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남궁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에 봤던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생각났다.

그 드라마도 소설원작이랬다.

은행원들 이야기였고 멜로가 있었지만 그 드라마에서 내가 본 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은행은 내게도 익숙한 공간이어서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사이의 공기의 밀도, 긴장감들을 함께 느꼈다. 내가 그 공간에 있을 땐 정규직 비정규직은 없었다. 다만 그때는 고졸 대졸이 나뉘었고 경력이 다르게 입사하지만 여자라면 같은 단계에서 누군가 조금 위에서 시작하고 누군가는 조금 아래에서 시작하는 정도였다. 아마 그때 대졸 여행원을 막 뽑기 시작한 무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이라는 조직이 갖는 긴장감이나 단순하고 고지식한 면 그 속에서도 정치도 있고 무리도 있는 것들을 보면서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걸 느꼈었다.

 

일을 위해 모인 공간에서 일은 어렵지 않다.

물론 일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개인의 능력이나 기질에 따라 능률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해내거나 포기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거나 등 일이 주는 무게감이나 스트레스는 크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일을 해내는 건 디폴트값이고 다른 자잘한 것들이 더 힘들게 한다.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는 곳,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은 단순하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미묘하다.

일은 매뉴얼이 있고 숙지해야할 규칙이 있다.

서툴더라도 시간이 해결해 줄 때도 있다.

그러나 관계는 매뉴얼이 없고 개인마다 취향이 다르고 원하는 바가 다르고 느끼는 감각이 다르다. 나같으려니 하고 좋은 마음으로 다가갔다가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차라리 분명한 선과 악이 있으면 편안할탠데 사람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믿음직한 직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까칠하고 알 수 없는 상사이기도 하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사람이 사소한 문제 사실 사쇠한 문제란 없다. 내게 절대절명이지만 타인에게는 그까짓것 하는 문제로 등을 돌릴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얹어주기도 한다.

 

일만 하자 일만

하고 일에 묻히는 게 차라리 나아서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고 혼자 외롭고 고독하게 일만 하면서 출퇴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월급이 쌓이고 올라가고 다른 충족감이 생긴다.

그러나 지금의 월급생활 아니 모두를 뭉뚱그려서 노동을 하고 댓가를 받는 일들이 그렇게 뿌듯하고 자존감을 올리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죽어라 일하는 개미는 여전히 개미일 뿐이다.

죽어라 해야하는 일을 얻는 것도 힘들고 운 좋아서 일을 얻어도 그 일을 하다가 죽는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 더 이상 아니다. 그냥 한마디로 개고생이 된다.

죽어라 충성해도 내게 돌아오는 건 쥐꼬리만한 월급과 어디 썼는지도 모르게 쌓여가는 대출과 스트레스와 직업병 등등이라면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애써왔나 우울하다.

가족도 내가 노력함을 알아주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여기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회의감을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역시 태어나 자라면서 배워 온 것이 노동은 신성하다. 노동은 필요하다. 노동을 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등등 한만큼 가져가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는 걸 배워왔다. 나 역시 그렇고 가족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고 인생에서 꼭 해야할 무언가가 되면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노동에 속박된다.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고 사회 부적응자같고 도태되어버린 것 같아서 찝찝하지만

하는 순간 언제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나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소설들은 노동을 하고 월급을 받는 (주급을 받든, 자영업이든 일을 준비하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원하는 걸 하게 되었으니 불행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만 있다. 그러니 미래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 불평은 하면 안된다.

이건 윗세대도 나도 지금 세대도 머릿속에 가진 생각이다.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다를지라도....

일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하라

하다가 더 좋은 곳으로 가면 된다.

눈만 높아서 좋은 일만 하려고 하고 자기 주제는 모른다.

