회화의 매력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됐다.
<예술이 되는 순간> 이라는 책에서 와토의 그림 "제르생의 간판" 을 설명하면서 색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알게 됐을 때의 놀라움이랄까.
로코코 시대의 우아한 귀족들의 그림들은, 그들이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했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동양의 초일적 이상향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너무나 공감이 된다.
바로크 시대의 고전문화가 절정에 다다라 귀족들의 삶이 곧 예술이 되는 시대, 그것이 로코코 시대였고 민중들의 피땀을 전제로 한 그들의 부유함과 번성함은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세기는 계몽주의가 꽃을 피운 이성의 시대인데 이 시대정신을 널리 퍼뜨린 사람들이 바로 살롱의 여주인들이다.
중세 궁정에서 귀부인을 숭상하는 기사도 문화가 살롱 문화의 배경이 됐다고 한다.
여성들은 비록 공식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사회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귀부인들은 살롱을 열어 사적으로 계몽주의자들의 토론의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함으로써 널리 퍼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이 대표적인 후원자이고, 그녀는 세브르의 도자기 산업을 이끌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규방에 갇혀 사회적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던 조선 사회 상류층 여성들의 삶이 안타깝다.
프랑스는 중세 신학으로부터 벗어나 계몽주의로 나갈 수 있었고 결국 프랑스 대혁명까지 이르러 세상을 바꾸었지만, 조선은 이렇게 꽁꽁 닫힌 사회였으니 자력에 의한 사회 변화는 불가능했던 것 같다.
좋은 책은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면서 관심의 폭을 넓혀 주고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255p
"어쩌면 그들은 풍족한 상류사회의 삶을 누리는 유쾌하고 초연한 자신들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보고자 한 것은 아닐까. 동아시아권의 표현으로 超逸 에 비할 만한, 가벼우나 경박하지 않고 초연하면서도 정중한, 우아함이 깃든 당당한 모습은 엘리트 계층이 그들 자신을 보고자 하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