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도서관에는 구판이 있었다,

개정판과 비교해보니 몇몇 부분이 더 첨가 되었고 빠진 부분은 모르겠다,

굳이 개정판을 찾아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거 같다,

 

요즘 복지관에서 상담수업을 듣는데 강사가 하는 말 중에 와닿는 것

심리학이란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시작된 학문이다,

심리학 이론은 결국 심리학자 각각이 자기 문제를 고민하다가 만들어낸 이론이며

세상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의 심리학 이론이 나올 수도 있다,

꼭 하나의 이론에 세상 모든 사람을 끼워맞추려고 하지 마라

맞지도 않을 뿐 아니라 타인을 오해하고 점점 더 모르게 되는 수가 있다,

심리학이란 결국 타인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타인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나를 잘 안다는 것도 타인을 아는 것 만큼 중요하다,

 

여성학이란 학문도 결국은 사람을 위한 사람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세상은 편리하게 남성과 여성으로 나ㅜ면서 여성들은 이러이러하다는 판단을 하고 평가를 하지만 세상에는 여성의 수만큼 다양한 여성학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저 남성의 대척점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무수한 다름이 존재하고 하나의 이론으로 종합할 수 없는 개성들이 있으며 제각각 안고 있는 문제들의 크기와 질감도 제각각이다,

같은 성안에서도 나이 인종 계급 학력  직업 지역 등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제각각의 여성들을 특징지으며 서로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일이 같은 여성임에도 저이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고 저이에게 지독한 생사의 문제가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할수록 어렵고 할수록 꼬여가며 수학처럼 딱 맞게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이다, 어떤 작품에서 묘사되듯이 가장 뜬금없고 맥락없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이렇게 저렇게 묶어보고 조합해봐도 어딘가 어설프고 튀어나온 부분이 거슬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누군가의 오랜 연구를 통해 세상에 나온 어떤 이론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모두 적확하지 않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고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결국 세상에서 내가 아는 부분은 세상의 극히 일부분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함만 남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이고 어쩌면 여성학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책을 읽으며 불쑥 불쑥 떠오르는 감정이나 분노  그리고 끄덕이게 되는 이해들을 어떻게 정리해야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그저 내가 밑줄 긋고 기억해야겠다고 결심한 부분들을 못믿을 내 머리보다는 무딘 연필끝을 믿는 마음으로 기록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기록 역시 누군가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에게는 뜬금없고 맥락없는 부분일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란 사람은 이런 부분에 와닿았구나  하고 받아주면 좋겠다,  이해까지는 아니고 그냥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마음만 부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격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랜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중략)

 

여성 이 독특한 정치적 약자들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자기를 '자기 편'을 부정할까? 아이를 낳지 않거나 레즈비언이거나 담배를 피는 여성은 그 연예인의 편견을 깨는 '대중적인' 여성운동가가 될 수 없는가? 지배 계급으로서 남성은 5천년동안 피지배 게급인 엿어을 때리고 죽이고 교환하고 사고 팔고 해고하고 착취해왔다, 그렇다면 '적'이 아닌가? 왜 여성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는 것을 두려워할까?

어떤 면에서는 억압집단으로서 자본가와 미국이 저지른 잘못보다 억압집단으로서 남성이 행한 잘못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물론 나는 남성도 자본가도 미국도 단일한 정체젓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응ㄴ 적이 아니라는 여성들의 자기다짐과 잠자를 안심시키는 발언들 그리고 남성과 대립하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배후에 혹시 '가부장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자리집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34-37

 

마지막으로 여성학에 대한 편견 두가지 여성학은 편협하고 깊이가 없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르므로 학문이 아니다 라는 주장과 '여성학은 현실과 상관없이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한다는 견해는 사실 같은 애기다, 이것은 모두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학문 개념에서 나온 편견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여성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믿느 ㄴ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므로 여성학이 여성 현실과 거리가 있어서 여성운동에 도움이 안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법학이나 물리학의 어려움은 그 학문을 비판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에 언제나 여성학이 어려운 것만 문제가 된다, 나는 여성학이 어려워야 하고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여성학이 여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않은 세계관때문이다, 여성학의 내용이 여성 '현시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는 없다, 여성학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여성학이 쉽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런 여성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44-45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대적 인권 개념과 인간의 범주에서 여성을 제외하려는 가부장제 사이의 모순은 모성의 발명으로 극복되었다, 아동기와 모성의 창조는 남성 가장 노동자를 개인으로 상정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전개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구에서 존 로그이전 바로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원죄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성 이데올로기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어떤 것이라도 쓸 수 있는 백지 상태라는 관점과 함께 탄생한것이다, 이후 어머니는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아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엄청난 부담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조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한다. 아이를 남기고 폭력 가정을 탈출하는 엿어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순결이 그러하듯이 모성애 역시 여성의 목숨과 맞바꾸어야 한다는 맛어 사회의 메세지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61

 

 

 

포르노에서 남성 관객혹은 남성화된 관객이 느끼는 '쾌락'은 권력 행동의 결과이다,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남성 소비자가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으로 만족할 때 발생한다,