일단 시작해야지 고르면 어떡하나

언제까지 꿈을 쫓을 수는 없지 않니? 뭐라도 시작해 봐

그렇게 나를 낮추고 맞춘다. 내 팔다리를 자르고 몸을 우겨넣어서 맞춰주고 기다리지만 조직은 세상은 내가 맞춰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 아게 아닌데 싶은 순간 나는 조직이라는 톱니바퀴에서 나올 수 없다. 이미 리듬에 맞춰 돌아가는 그 속에서 나오는 건 또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한때는 정의가 이상이 그리고 사명감이 일을 하게 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세상에 떳떳하게 내보내는 일

조금 엄격하고 깐깐하지만 그렇게 해서 적확하고 바르게 배워야 한다고 믿었는데 알게 모르게 세상은 바뀌었고 정서가 중요하고 공감이 중요하고 아이들의 마음이 더 중요해졌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해 온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 그건 억울하다.

나도 최선을 다했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고 하고 그 결과가 수입이 줄어드는 것으로 눈에 명확하게 보여진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귀찮아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아이 때문에 내가 화가 나고 불편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냥 누구든 만만한 사람에게 나도 화를 내고 퍼붓고 싶을 때가 있다.

결국 돌아서서 다시 아이를 맞이 하겠지만

지금 내가 좋다고 내가 옳다고 말하면서 도와달라는 아이를 어찌 거절할까

그 순간은 돈으로 환산되는 노동이 아닌 사명감으로 채워지는 노동의 시간이다.

 

직장이 없어지고 임금을 줄 수 없는 사업장도 딱하지만 그런 사업장을 믿고 참고 기다리면서 노동을 해온 노동자들도 딱하다면 더 딱하지 않을ᄁᆞ

관계에서 내가 잘못을 했을지라도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교통사고도 일방적인 100%라는 건 없는데 관계에서는 그것도 직장에서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결국 약한 존재가 물러나고 포기해야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가능한 내 둘레에 견고한 벽을 쌓고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겠다. 어떤 틈도 잡히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 주변사람들이 불편해지고 그 원인이 나에게 돌아온다.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아니라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그 벽들이 결국 나를 공격한다.

흔히들 자격지심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내가 나를 지킬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들이 그렇게 만든다.

지금의 일은 함께 가자가 아니라 각자도생이다.

잘하면 내탓이고 못하면 니탓이거나

잘하면 조직덕이고 못하면 너의 무능력이거나

잘할 필요가 없다 못하거나 책을 잡히지 않으면 된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일조차 책잡히는 일 리스트에 들어가는 세상이다.

 

내가 속한 조직이 조금 더 잘 되고 그래서 내게도 뭔가가 흘러 넘쳐서 얻는 게 있고

그러려면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그 열심히 안에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종목도 분명히 있다.

거래처에서 좀 더 우위를 점하고 가맹주들에게 비위를 맞춰가며 더 얻어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승진이 걸려있고 정규직 전환이 걸려 있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들이 걸려있다.

포기가 쉽지 않다

거기까지도 죽을둥 살둥해서 올라왔는데 저기가 고지인데....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는 늘 그랬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버텨야지 그러려면 서울로 이사가거나 차가 있어야 하는데....

말로 투덜대는 창희는 가맹점주에게 최선을 다한다.

덜렁덜렁 껄렁거리는 거 같아도 그들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노력하고 애쓴다.

어쩌면 진영도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다.

꽤 인정받고 앞날이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그 길이 아니었구나 하고 돌아서는 창희처럼 어쩌면 휘청거리지만 꺽이지 않을만큼 단단했던 창희처럼 진영도 조금쌕 때는 묻어가지만 어느 순간 아니라고 느껴질 때 칼같이 돌아서길 기원한다.

진영은 절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이 아니다.

잘 풀렸다고 하기도 그렇지만 인성에 비해.. 그건 아닌 거 같다.

