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청춘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두 번째로 만나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이다. 역시 그림체는 기존 일본 만화의 예쁜 모습과 많은 차이가 있다. 기존 그림과 다르지만 화면을 분할하고, 집중하면서 연출해내는 솜씨는 변함없다. 제목에서 풍기는 청춘들의 우울함과 정체된 듯한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리고 그 우울한 청춘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젊음의 열정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린 소품집이다. 첫 편부터 강렬하게 다가온다. <행복하다면 손뼉을 치자>는 학교 옥상 난간 밖에 매달려 손뼉을 많이 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담력과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욕심을 부리다 난간을 잡지 못하면 그냥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죽는다. 죽음을 담보로 한 게임과 그 게임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학교 측이 희극적으로 대비되면서 청춘의 치기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리볼버>는 원작이 다른 사람이다.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분명히 타이요의 작품이다. 지겹고 졸리고 권태 가득한 고등학생 세 명이 총알 세 발 든 리볼버를 가지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총을 가졌으면 멋진 활극을 펼쳐야 하지만 이들에게 그런 열정과 혈기는 없다. 단지 총을 쏘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총을 쏘고 돈을 받자는 정도만 있다. 하지만 총알은 단 세 발이다. 총알을 구하러 나가 돈만 버린다. 총을 전한 사람을 알게 되지만 그에게 달려갈 용기도 없다. 그들이 선택한 마지막 게임에서 젊음의 혈기와 불안이 교차하면서 삶의 의욕이 여름의 향기로 드러난다.


<여름이다 뻥!>은 고시엔에서 한 번의 실투로 진 야구팀 이야기다. 야구 장면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야구부실에서 벌어지는 마작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 속에서 고시엔 경기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마작을 한다. 그들의 희망과 열정이 뜨거운 여름 속에서 멋지게 사라져야 하지만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야구소년들의 여름은 고시엔이 끝나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 속 그 실투는 현재 가장 멋진 투구로 이어진다.


<스즈키 형님>은 야쿠자와 고등학생이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준다. 총기거래상을 만나고 헤어지는 그 과정 속에 한 소년의 삶이 결정되어진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역시 마지막 장면에서 권총을 사용하여 못을 박는 장면이다.


유키오에게 <피스>란 동작은 어떤 의미일까? 커서 뭐가 되고 싶냐?, 고 묻는 어른들 물음은 과연 이 만화 속에서 답해진 걸까? 누가 밀어주면 날 수 있을 것을 줄곧 믿은 그의 믿음이 깨어진 순간 삶은 일탈하고, 영웅은 사라진다. 학교에서 담배를 피는 그와 이를 지적하는 선생에게 보여주는 피스!


<패밀리 레스토랑은 우리들의 파라다이스!>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갈 곳 없는 고등학생들의 아지트가 된 패밀리 레스토랑을 무대로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대화와 풍경은 청춘의 모습과 비슷하다. 반복되는 일상과 곤궁한 용돈은 그 시절 모든 청춘들의 문제가 아닐까?


<끝장이네 이거>는 한 소년이 지하철에서 불량배를 비웃다가 벌어지는 추격을 다룬다. 이 둘의 추격전을 보고 있으면 터미네이터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불량배는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 같고 터미네이터 같다. 이 끈질긴 추격전에 벌어지는 비일상적 모습과 소년이 좋아하는 소녀의 모습이 비교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말하는 ‘끝장이네 이거’는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가 후기에서 썼지만 그 시절의 허세와 풋내 나는 행동은 한 순간이다. 생활 속에 빠지면 그 순간 현실의 높은 벽과 늪에 부딪히고 빠져 허우적거린다. 일상의 반복이 주는 지겨움이 괴롭게 느껴지지만 그 반복이 깨어지는 순간 그리움과 안정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청춘은 가능성이자 이유 없음이다. 어설프고 끓어오르는 감정에 휘둘리고 우울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청춘은 푸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노서아 가비, 뭔 말인지 모르겠다. 책 소개를 읽으니 러시안 커피라고 한다.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러시안 커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소설 속에 나오는 제조 방식을 보면 인스탄트 커피와 비슷한 방식으로 끓인다. 원두가 어디 것인지 가는 방식이 어떤지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이 부분은 커피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살짝 아쉽다. 커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들이 많으니 그 속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말기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몸을 피한 시기다. 물론 그 이전에 주인공인 따냐의 행적이 선행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역관이었고, 노서아 가비를 즐겨 마셨다. 하지만 청나라 천자의 하사품을 러시아로 가지고 달아나다 죽었다는 오명을 얻는다. 목은 소금에 절여져 시장에 걸리고, 그 딸은 어머니의 선견지명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렇지만 어린 소녀가 녹녹치 않은 세상을 해쳐나가기가 쉽지는 않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아버지 덕에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한다는 것과 그녀의 말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 정도다. 이 무기 두 가지를 가지고 그녀는 더 넓은 러시아를 휘젓고 다닌다.  