 

영화 <원초적 본능>의 감독 폴 벤호벤의 후속작 <쇼걸>은 제목답게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벗었지만 기대와 달리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이 예상치 못한 결과는 성차별 사회에서 포르노 누드 산업이 생산하는 에로틱한 쾌락이 어떤 권력 관계에 서 가능한지 보여준다, <쇼걸>은 쇼걸들의 벗은 몸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여성의 벗은 몸을 보여주어 남성 관곅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쇼걸들의 연대와 자매에를 강조했기 때문에 돈벌이에 성공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권력 구조때문에 포르노 산업은 성별화된 정치경제학에 의존해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은 포르노를 만들어 돈을 벌거나 구매하는 주체가 되기 어렵다,

                                                               94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냉정하다, 건조하게 다시 쓴다면' 고정관념이 사실을 만든다'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의 분열처럼 성차별 사회에서 인식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은 늘 '내가 본 것을 믿을 것인가 남성이 말한 것을 믿을 것이가"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대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공적인 문제 정치적인 ㄴ사건이라기 보다는 '선정적인'이슈 지면 편집 용어로 말한다면 '쉬어가는 코너"쯤으로 여겨진다, 나는 여성 폭력을 다루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접근처럼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비참한 현실과 남성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혹은 대책을 논하면서 엄격한 법 집행과 의식 개혁을 주장할 생각도 없다, 이 글은 가정폭력의 실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각에 대한 바판에 초점을 맞춘다,

                                         115

 

 

나는 가정도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인간 사회인 이상 폭력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대로 가정에서 폭력이 없을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정 폭력의 발생 기제라고 본다, 폭력으로 평화로운 가정이 깨져셔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으로도 (남성 중심적)가정이 깨지지 않은 것이 더 문제다,

비바람이 집안에 들어가도 법은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가 이제까지 가정폭력을 방치 지지하는 논리였다, 물론 이 논리는 거짓이다, 같은 가정 내 폭력인 아동학대나 노인 학대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불개입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또한 호주제 상속세 가족께획의 예처럼 국가가 가족/ 사생활 에 침투하는 논리는 남성 국가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이다,

무엇이 사회이며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정과 사회는 다른가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 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후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마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역활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난ㅁ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응ㄴ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 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124-125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청산을 요구했다.

성노예제 조직과 관리라는 일본의 전쟁범죄가 일제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강제 동원과정에서 협조하고 위안소를 위탁 경영한 한국인 관리자, 위안소를 찾은 한국인 병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일부 군대에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자행된 여성의 성착취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사실상 방조된 미군 기지촌에서의 성매매 문제도 청산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군 위안부'뮨제를 민족모순으로만 제한하는 시각을 비판하면서 성폭력과 성매매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여성 인권 침해 사안으로 파악한다, 때문에 일제가 물러간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 인권 침해인 성폭력과 성매매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현실까지도 청산의 대상에 포함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남성중심의 획일적인 언어와 인싱ㄱ이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수용이전에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 남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의 급진적인 인식은 나와 내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놀라게 했지만 곧바로 매도 당했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은 공식 영역 과 비공식 영역 모두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지만 여성에게는 가족안에서 출산을 위한 성만을 허용한다, 남성은 두 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들지만 여성이 비공식 영역의 성적 제도와 연관되는 것은 낙인을 의미한다, 특히 성판매에 종사하는 엿어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극심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성활동이 성별에 따라 이토록 의미가 다른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여성의 자아와 인격 가치를 좌우하는 주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그래서 성폭력과 성매매 제도가 여성을 통제하는 권력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한 사실은  이교스의 발언에 대한 온국민의 분노 그 감정의 정체가 성판매 여성에 대한 완벽한 타자화와 혐오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자발적인 성판매 여성에 대한 혐오여서는 안된다, 나는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선판매 여성이 라는 구분보다 성폭력과 성매매가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 여성들은 일제에 의해 집단 성폭력을 당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성폭력은 만연해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기지친 성판매 여성들 20044년 여성 노동인구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에 이른다는 성산업 종사 여성들 그리고 밤길 걷기를 두려워하는 여성들의일상적 공포는 모두 같은 원인에서비롯된 것이다,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하면 개인적인 일이고 일본 남성에게 당하면 민족적인 아픔인가? 성폭력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적인 문제다, 그르므로 여성을 순결한 피해여서과 타락한 성판매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방식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자발과 강제라는 반대 현상이지만 여성의시각에서는 구별될 수 없는 연속선이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과 성매매의 원인이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여성을 남성의 성 권력의 희생자와 자발적으로 남성의 욕구에 부응한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결국은 남성을 위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나는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한국 여성들이 성매매로 전쟁에 참가했다고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며 당연한 사과 배상해야한다고 생각한다,

 

                                                                             140

 

 

어성에게 섹스와 모성은 자원이자 억압이다, 남성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 기제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가도 하기때문에 억압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의 원인이다, 남ㅅ어에게는 모순이지만 여성에게는 연속선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자 억압이라는 사실은 성매매 와 성폭력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주체는 오로지 남성이라는 의미이다,