선영의 무심한 말들이 턱턱 걸리면서 내가 준비한 매뉴얼과 다른 반응에 늘 멈칫하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

가끔 사람은 내가 잘 아니까, 으래 그려려니 하는 마음으로

타인도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보편이고 상식이라고 믿어버리면 그 상식을 타인고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랬고 그래서 꺽였고 상처입고 상처를 주고 살고 있다.

나의 상식과 보편은 그냥 내 것이다. 나와 다른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순오와 진영이 전혀 다르듯이 진영과 선영이 다르듯이

그걸 진영이 알고 받아들이면 진영도 괜찮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알았다. 나도 온라인이나 올영에서만 화장품을 사고 있었구나,)

 

흔히 듣는 말

정 안되면 쿠팡물류알바나 하지

쿠팡 물류알바 알아보고 있어요

하루 가기로 했어요

다녀왔는데 할만해 또는 진짜 죽겠어 못해 못해

쿠팡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하긴 했나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은 들었고 그래도 일에 비해 보수가 좋다는 말도 있고

할만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한달을 버티고 있는 주인공이 장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정치질이 있고 스트레스를 풀 전용갤러리가 있는지 몰랐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디서든 살아남는 것이 사람이다.

도지윤마저 응원할 줄이야.... (그래도 방구성키보드 워리어가 아니라 몸을 쓰는 노동의 세상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

 

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가

최근 기사에서 여학생을 일찍 학교에 입학시키면 결혼을 할 확률이 높다고 했나 출산할 확률이 높다고 했나

참 애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출산율이든 출생율이든

왜 여자들이 결혼하고 싶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지 모를까

이 나이 먹은 나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게 더 낫고 결혼을 하지 않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자고로 여자란 결혼을 해서 남자들 뒷바라지를 하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이 디폴트였는데 그걸 하지 않는다. 세상이 말세구나

해야할 당연하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왜 그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을 할까를 먼저 고민해야지 왜 당연한걸 안하고 지랄이야... 이렇게 접근하면 해답이 없다. 정답도 없다.

결혼이 손익계산을 따져야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낭만으로 덕지덕지 쳐바르는 행위도 아니다. 어쨌든 현실이다. 현실이니 손익도 필요하고 그렇지만 신뢰를 기반으로 함께 나아가자는 약속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낭만도 필요하다. 정말 필요한 건 당사자들간의 합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당사자의 합의뿐 아니라 두 가정의 부모와의 합의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 지원을 할것인가 어느정도 요구를 할 것인가 미리 합의가 필요하다.

정해진 답이 없다.

상황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낭만의 크기가 다르다면 답은 저마다 각자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합의해서 결혼을 하면 잘 이행해야 한다.

들어갈 때 마음이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면 안된다.

노동을 하고 다시 출근을 하는 일이 생기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아 9to6 일을 마치면 쉬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 다시 같은 시간 일을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쉬러가는 집에 누군가는 다시 출근하는 일은 끔찍하다.

아이를 낳아도 지금같이 사교육이 필수인 세상에 아이를 키우기도 쉽지 않다.

이젠 다른 집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알 수 밖에 없다.

정보도 빠르고 소문도 빠르다.

쉽게 뒤처지고 쉽게 기가 죽고 쉽가 열불이 나는 세상이다.

그리고 나 조차 자립하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한데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까

최저 생계비는 점점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월급만 작고 소중해지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하고 부모를 부양하고 살아야 할ᄁᆞ

내가 나를 부양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드는 이 시점에서 ...

나는 그 문제에 빠져있다고 자신할 사람도 없겠지만

내 의사와 다르게 편집되고 잘리고 다시 기워져서 목적에 맞게 조작된 내 말과 내 표정은 영 불쾌하다. 좀 큰 액수의 보상을 받았다고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진정성도 상품이 되고 돈이 된다.

그런 감각이 있어야 돈을 버는 모양이다.

나는 보이사가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

감각이 좋고 수완이 좋을 뿐이다. 불법은 없으니까

민지가 순수했다고 하기도 그렇다.