 

 그녀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청나라 장사꾼이 러시아 고관이나 부자를 속여 귀한 유물인 것처럼 팔아먹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비에게 배운 조각 솜씨로 낙관을 가짜로 만들어 진짜처럼 판다. 점점 유창해지는 러시아어는 금상첨화의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그녀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부의 배분은 언제나 장사꾼이 구할을 가져간다. 그리고 이런 일은 늘 언제 위험이 닫쳐올 지 모른다. 그녀가 러시아 장군에서 붙어 사실을 말하고, 뻬쩨르부르그로 간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보헤미안처럼 그곳에서 거짓과 농담으로 사람을 희롱하던 그녀가 전문 사기꾼들과 합류한 것은 필연적인 수순인지도 모른다. 그 사기 행각의 끝에 만난 조선인 이반은 또 다른 삶으로 이끌어간다.  

 

 소설 초반에 그녀의 굴곡 많은 삶의 과거를 보여준다면 중반부터는 조선으로 무대가 바뀐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한 판의 대 사기극은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진실이 거짓의 가면을 쓰고, 거짓이 진실의 가면을 쓴 채로 뒤섞여 진행된다. 조선이 힘이 없어 외국의 힘에 기대던 그 시절이 따냐와 고종의 대화와 행적으로 꾸며진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사실과 작가가 교묘하게 끼워 넣은 거짓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빠르게 나아간다. 하나씩 밝혀지는 과거의 사실과 거대한 음모가 하나의 실로 묶여 이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구십아홉을 줄 수 있다던 따냐의 마지막 승부수가 펼쳐진다.  

 

 작가는 커피의 쓴 맛을 고종의 심정과 연결시키고, 그들의 대화 속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살짝 보여준다. 아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자신도 외국을 돌아다니며 사기를 친 따냐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이다. 그녀를 구속하는 사랑이나 조국이란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아이는 아이고 사기는 사기다.’라는 그녀의 말은 그녀의 삶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참 잘 읽힌다. 분량이 많은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속도가 대단하다. 만약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읽는다면 그 커피를 모두 마시기 전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큰 틀을 잡고 나아가면서 다른 곁가지를 많이 잘라낸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풍부한 자료나 깊이 있는 묘사나 갈등의 심화는 부족하다. 한 편의 멋진 이야기를 들었다는 기분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지겨운 소설을 싫어하거나 무거운 소설이 겁나거나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책을 읽기 원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점은 나에게 쉼터이자 약속의 공간이자 끝없는 욕망을 불러오는 곳이다. 지치고 힘들 때나 시간이 비어 있을 때 서점에 가면 그 막간의 시간을 채워주고 편안함을 준다. 친구 등을 만나기에 서점처럼 편한 곳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약속이 서점 앞이다. 서로가 정확한 시간에 만날 수 없을 때 서점처럼 부담 없이 시간 보낼 곳이 또 있을까? 예전보다 분명히 적게 가는 곳이지만 갈 때마다 새롭게 나온 신간과 서가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은 소유하고픈 욕망을 부채질한다.  

 

 