주체와 피해자의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는 남성 주체의 이해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여성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는 겹칠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설정된다, 주체 아니면 피해자다, 그래서 여성이 행위자 주체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피해는 곧 피해자화로 연결된다, 피해는 타자화를 동반하지 않지만 피해자화는 타자화를 견제한다,  

피해여성은 남성 주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의 입낭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더럽혀진 여자이거나 기껏해야 무기력한 희생ㅇ자지 성별 계급투쟁의 생존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ㅓ한 남성의 시각이 곧 사회의 시각이 된다, 특히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피해자화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지부한 가장 오래된 타자회 방식이었다,

 

                                                                     -145   146

 

 

프라이버시는 개인의 개념과 함께 탄생했는데 이때 개인은 중산틍 남성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프라이버시 개념은 중산층 남성의 프라이버시다, 프라이버시는 계급화 성별화 된 언어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이간으로 간주되지 않기때문에 프라이버시 역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9평 아파트에 산다면 9평이 그/그녀의 프라이버시 공간이 되고 50평 아파트에 산다면 50평이 사적인 공간이 된다, 남성에게 집은 프라이버시의 공간이지만 여성에게 집은 노동의 공간으로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은 집에서 나와 공적인 노동응ㄹ 할 때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 가정 내 폭력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은 주된 근거는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였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은 이간이 아니므로 여성의 프라이버시는 남편에게 속해 있으며 폭력당하는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공 사 영역의 분리 대립은 허구이다, 공적 체계와 생활 세계를 대립시켜 체계에 의한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를 우려했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비판 이론 역시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공 사 분리 이데올로기의 변형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은 인권의 시각에서 정의되거나 문제화되지 않고 가족주의 민족주의등 남성 공동체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 억압에 반대하는 이유조차 여성 인권을 중심으로 논해지지 않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여아 낙태는 여아의 생명권과 어머니 여성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성비 불균형으로 남자들이 장가 못간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정신대 문제는 피해여성의 인권이 아니라 민족의 수치를 중심으로만 는의된다, 가종폭력의 해결책 역시 피해여성의 공포나 고통의 해결보다 남성 중심적 가족 유지를 더 강조해왔다, 문제의 원인이 대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성폭력인가 하는 성폭력 정의의 배제와 포함의 원리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반 성폭력 담론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계가족 보호라는 남성 공통체의 이해에 더 기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 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간의 성폭력 성전화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가부장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뷴에 대한 침해죄- 사유재산권 침해 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 규범때문에 성폭력 특별볍이 있어도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강간은 처벌하기 어렵다 자기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다른 남성의 가임가능한 부녀가가 아니므로 남성 연대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은 억압적인 제도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에게 사회 구성원으로 안정된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노인이나 장애인 특히 여성 노인이나 여성 장애인은 탈성화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성욕이 없거나 성별 정체감이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 정체성이 우선시되는 성별 사회에서 탈성화된 사람들은 인간외 혹은 인간이하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성주의 사유의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였다, 우에노 치즈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서화된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여성의 역사가 출발하다보니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여진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된 남성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를 남성을 여성주의 자로 여성을 성판매여성으로 바꾸어 본다면 무리일까? 이런 치환은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비장애 여성과 장애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관계에 모두 적용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존 나의 세계꽌과 갈등을 일으키는 현실이 나타났을 때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본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된다. 다른 방법은 자기 단절을 통해 자신을 현실에 개방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방법.

어떤 시선을 세상을 사회를 사람을 여성을 볼 것인가

그것부터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상식이라고 믿었던 세상의 잣대가 실은 인류의 절반만을 위한 기준이었고

그 나머지 절반은  앞 서 말한 절만이 만든 기준에 무조건 자기를 우겨넣어야 하거나 반대로 그대로 무지하고 이상하고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 상식은 과연 누구를 위한 상식인지

자꾸 내가 가진 틀을 뒤집어 보는 연습을 해야한다,

우리는  ~ 해야한다는 당위의 말 안에 우리가 누구인지

해야한다는 것이 정말 그러해야하는 것들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가부장제 안의 성차별 역할의 의미 성판매 여성 노인 장애인 등등

세상에는 참 많은 우리 밖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내가 우리 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우리가 어떤 의미의 우리인지 고민해 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그저 내쳐지지 않음에 안도하고 그들이 나랑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했다,

내가 여성으로 지금까지 커다란 어려움없이 무탈하게 살아온 것은 내 능력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운이 좋았던 것이고 한편으로는 나는 적어도 주류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많이 무지하고 생각하지 않았기때문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왜?라는 단서를 달지 않고 만족한다면 어쩌면 더 편할 수 있지만 이미 알기 시작했고 이유가 자꾸 궁금해진 이상 나의 안락함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다,

내가 이상하다고 부당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나의이기심이거나 못된 속성이 아님을 이젠 안다,

물론 개인으로서 나도 당연히 내 욕심이 우선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사소한 일에도 누군가에게는 권리인것이 누군가에게는 욕심이 되는 것