다만 나쁜 건 아니잖아... 라고 생각하는 내가 좀 슬플 뿐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찜찜한 내용이다.

 

이제 아이가 취직을 해야할 나이다.

그렇다는 건 구세대인 나의 기준에서 이다.

이제 방향을 잡고 준비하고 했으면 하는데 아이는 아직도 중구난방이다.

기회가 오면 모든 걸 해보고 싶어한다.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괜히 내가 마음이 조급하다.

나도 배우자도 늙어가는데 지 혈육도 있는데 언제까지 늙은 부모가 뒷바라지 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라는 말은 꾹 참지만... 얼른 철이 들었으면 한다.

여기서 철이 들었으면 이란 얼른 내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으면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다.

 

월급을 받고 산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지만

인생 초반에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인생을 100으로 볼 때 20대 중후반은 초반이다.) 경험해야할 일이 아닐ᄁᆞ????

적어도 시작하고 이게 아니었어. 이렇게 살려고 공부한게 아니었어, 야자하고 비싼 사교육비쓰고 엄마한테 욕듣고 한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더라도

일단 들어가야 할 수 있지 않나????라고 꼰대 엄마는 생각한다.

내가 책에서 뭘 읽은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앞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야기


내가 타인을 돕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무수한 생각들이  머리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가난한 상황에서 어렵게 살아온,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여지는 가장이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석탄배달을 갔다가  어떤 상황과 마주친다.

그냥 모른 척 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거래를 하는 거래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이유가 없다.

모두가 그렇게 살지 않나?

모르니까, 모르는 게 나아서, 몰라도 되는 일이라서 

그냥 모른다.

모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게 돌아왔고 그냥 잊었으면 괜찮았다.

나는 지켜야할 아이들이 셋이나 있고 아내가 있고  가장으로서 그리고 내 직업에서 책임자로서 뭔가 해야할 것들이 잔뜩 있다. 이미 책임감은 충분하다.


그러나 자꾸 내가 모른 척 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이어서이다.

질서를 지키고 법을 존중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은

문제를 알고 난 후 그냥 넘기는 것이 쉽지 않다.

저울위에서 고민한다.

내가 이미 가진 무게에 더 무게를 얺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내 상황 역시 아슬아슬하다. 

지금은 평안하고 안정적이지만 언제 또 저울이 기울어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그냥  못 본 걸로 하면 다 괜찮다.


그러나 그는 알게 된 걸 아는 것으로 그래서 행동한다.

누군가가 석탄창고에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볼 수도 없이 젖이 퉁퉁 불은 상황에서 맨발로 있는 걸 보았다면  문제를 제기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무언가를 해야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119쪽)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쪽)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러나 사람의 존엄을 유지하는 건 결국 사람의 행동이다.

말이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지만 그 존중하는 마음을 일정정도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

그것은 결국 행동이다.

펄롱은 그걸 해 낸다.


이전에 미지즈 윌슨이 무심하게 사소한 것처럼  주었던 그 행동들의 의미를 펄롱은 안다.

그 사소한 행동이 지금의 펄롱을 만들었고 다시 펄롱은 누군가를 위해 무심하게 그러나 몹시 떨리는 마음으로 해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일들의 연속이 우리가 의미있다는 것 우리가 존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켜보고 공감하고 응원하는 사람, 단 한명이라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 그게 부모일 수도 할머니 일수도 혹은 어떤 좋은 타인일 수도 있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불편하고 힘든 오늘 할머니의 무심하지만 언제나 내편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 먹고 나면 모든 것이 스톱된 상황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발전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는 완전체로서 인간 발달과정의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른 기분이다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는데 이미 나이를 먹었고 누구나 나에게 어른이라고 말하고 인지하고 있고 나도 더 이상 어디로 도망치거나 모른 척 하거나 실수하고 미숙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빠진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들