 저자는 우연히 만난 한 권의 책에 빠졌고, 육 개월도 되지 않는 시간에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었다. 그의 추억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옛 추억이 떠오른다. 비록 지금은 그렇게 읽지 못하지만 그 시절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기 위해 동네 곳곳의 만화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정보를 제공했다면 좀더 쉽게 찾아갔을 테지만 그 당시엔 발품만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 당시 돈이 없어 책을 사지 않았다는 것 정도랄까? 뭐 지금 그때 채우지 못한 욕망을 열심히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삶에 부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가 근무했던 서점이나 외판원 생활이 한때 가졌던 꿈을 대신 이룬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의 희망 사항 중 하나가 만화방 주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서점에 근무하면서 책과 함께 한 그의 삶이 부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주변에 책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 정보를 교환하고, 새로운 책을 누구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나는 작가의 삶과 성장을 서점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 속에 어떻게 책이 만들어지고 서점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낯익지만 잘 몰랐던 서점의 풍경은 지금도 가끔 가는 서점을 떠올려주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책을 좋아하고, 서점에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 그의 친구 리즈의 것은 옛 기억을 떠올려준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나오는 술 베르무트를 마시는 장면에서 <개선문>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마신 술들 맛을 궁금해 하고, 그 중에서 집에 있던 꼬냑을 몰래 마셨던 기억과 겹쳐졌다. 그런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헌책방이나 가판 등에서 생각하지 못한 횡재로 원하는 책을 얻게 되는 순간은 몇 달을 찾다가 우연히 그 책을 보고 가격도 저렴하게 구입할 때의 짜릿함을 떠올려주었다.   

 

 책과 서점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넘쳐난다. 그가 일주일에 다섯 번 서점에 간다고 하는데 살짝 부럽다. 최근 많은 책을 인터넷 서점을 통해 구입한다. 가격이 저렴한 것이 첫째 이유고, 자투리 시간을 내어 책 정보를 검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광고 문구에 혹해 나도 모르게 위시리스트로 옮기고, 주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을 조금은 덜기 위해 서점에서 그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 서점에서 느낄 수 없는 책의 질감과 향기에 취하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한두 가지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에피소드를 발견할 것이다. 쌓여가는 책을 둘 곳이 없어 헌책방에 팔고, 그 푼돈으로 다시 책을 사는 그의 모습은 수없이 반복한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은 책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수필 등에서도 자주 만나는 이야기다. 그리고 약간 우울한 것은 우리가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의 수량이 한정적이란 것이다. 요 근래 평소보다 많은 책을 읽고 있지만 새롭게 나오는 책들이 너무 많아 그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것은 엄청난 아쉬움이자 허탈함이다. 뭐 언젠가는 조용히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지만 탐서주의자 모두가 그렇듯이 책을 구입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책 구입이 멈추는 순간 책을 떠나는 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아라, 잡상인 - 2009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우승미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가슴이 따뜻한 소설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덮는 순간 그 따스함이 전달된다. 비록 처음 예상한 전개 방식은 아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한 청년의 성장기이자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큰 웃음을 전해주지는 않지만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려주면서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돌아보게 된다.   

 

 지하철 잡상인들을 자주 본다. 어떤 분은 능숙한 정도가 대단하여 베테랑임을 알 수 있고, 어떤 날에 물건을 팔러 온 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주저함으로 오히려 나 자신이 불안감을 느낀다. 보통 잡상인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틀 때면 짜증을 내는데 자신감 없이 주저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사연을 모르는 상태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동하는 순간에 만나는 잡상인은 역시 피곤하고 짜증나는 존재일 뿐이다.  

 

 잡상인들이 역 안에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번갈아 가면서 다른 전철을 타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번은 바람잡이를 내세워 물건을 파는 현장을 보기도 했다. 어떤 순간은 그들이 내세우는 물건에 혹해서 나도 하나 사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는 천원이란 금액이 주는 매력이다. 멋지게 상품을 광고하는 잡상인들의 말과 그 상품이 나에게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설명과 시연은 순간적으로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수많은 지하철 승객들이 이 물건들을 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가끔 이들이 판매하는 물건이 점포에서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본 적도 있으니 말이다.  

 

 잡상인에 대해 앞에서 길게 풀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박철이’(‘박철’이 아니다)도 원해서 잡상인이 된 것은 아니다. 자신을 키워준 조지아 여사의 협박에 못 견뎌 나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지하철 잡상인 계의 전설과도 같은 미스터 리의 문하생이 된다. 그의 판매실적은 경이적이라 모든 잡상인들이 그 비법을 배우길 원할 정도다. 그의 제자가 되어 그가 판매하는 것을 보지만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물건을 팔아보니 결코 녹녹한 직업이 아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판 것이 단 하나인 천 원뿐이니 말이다. 그 천 원조차 농아인 여자에게 줘버린다.  

 

 앞부분이 지하철 잡상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낯익지만 낯선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선을 끈다. 미스터 리의 비법을 전수받아 대박을 터트리려고 하는 노력을 보여주지만 쉽게 이루어진다면 비법이 아닐 것이다. 여기저기서 다른 잡상인들을 만나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사연들이 나온다. 전직 코미디언이었던 그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순간이자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한 전 단계다. 그리고 그가 기록한 최저 판매금액을 받아간 농아 수지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의 분위기는 변한다.  