그건 올바른 것이 아니다,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가 가부장제를 만들고 그 오래된 제도는 뼈속까지 어떤 단 하나의 기준을 갖게 하고  상식은 늘 정치적으로 옳다고 믿었다

의심하는 일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하는 소리을 들어보는 일

나의 불편함을 소리내어 보는 일

그건 정치적이며 동시에 삶이다,

 

여성학 도서를 읽으며 내가 달라진건

많은 여성학 지식을  갖게 되고 더 똑똑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는 것

다르게 보는 것이 많이 불편하고 힘들지라도 하나하나 새로 배우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가진것이다,

 

구판이라 어쩌면 개정판에서 많이 바뀐 부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읽으면서도 지금도 이래? 싶은 부분이 많이 보였다,

개정판에서 바뀌었다면 다행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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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50명의 사람들이 풀어내는 제각각의  50가지 이야기

할머니가 오랜 기간동안 모아서 다락방에 꼭꼭 챙겨놓은 천조각들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고  뜬금없기도 하고 사소하고 지리하고 때로는 어정쩡하게 뚝 끊어진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크다란 조각보를 만든다,

결국은 사람,,, 그럼에도 사람,

통계뒤에 사람이 있고

지역뒤에도 사람이 있고

학생  주민 시민 국민이라는 이름도 결국 제각각 사람이 있다,

사람이 우선이라면서 늘 사람은 젤 뒤전이다,

국민의 심판을 달게 받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국민이 제각각 다양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나 하는 말일까

국민이 판단할 거다, 시민의 힘이다 학생들은 어떠어떠해야한다,...

말하기 쉽지

그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는  존재가 아니라 제각각 하나의 존재라는 것

그건 늘 잊고 산다,

세상의 사람은 세상의 사람수만큰 각기 다른 성격이 있고 배경이 있고 감정이 있다,

그런데 자꾸 그걸 잊고 산다, 나부터..

이러이러하니 비정상이고 저러저러해서 이상한 사람이고  이렇게 행동하니 튀게 되고 너무 나데고 부담스럽게 굴고 까칠하게 굴고 무심하게 굴고  나랑 안맞고 나랑  취향이 틀리고 나랑 사고가 달라서.. 하면서 판단한다, 그 판단의 기준도 결국 사람의 수만큼....

 

그렇게  50명이 넘는 사람의 이야기가 제각각  자기 이름을 제목으로 걸고 펼쳐진다,

시시한 이야기도 있고 더 들어보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나랑 닮은 사람도 있고 내가 무지하게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도 있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은.. 없다, 제각각 다르긴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알고 있거나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기서  소소하게 지나치던 사람이 저기서는 주인공이고 저기의 주인공은  다음 이야기에서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하나하나 가볍게 읽다가 "권나은"의 이야기에 목이 꽉 잠겨버렸다,

많이 친하지 않았고 많이 다르지만 좋아했던 친구

그 친구 사고로 죽었다,

죽은 이유가 드러내기에 꺼림칙하고  어쩌면 사람들은 배려하는 차원에서 혹은 입에 올리기 뭣하다는 이유로  그 죽음을 덮으려고만 한다, 그렇게 덮여진 죽음앞에 나은이는 마땅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죽은 친구 승희가 가졌던 물건들을 모으고  나중에 그 물건들을 입고 쓰고 승희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 ... 그렇게 조금은 달라지고 이상해진 나은의 행위들이 결국은 애도였다

 

정말이야 대학가서 잉ㅂ을거야 말하고 나니 그게 원래부터의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승희 옷을 입고 대학에 갈거야, 승희 옷을 입고 다닐 거야, 내가 입으니까 하나도 안 이쁘지만 어쩌면 졸업할 때까지 더 친해지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졸업하고 나선 한 번도 못 만날 수도 있지만 나만 승희를 좋아했던.... 나은은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고 방에 혼자 있고 싶었다, 가족들은 나은이가 커서 중학생 같더니 사춘기가 늦게 왔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은으로서는 그 흔한 설명이 차라리 나았다,

아마도 잊어버릴 것이다, 승희를. 나은은 그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다, 왜냐하면 벌써 중학교 때는 잘 기억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고작 고등학생인데도 몇년 전의 일들이 희미하다, 승희가 체육대회 때 계주를 뛰었던 것 같다,  계주를 이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응원을 했던 것만 희미하게 떠오른다, 반바지가 잘 어울렸던 승희의 일자 다리는 엄청 잘 뛰었었다, 종아리와 발목이 거의 비슷한 일자였다, 스포츠 만화주인공 다리 같았다, 승희가 철봉에 앉아 있던 것도 기억난다, 권나은 학원가냐? 너같은 애들을 뭐라고 부르게? 설치류. 설치류라고 부른대