커보였고 완벽해 보였고 꽤 근사했던 어른은 어디에도 없고

극악스럽고 한심하고 아직도 많이 미숙하면서도 본인은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데다가 교활하기까지한 어른들만 보이고 나도 그 속에서 티나지 않게 묻혀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

어른이라는 건 완성형일까

나는 아직도 많이 모자라고 이뤄야 할 과정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다 마쳤으니 졸업하라고 이제 세상에서 어른으로 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모르면서 아는 척 알지만 아닌 척 그런 척 그렇지 않은 척

어른이란 그렇게 나를 꾸미고 아닌척 그런척 하는 잔꾀를 가진 존재구나 라고 배우고 있는 중이다.

 

윤성희의 이번 소설집에는 각각의 어른들이 나온다,

어른이란 세상의 지혜로운 어른의 의미가 아니라 나이먹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제 중년이라고 하기에도 멋쩍지만 초로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아니라고 감정을 넣어 손사래치고 싶은 그 나이 그 순간의 어른들이 등장한다.

대단한 사람들도 아니다.

결혼하지도 못하고 혼자 살면서 이제 예전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갖고 싶은 어른

살면서 6번의 깁스를 해야했던 조금은 조심성이 없다고 해야할까 운이 없다고 해야할까 그런 인물이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버린 친구를 기억하기도 하고

나이들어 암이 전이되었고 살아온 날을 돌아보니 회한 뿐이라 마지막으로 남편의 내연녀와 남편에게 사기친 남자가 함께하는 국수집에 가서 욕을 해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하거나

버스정류장에 있다가 사고로 돌진하는 승합차에 치이거나

첫사랑이기를 바라는 여자와 떡볶이를 먹다가 부모몰래 차를 몰고 나온 중학생이 돌진하는 바람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놀이터에 덩그러니 놓인 킥보드를 타고 동네를 돌다가 넘어져 꼼짝할 수 없는 어른도 있다.

이제 나만큼 늙어서 흰머릭 가득한 여동생과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담 넘어온 감나무의 감을 밟아 넘어진 이웃 할아버지에게 보상해주고 천불이 나서 감나무를 베어버리려다가 담장이 무너지는 사고로 다친 어른이 있고 그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다시 요양원에 들어간 배우자와 그 자녀들도 있다

나이든 삼촌을 면회갔다가 내리는 눈에 막걸리를 마시고 무단횡단을 하다가 자기차 앞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어른도 있고

그 모든 일이 다 거짓말이야 하며 깔깔대는 조금은 슬프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가족도 있다.

이렇게 한줄로 요약하면 도데체 이 사람들은 철이 콧구멍으로 들었나 싶게 한심하고 어이없다

그러나 윤성희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그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그럴 수 밖에 없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내가 지금 어정쩡한 어른이 아니라 좀 더 팔팔하고 예민하고 선이 분명한 젊은 나이였다면 몇장 읽지 않고 책을 던져버렸을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 좋은 점은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여전히 심술나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 늦게라도 들게 된다.

이야기는 그냥 수다처럼 이어진다.

물감이 잔뜩 묻은 붓을 물어 넣어보면 슬슬 풀려나오는 색감처럼

처음엔 진하게 나오다가 점점 옅어지지만 그 꼬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

이야기는 그렇다. 첨엔 자기이야기를 하나보다 하고 듣다보면 어머니 이야기로 넘어가고 어느 순간 삼촌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또 다른 이웃으로 넘어간다 맥락이 없다.

도데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늘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듯이 주장과 예시를 들지 않는다

기승전결에 맞게 이야기를 엮어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나만 그럴지 모르겠지만 막 이야기를 하다보면 지금, 내가 무엇을,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몹시 헷갈리기 시작하고 부끄러워지고 입을 다물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들지만 그와 똑같은 무게로 어쨌든 이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다는 욕구가 함께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그래서 맥락없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고 듣는 사람의 따분한 얼굴 도데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는 표정을 본다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렇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마구 토해내고 꺼집어 내야 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그것이 우선이다.