 

 철이가 수지에게 조금씩 끌리고 그녀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경제적 결핍에 시달린 사람에서 육체적 결핍을 가진 사람들로 무대는 옮겨간다. 농아인 수지나 그녀의 동생이자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효철이와 그의 약혼녀 지효로 말이다. 그런데 이 부족한 듯한 구성원들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 그들 사이에 사랑과 유대감이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틈새를 조용히 비집고 들어가 한 구성원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사랑과 이해의 과정이 후반부인데 앞부분과 분위기가 너무 바뀌어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가득한 소설이다. 판매왕 미스터 리와 할머니 조지아 여사나 삼농을 사랑하는 지효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사연이 가볍게 다루어지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좀더 깊이 있게 다루고, 전면에서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에피소드들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으로 다가온 것은 역시 수지에 대한 철이의 사랑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준 그의 행동을 보면서 나의 사랑이 부끄럽고, 자그마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가 부럽다. 머리 싸매고 고민하면서 읽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당한 이야기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상당히 복잡하게 꼬여 있다. 그런데 즐겁고 빠르게 읽힌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비틀린 유머가 범람하고, 풍자로 가득하다. 한 번 잡으면 단숨에 읽게 된다. 물론 중간에 복잡한 전개로 약간 혼란을 겪었다. 뭔 놈의 정부조직이 ‘선행과 사회보건부’니 ‘나쁜 환경부’니 ‘종교 통제와 성 억제부’란 말인가! 이런 이름과 장관들은 순간적으로 읽는 동안 혼란을 준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둘러싸고 벌어지는 허술한 조사와 발표는 황당함 그 자체다.  

 

 황당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시대는 음악도 금지되고, 책은 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사람들이 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특권층만 가능하다. 제대로 사고하는 방법을 훈련받지 못했고, 모든 것은 버추얼 비전 등을 통해 경험하고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면서 감정에 충실하다. 물론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고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은 다르다. 그들은 권력 투쟁을 위해 열심히 음모를 꾸미고, 쉽게 해고당하는 것을 겁내고, 자신들의 연금을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모든 것이 이성적이고 명확하게 펼쳐진다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주인공 카르멜로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그에게 그날의 사건이 없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날의 사건은 바로 대담하게도 여 대통령의 핸드백을 훔친 도둑을 잡은 것이다. 물론 그가 이 도둑을 잡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 옆에서 달린 그에게 지고 쉽지 않았던 의욕의 결과일 뿐이다. 범죄가 그렇게 많지 않던 그곳에서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을 벗어나 복잡하고 이상한 모험을 겪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속에 드러나는 수많은 풍자와 비틀린 유머 덕분에 즐거움을 느낀다. 여 대통령이 된 것이 그녀의 외모 때문이고, 영웅이 된 그의 아이를 갖고자 정신도 못 차리는 그에게 간호사가 달려들고, 권력자들은 모두 쾌락과 평온함을 얻기 위해 ‘지옥 같은 천국’이란 야릇한 곳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카르멜로가 살인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을 때 그에게 살인 청부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편의 코미디 장면처럼 다가온다. 이 모든 것이 현대 사회에 대한 거대한 비판이자 풍자다.  

 

 첫 부분을 읽다가 ‘위기는 기회다’란 동양 속담을 인용하면서 한국을 말한다, 그보다 이어서 개고기와 야구와 월드컵을 이야기하면서 약간의 비난을 가하는데 순간 불편함을 느꼈다. 아마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에게 패한 것을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펼쳐지는 황당한 사건들은 나 자신조차 충분히 생각하고 분석할 틈을 주지 않는다. 속도감과 황당한 이야기가 재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매력은 많다. 유머와 풍자가 바탕으로 깔려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황당하고 허술한 듯한 구성이 끝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어지는 에필로그들은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중간 이후 펼쳐지는 누가 살인범인가 하는 미스터리는 사실 황당한 전개에 말려 그 힘을 발휘하기보다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흘러간다. 이런 전개와 구성이 작가의 의도에 의해 끝까지 힘을 잃지 않으니 즐거움도 지속된다. 만약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엄밀하게 구성되고 분명한 진지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이 소설은 펼쳐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소설들과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