학생이 죽으면 장레버스가 학교 운동장을 한바퀴 돌고 가던데 그런거라도 했으면 나았을거다, 텔레비젼에서만 하는 건지 승희는 오지 않았다, 승희어머니가 너무 여력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하신게 틀림없었다, 장례식장에도 선생님들만 갔는데 마치 승희가 잘못해서 죽은 것처럼 승희의 장례식장에 가면 뭐라도 옮을것처럼  못 가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것도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승희가 뭐 어때서? 승희를 나쁜 소문쯤으로 취급하는 건 말도 안돼. 승희는 정말 좋은 애였어

 

                                                                 P156

 

 

혼자 분하고 서러워서 눈물을 흄치다가 다음 장의 소개팅 이야기에 웃음이 난다,

울다가 웃으면 안되지만,,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죽도록 서럽다가도 한마디에 벙긋 마음이 풀어지는 일

소개팅은 잘 이어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참 서로에게 예의바르다는게 마음에 드는 에피였다,

그렇게 읽다가

 

기부금을 투명하게 쓰고 세세하게 기록하고 그걸 공개하고 나면 또 1년이 갈 것이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채 다친 동물처럼 실려온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그 일이 이제 지나갔다고 말해주면서 1년이 갈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또 바보같은 소리를 할 테고 거기에 끈질기게 대답하는 것도 1년중 얼마 정도는 차지 할테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누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렷다, 본관의 입원실의 낮은 층 창가에 있던 사람이 잠깐 망설이더니 설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설아도 마주 흔들어주었다, 창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바닥만큼은 다정했다,

 

 

사람은 사랑때문에 웃고 사람때문에 울고 사람때문에 상처받고 위로받는다,

사회적인 존재인 사람은 그렇게 관계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고 모두에게 만족할 수도 없다...

한사람 한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는 방법이 좋았다,

모두를 모아놓고 그리고 안전하게 돌려보내 준 결말이 좋았다,

예전의 나라면...

이렇게 안이한 해피앤딩이라니... 하면 분개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어떤 사고도 없이 어떤 슬픔도 없이 무탈하게 모두가 안전하게 마무리 되는 게 좋다,

누구도 멋대로 나서지 않고 누구도 타인에게 지시하지 않으면서

각자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동원해서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마무리가 좋았다,

 

지금 현재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람때문에 머리아프지만

그래도 해결책 역시 사람임을 알고 있다,

사람이어서 저러면 안되는데.. 사람이라서 짐승만 못하기도 하고 사람이라 곧 들킬 꼼수를 쓰고 사람이라서 뜬금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라서 다행이고 사람이라서 행복한 일이 조금은 더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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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약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언제나 이 물음앞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휙휙 지나간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여러가지 계산들

어떤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유리할까?

아이가 생기기 전? 대학시절? 결혼전?  아니면 고등학교 때로 가서 다시 빡세게 공부를 해봐?

어디로 가야 내 인생이 가장 아름답고 풍부할지 머리를 굴리지만

어떤지점도 만족스럽지 않고 어떤 지점도 포기할 수 없다,

아예 다시 태어나는건?

그렇게 질문앞에서 망설이는 동안 그 질문은 스르르 사라진다,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갈팡질팡이다, 도데체 어느 지점으로 돌아갈까?

가능하지도 않은 물음앞에서 진지하게 오래 고민한다

다만 변한건 어느 지점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

시간을 되돌린다 한들 지금의 나와 다를까?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뿌듯하지도 않지만 부끄럽거나 후회스럽지 않다

아니 후회홰도 소용없다는 마음이 강해서일거다,

되돌린들 나는 또 같은 지점에서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같은 시간에 같은 실수를 하고 엉뚱한 일을 저지르거나 우물쭈물하다고 놓칠것이다,

어쩌면 그 지점이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선택에 다름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나는 역시 지금의 나의 삶과 많이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될것이다,'그러니 굳이 되돌아 갈 이유가 없다,

 

단편속의 인물들은 지금의 나에게 또다른 삶이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고민하지만

결국의 지금의 삶을 받아들인다,

남들 눈에는 초라하고 평범하고 별것 아니지만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내는 일도 만만찮은 일이라는 걸  안다, 다른 내 모습이 있다거나 다른 선책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지금까지 나도 그런 기대로 살아왔을 것이고 지금 내 모습도 그런 선택과 기대의 결과일 뿐이다,

 

비슷비슷하고 한 번쯤 스치며 혹은 진지하게 생각해 좠을 지금 여기와는 다른 어떤 삶에 대한 고민이 각각의 단편에 담겨있다,

스윽 보면 닮아보여서 그게 그거 같은 이야기지만

오래 들여다 보면 제각각의 이야기가 숨어있고  결이 다르다,

 

 

#  2

 

마지막 단편 "어딘가 있을 너에게"

별거 아닌 단편에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남은 시간 동안 그 때일을 복기하는 사람

그때 내가 아이를 잡지 않았더라면

주먹밥을 만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앞 차를 탈 수만 있었더라면

 

그때 내가 세탁기를 배달받지 않았더라면

운반해주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사랑하는 대상은 없다,

그 순간의 내 선택이 내 행동이  어쩌면 나의 배려가 그런 사건을 만들어 낸건 아니라고 이성은 나에게 끊임없이 말해주지만 나도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내가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조금만 더 배려했더라면... 자꾸 모든 원인이 나에게 돌아온다,

 

분명 이 여자는 키치를 찾으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겠지, 그리고 키치를 찾지 못하거나 더 슬픈 현실이 펼쳐지면 자신의 일처럼 울어주겠지, 어느 쪽이든 자신의 슬픔과 비교하는 일 없이 그렇게 해주겠지 그리고 나도 이 여가가 슬픔을 떠올릴 때마다 줄곧 슬퍼하겟지 아마도.