무엇이든 상관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처음엔 여기였는데 나중에 저기로 혼자 튀거나 뛰거나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건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삶이라는 것이 늘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느닷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마구 긴장하게 되는 일들이 맥락없는 결말로 치달아가 가기도 한다.

내 삶을 이야기로 풀어보면 대단한 무엇도 없고 주제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시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들을 진지하고 의미있게 만들고 싶지만 대부분의 삶들은 그냥 그렇다 시시하기도 하고 별일 아니기도 하지만 그런 일들이 모이고 차곡차곡 쌓여서 누군가의 삶을 이루는 순간 그 삶은 그대로 대단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삶

모든 삶은 숙연하고 가치있으며 무시할 수 없다

윤성희는 그런 삶들의 맥락없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꼬이고 엉뚱한 골목으로 꺽어지는 그 이야기들을 다 듣고 나면 그냥 막연히 숙연해진다.

뭐라고 말하기 어렵고 더구나 판단하거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냥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역사가 그대로 얼마나 가치있는가 얼마나 존중받아 마땅한가를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 뻐근한 허리를 몇 번 돌렸고 그래도 아침을 해야 가족들이 먹을 테니 부엌으로 향한다.

어제 먹고 남은 국에 다시 두부를 썰어 넣고 대파를 다져서 함께 끓여낸다

그리고 씻어둔 쌀을 안치고 밥을 하고 이제 제법 익은 파김치와 깻잎김치를 꺼내놓고 계란을 말아낸다.

밥상에 앉은 딸이 묻는다

어제 먹던 연어 남은 거 없어? 나 그거 먹고 싶은데

기왕 국에도 고기가 있고 계란도 있는데 다시 연어라니...

귀찮기도 하고 그걸 내놓으면 이미 차려놓은 반찬은 또 남아버릴텐데 싶은 마음에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 알았어 한다.

고삼이니까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게 낫다.

그리고 연어를 내놓는다.

가끔 힐끔거린다. 다른 반찬은 손도 안대면 어쩌나 다시 넣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

다시 넣자니 꾸덕꾸덕 한 날씨가 걸리고 그냥 버리자니 저것들이 너무 아까운데

다행히 딸은 다른 반찬도 잘 먹었다.

딸이 밥을 다 먹을 무렵 찌개 건더기만 건져서 옆에 앉아 함께 먹는다.

입맛은 없지만 뭐라도 먹어야지 낼모래 백신을 맞아야 하면 뭐라고 먹어서 기력이 떨어지면 안되지

건더기 위주로 딸이 먹고 남긴 파김치를 얹어 먹는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고기가 영 역하게 느껴진다.

이 나이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단백질을 섭취하라고 하는데 콩으로는 부족하려나??

아이는 어제와 달리 재잘재잘 말이 많다.

어제밤에 학원을 다녀와서 공부하는게 힘들다 수시로 논술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울었다

사실 논술학원은 생각하지 않았다. 지 언니와 달리 논솔이 맞지 않을 거 같아서 그냥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서 일점이라도 올리는게 나을 거 같은데 뭐라고 하고 싶다는데 반대할 수는 없었다. 지 언니가 논술로 대학을 가고 보니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 같은데

버리는 셈 치고 돈을 썼지만 사실 아까웠다,

지금이라도 그마두겠다고 하면?? 이렇게 울면서 힘들다고 할거면 낮에 다시 재등록하기전에 말이라도 하지.. 아이는 울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지불한 학원비를 계산했다.

사실 그 돈이면...

100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오르지 않은 성적 가고 싶은 대학과 갈 수 있는 곳의 거리감 그 깊고 넓은 간극앞에서 본인이 먼저 주저앉고 싶을 텐데

그 마음은 다 알지만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조금 더 기운을 내고 한문제라도 더 풀자

어디를 가든 엄마는 괜찮다.

남들과 비교하지 마라 남들의 의견이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그런 말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마나한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들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했고 딸은 화를 냈다. 그냥 들어줘 판단하고 충고하지 말고

부모는 충고하는 사람이다. 뭐라도 잔소리해야하고 걱정해야 하고 그러면서 외롭고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지만 사실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해야하는 입장

그렇게 나에게 고민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던 딸이 지금은 헤실헤실 기분이 괜찮다.

다 먹고 설거지를 한다.

오늘이 광복절이라 티비를 돌리다가 광복절 기면식을 본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은 없다, 그냥 밋밋하고 일상적인 문장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런 개성없는 밋밋한 문장이 모여서 이야기를 이루는데 그 이야기가 특출하지도 않다

갖고 싶은 문장도 아니고 기묘하거나 매력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전체를 다 읽고 난 후 마음은 먹먹하다.

이렇게 살아낼 수도 있는 것인데

내 삶도 그렇게 무료하고 무가치한 건 아니라는 위안

작가는 위로라는 말이 너무 싫다고 하지만

위로는 주기위해 만들지 않아도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냥 무심하고 아무런 의미없는 한마디지만 그것이 와서 박힐때가 있다.

 

한두페이지를 휘리릭 넘겨 눈이 닿는곳을 읽고 넘기는 책이 아니고

자리 잡고 앉아서 한 이야기를 한 숨에 읽어내리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윤성희 글의 매력이다.

 

아마 일상을 살면서 참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가

하나의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 모든 생각을 기록하는 사람

가끔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근사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한거야

이렇게 이어가면 어떨까 꽤 멋진걸

이걸 정리해봐야겠어

하지만 빈 종이에 펜을 들고 혹은 빈화면에 커서가 반짝이는 순간 머릿속은 하애진다.

지금까지 내가 한 생각이 어디로 간거지?

작가는 부지런하게 생각과 동시에 기록한다. 그런 생각들

누구나 했던 것들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하나의 사물에 꽂혀서 어떤 기억에 꽂혀서 마구마구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것

그 기록들이 이어지고 연결되면서 나도 모르게 어떤 감각을 건드리게 되는 것

윤성희의 소설이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몰래 버리고 싶은 존재

또는 나의 살아가는 힘

그 두가지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가족은 나의 힘이고 나의 존재이며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에게 가장 상처주는 대상이고 버리고 떠나고 싶은 곳이다.

 

흔히 가족은 화목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세상에 다시 없는 존재이며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희생해야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게 한다.

그래서 가족 때문에 힘들거나 가족에게 상처받거나 가족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

그 가족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멀리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 마음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나쁜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심한 건 아닐까 내가 참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그러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을 텐데 내가 잘못했다는 마음을 갖는다.

내가 그 상황에서 화를 내서는 안되는 거였고

내가 돈을 마련하거나 빌려서라도 줘야 하는 거였고

내가 말을 잘 들었어야 했고 그냥 니가 맞다고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니까 아내이니까 가족을 돌봐야 하는 게 맞는 거였는데

내 일보다는 가족이 우선이었어야 했는데 나는 엄마답지 못하고 아내로서 자격이 없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맞아도 내가 맞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밥상을 뒤엎은 그 사람에게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럴 만했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절대 깨지면 안되는 그 무언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내 부모님의 실망과 충격을 견딜 수 없어서

가족을 떠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나는 가족을 깰 수 없다.

가족을 깬다는 생각조차 불순하고 불온하다.

 

가족이란... 이라는 질문에 아마 대부분 비슷한 문장을 완성하지 않을까

어디에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화목하고 다정한 사람들 서로 이해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관계들

 

이 책은 그런 가족에게 질문을 던진다.