 

슬픔이나 후회는 단 1 밀리그램도 줄어들지 않지만 크기의 차이가 아닌 무게의 차이도 아닌 그저 그것을 짊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공명한다,. 그것이 이렇게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니와코는 이제야  그것을 깨닫는다,

 

아들을 잃은 요다와 고양이를 잃은 니와코

누구의 슬픔의 무게가 더 큰지는  중요하지 않고 서로 공감하고 공명하게 함께 울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뫁으로 올라올 일만 남은 낡고 망가지 세월호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함께 공명하고 함께 울어주어야 할 시간이다,

그 때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그런 표정 그런 말투는 하지 말아야 했느데 하고

끝임없이 내 속에서 자책을 찾아내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아니라고 해주는 것보다

함께 울어주는 일 울음을 안아주는 일... 그게 더 위로가 된다고 말해준다,

 

 

무심하게 되돌릴 시간이 어떤 의미가 있나

이미 생은 지나버린걸... 하는 마음으로 단편을을 읽다가

마지막에,,, 그럼에도 간절하게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다시 쉽게 다 안다는 듯 말하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누군가의 간절한 시간은 언제나 존재한다,

 

#  3

 

미스터리물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한 단편들이다,

삶에서 내가 모르는 귀퉁이가 있다면 그것 역시 미스테리일 수 밖에...

내가 모르는 부분들 알지 못했던 부분들 그리고 덮어버릴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한

삶은 어떤 면에서 미스테리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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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늑대 작은 늑대 - 프랑스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83
올리비에 탈레크 그림, 나딘 브룅코슴 글, 이주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동생이 창피해,...

 

큰 아이가 7살쯤에 살짝 한 말이다,

깊이 공감되었다,

사실 엄마지만 나도 내 자식이 창피할 때가 많았다,

지금은 많이 사람되었지만.... 그 당시는 본인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라며 스스로도 의아해한다,

 

작은 아이는 3살부터 5살까지 까다롭고 예민하기가 끝이 없었다,

멀쩡하게 집에서는 잘 있다가 외출만 하면 낯선 사람만 보면 누군가 타인만 보면 아주 예민하게 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탄 이웃이 있으면 내릴때까지 째려보고 있거나   엄마 따라 낯선 곳에 가면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두시간도 세시간도 그러고 있었다,

고집에 땡깡에... 그런 동생때문에 늘 뒷전이던 큰 아이가 한 말이다,

쟤가 너무너무 창피해...

그런 힘든 시간이 지나고  지금도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둘은 참 다르고 참 어긋난다,

한 놈이 기분좋게 다가가면 한놈이 팩하고 돌아서고 한놈이  뭐라고 하려치면 한놈이 문닫고 들어가고... 마주치면 싸우고  오죽하면 서로 자기 폰에 전화번호조차 저장하지 않는다,

둘이 사이가 좋아지는 순간은 엄마에게 혼날 때나 뭔가 아이돌 이야기하면서 나는 모르는 말들을 주고받을 때.... 아주 잠깐....

오죽하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싸움이 끝나겠구나 ...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나중에 한놈은 동쪽 끝에 한놈은 서쪽끝에살아라... 하고 말았다,

그래도 지들은 .. 쥐어뜯고 싸우는게 서로 무시하고 말도 안하는거보다 낫지 않냐고... 하지만

뭐 그것도 그렇다고 위안한다,

큰 녀석은 저대로 작은 녀석한테 트라우마가 많다, 동생때문에 양보한 일이 많고 손해본 일이 많고 늘 언니니까 큰 아이니까 참아라 했던 말... 양보를 당당하게 받던 작은 녀석의 모습 등등이 아직도 상처가 되고 .. 작은 놈은 제 언니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건 지나간 일인데 쪼잔하다고 자기는 뭐 잘하기만 했냐고 하며 상처받는다

이놈 이야기를 들으면 이놈이 짠하고 저놈 이야기를 들으면 저놈이 짠하고...

이래저래 엄마는 솔로몬왕이 될 수는 없다,

공정하다는 건 누구에게나 상처고 불만일 수 밖에 없다,

 

 

큰 늑대는 호자 나무아래 살다가 저기 멀리 한점처럼 다가오는 작은 늑대를 만났다,

자기보다 크면 어쩌나  어떤 녀석일까 큰 늑대는 혼자 몰래 걱정이 많고 겁이 났다,

그러나 작은 늑대를 보며 마음이 놓인다, 나보다 작구나...

모른 척 무시하지만 자꾸 신경쓰인다,

살짝 곁눈으로 보고 조금 무심하게 자기것을 나눠주고

자기를 따라해도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고

그리고 혼자 나무아래 두고 산책을 나간다,

점점 숲으로 가까이 갈 수록 작은 늑대는 멀어지고 점으로 보이다가 끝내 보이지 않게 되지만

큰 늑대는 알고 있다, 작은 늑대가 거기 있다고...

보이지 않아도 존재함을 알고 있다는게 크게 뿌듯하다는 것도 알았다,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나무아레로 돌아오니 작은 늑대는 없었다,

당연히 있을거라고 믿었던 존재가 사라졌다,

큰 늑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슬플 뿐이었다,

작은 늑대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큰 늑대는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짐도 했다,

작은 늑대가 자기보다 커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늑대가 여전히 작은 모습으로 왔다,

 

"네가 없으니까 쓸쓸해..."

둘의 마음이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둘은  기분이 좋았고 아마도 안도했을 것이다,

 

친구 사귀기 타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이 책이 내게는 작은 동생을 만난 큰 아이 이야기였고

큰 아이를 만난 작은 아이의 이야기처럼 읽혔다,

타인은 불편하고 낯설고 거북하다,

그런데 가만 보고 있으면 좋기도 하다,

뭐라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피시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게 든든하기도 하고 배꼽아래가 간질간질한 어색함이기도 하면서 그 간지르움이 싫지 않다,

큰 녀석도 작은 녀석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건 내 동생이야" 하면서 누구도 손도 못 데게 하던 시절도 있었고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제일먼저 안아주고 자전거 뒤에도 태워주던 때도 있었는데...

작은 놈이 자기 주장을 하면서 둘의 평화는 깨어졌다,

그래도 없으면 쓸쓸하지 않을까

그게 설령 엄마의 착각이고 바람이라도 .... 그렇게 믿는다,

 

아주아주 얄미워도 절대 때릴 수도 없고 말로 논리로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너무너무 무식해서 말을 함께 할 수도 없고 (세상에서 무식이 제일 쎄다는 걸 쟤를 보면 알수 있어... 라고도 했었다)  자긱보다 30센티가 작았던 동생이 어느 순간 자기랑 10센티도 차이나지 않게 되고 어는 순간 나보다 커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고 지금은 무식이 철철 넘치지만 어느 순간 쑥 자라서 나보다 좋은 학교를 가고 더 잘되면 어쩌나 질투도 나면서.... 행여 저렇게 굴다가 내가 저 놈까지 책임져야하나 싶은 마음도 있고... 뭐 그렇게 매일매일이 복잡하다,

 

작은 놈대로 언니는 어렵다가 만만하다가 측은했다가  고소하다가  업으면 자꾸자꾸 빈 방을 열어보게 되고 있으면 깐죽거리고 뭐 그런 존재일 것이다,

 

늙은 엄마는 감수성이 점점 풍부해져서 소소한 그림책에 울컥하고 있는데

애들은 그냥 읽고 만다,

그림책에 감동하고 재미있어할 순진한 나이는 지나버렸고  그래서 뭐... 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춘기라 그림책에 자기들을 반영할 줄 모른다,

그래도 둘이 서로 죽일 듯 싸우는 시기는 지났고

서로가 측은해지고 그려러니 하는게 꼭  중년에 접어든 부부같단 생각도 든다,

뭐 좋아사 사나... 이제 익숙하고 서로 측은하니 봐주는거지 뭐.. 그런

 

이젠 나도 지쳐서 둘이 싸워도 집 천정으로 고성이 휙휙 날아다녀도 나는 모른다,

그러다 조용히지면 그냥 물어볼 쭌이다,

누가 이겼니?

 

아마 큰 늑대 작은 늑대도 서로 좋기만 하진 않겠지

그림책은 이렇게 끝나지만... 그 뒤의 두 늑대의 삶은 계속될테니까,,,,

동화는 동화일 뿐이고 현실은 누구나 팍팍하고 낭만적이지 않다.

고로 나도 두 아이의 전쟁이 이젠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다들 그러고 살테니까,,,

 

그림책이 동생을 가진 언니를 위로하지도 언니가 있는 동생에게 감동을 주지도 않지만

두 아이를 가진 엄마에게는 참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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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의 나이

나이보다 늙어보이는 깊은 주름을 가진 외모

그와 다르게 아직도 탄탄하게 살아있는 근육과  빈첩한 반사신경

그녀의 직업은 청부살인업자이고  그들끼리는 방역업자로 통한다,

쥐 바퀴벌레 등등 사람에게 해로운 해충이나 미물을 없애나가는 일을 한다는 방역업자가 그들의 일이다, 결국 사람에게 해가되는 건 그런 미물만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가장 해롭고 가장 두려운 대상은 사람이다,

사람을 위해 다른것이 아닌 사람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나이든  조각이다

'조각'이라는 명칭도  주인공의 본명은 아니다,

어느 하나 빈틈 없이 일을 완벽하게 깔끔하게 해치운다고 붙은 별명

그 세계가 본명을  드러내지 않는 세계이니만큼 주인공도 그렇게 하나의 가면속에서 삶을  이어간다

이제 65세 세속의 어떤 일을 하건 은퇴할 나이가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그 조각이 어는 순간 자신의 한쪽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삶이었다,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 무엇엔가 욕심을 내고  지켜야할 무언가를 가지는 순간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연민이 남고 미련이 남아있다면 주저할 수 밖에 없고 그 순간의 주저앞에 목숨이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쳐내고 건조하고 매마른  강팍한 줄기하나만 남겨놓은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한때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고 누군가를 욕심낸적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그 마음이 되돌려주었던 피비린내나는  앙갚음에 살기위해 그리고 누군지모를 누군가를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조각이 어느 순간 방역과정에서 몸을 다치게 하고 강박사를 만나고 그의 무심하고 다정함에 조금씩 마음이 무너진다, 그건 어떤 연애감정이라기 보다  오랫동안 꽁꽁 묶어놓았던 저 심연아래 감정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실금을 만들어가다가 어느  부지불식간에 그 틈으로 스며나온 물기처럼 올라온 감정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받아본 진심의 감정이나 무심한 다정함이 조금씩 그 균열을 넓히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주는 대상이 생기는 것

그렇게 무언가 지켜보고 싶고 잘 살았으면 바라게 되는 대상이 생기는 것은 위험하다

조각에게도 위험하지만 그 대상에게도 위험하다,

 

그것이 나이듦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래된 외로움의 끝에 드러나는 지쳐버린 순간이 왔기 때문일까

알지 못한다,

조각이 65세가아니라고 해도 오랫동안 억누르고 살아왔던 누군가가 방심하던 순간 불쑥 내 바운더리를 침범해온 다정함에 무너지지 않았을까

이제 그만 긴장하고 살아도 되지 않나 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사실 이 소설이 나왔던 시점에 읽었었다,

그때는 너무 길게 늘어지는 문장과 도데테 65세의 킬러라니.,

그리고 소설 말미에 그렇게 피비린내 풍기는 난투극을 겪고도 멀쩡하게 살아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몇년되지 않은 과거지만 그때의 나는 젊었거나 아직도 억누를 수 있을 힘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읽게 되면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지루하고 길을 잃기 쉬운 그 긴 문장들도 어쩌면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이 이어지는 노년의 평범하고 막막한 시간의 흐름같았다, 아직 조각의 나이는 한참 남았지만 어느 순간 생각이 아무런 연관없이 이어지는 경험을 나도 한다,

그 이어지고 이어지는 상념을 문장으로 풀어낸다면 이렇게 마칠듯 마치지 않은 만연체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강하고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듯 단단하게 여며진 조각에게서 얼핏 보여지는 소심하고 주저하는 모습들도 좋았다,

혹시 나의 어떤 행동이 말들이 어떻게 들리려나 순간 생각하고 지나가는 순간들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마음이 먼저가는 순간들이 좋았다,

대상을 처리해야하는 순간 페지 줍는 노인을 도와줄 수 밖에 없다거나

나갈 때마다 행여 혼자 남게될  반려견 무명을 위해 창을 잠그지 않은 행동들

군데군데 보이는 소소한 묘사가 좋았다,

 

한때 농염한 향기를 풍기고 한 입 깨물면 수밀한 과즙을 흘리며 싱싱하게 살아있던 과육이

잊혀지고 방치되어 구석에서 점점 물러지고 흘런내리고 색이 변해서 순간 시큼하고 들큰한 냄새를 풍기는 파과가 되어가는 것

그건 어쩔 수 없는 나이듦의 묘사이기도 하다,

한때 아름답지 않았던 노년이 어디 있으랴

어쩌면 그렇게 빛나는 순간을 빛나는 순간이라고 알지 못하고 그 시간 한가운데서도 그 시간을 기다리기만 하다가 서서히 익어가고 익어서 더이상 익을 수 없어 썩어가는 순간  아 그때 내가 아름다웠고나 하고  돌이키게 된다, 그 순간의 가운데서는 언제나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녀 조각의 가장 어름다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리고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일까?

어쩌면 삶이란게 발단 전개 절정 결말잉라는 드라마틱한 플롯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미미하고 지루하게 꾸역꾸역 살아내거나 치열하게 돌아볼 틈도 없이 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순간 반짝하는 반딧불처럼 살기도 하는 것 그게 삶이 아닐까

이제 절정의 순간이야

이제 결말을 해야할 시간이지...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저 몰아치다가 순간 무심해지다가 그저 살아내는 것같다가 순간 반짝했다가,... 또 다시 반짝할 수도 있는 것... 그게 삶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직선이 아니라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유선을 그렸다가 다시 되올아갔다가 하는 제각각의 곡선을 가지는 것이 삶이아닐까

 

이제 조각의 나이로 나아가는 일만 남은 나의 삶은 이미 뭉큰해져버린 파과로 가는 길일까

아직도 팔팔한 파과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다시 읽은 책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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