불편하고 불온하지만 어쩌면 한 번쯤 혼자 몰래 해봤을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입장에 따라 이 책의 내용이 몹시 불편하고 화가나고 되먹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도데체 가족을 어떻게 보고 이런 발칙한 질문을 할까 라고 말이다.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될까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가 구축되고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이 독립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소유물로 여겨졌따는 점에서 한국이나 서구나 다르지 않다. 둘 다 가부장제 안엥서 여성은 예속된 상태에서 순종을 욕받았따. 그러나 한국의 유고 가부장제에서 결혼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는 아내로서의 지위에 한정되지 않고 시부모의 지배를 받는 며느리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며느리의 역할은 중대했으나 그 지위는 낮다는 모순이 있다.

며느리의 지위는 남편을 ᄄᆞ라 정해지지만 남편과 동등한 지위가 아니다.

허나 지위가 종속적이었다고 그 역할이 수동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아내이자 며느리에게는 높은 수준의 대처능력과 판단력이 요구되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들을 이끌고 어르고 돌보며 이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관리능역과 경제적 수완이 기대되었다. 주도성을 요구하는 종속 상태라는 모순된 위치다. 이러한 모순은 남성의 역할에서도 나타난다.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사회적 출세인데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 가족 내의 권위는 형식만 남는다. 권력을 가지지만 생활에서 무력한 수동적인 상태를 경험한다.

 

가부장제에서 성별 역할은 구분되어 정해졌다.

딸 아내 며느리 라는 역할은 여성의 역할이며 동시에 여성이다.

며느리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 되는 경우 생물학적인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맡게 된다.

종속적이고 희생적이며 주체적이지 않은 하나의 소유된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지배하는 다른 남자라는 인식은 가부장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다.

단순히 동성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전통이라고 믿어 이어온 가족이라는 제도와 통념을 뒤흔드는 일이 된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와 역할이 모호히져버리는 일

그것이 동성결혼보다 더 중요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까

 

2.결혼과 출산의 절대 공식

한국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야한다는 공식이 존재한다. 부모가 낳은 자식만을 인정해야 결혼과 가정이라는 공식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 공식이 흔들리는 건 존재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곧 무너질 거라는 착각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결혼 밖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정말 안되는 것일까?

출산이 결혼의 테두리에 있어야 정상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구분하며 생애의 시작부터 불평등을 만들었따. 이런 불평등을 사회가 모르는 게 아니라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은 출산의 기반이라는 이념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붕괴되는 것과 같은 불안감에 차별을 정당해 해왔다.

에초에 사람이 태어난다는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출생부터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출생률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결혼이나 자녀 출산에 관한 결정은 헌법적으로 보면 국가나 제 3자가 간섭할 수 없는 사생활의 영역이다. 국가는 개인이 자율적으로 가족을 형성하고 존엄하고 평등하게 가족생활을 영위하도록 보호하고 지원할 의무가 있따.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낳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때떄로 한국사회에서 결혼과 자녀 출산은 타인의 의견과 희망이 오가는 공적 의제 같다. 부모의 은근한 압력부터 결혼에 대한 주변의 충고까지 결혼과 출산에 관한 간섭은 꽤 일상적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불확실한 세계를 여는 일이다. 태어나는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양육자의 상황이 어떠할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현재의 상황을 토대로 미래를 가늠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세상이 불평등하고 양육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앞으로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 양육자가 제공하는 가족이라는 환경이 자녀의 삶을 결정해버리는 현실에서 누가 자녀를 낳고 싶을까

 

동성가족이나 비혼출산등을 합법화하고 사회에서 받아들인다고 사회가 붕괴되고 질서가 사라질까

비정상적인 가족을 막으려는 사람과 다른 쪽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누가 결정하냐고 되묻는 사람들 시아이서 여전히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비정상 가족에서 사람이 태어났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여전히 우리에게는 중요한 질문으로 남는다.

현재 아이들은 여전히 태어난다.

결혼을 한 정상 가족의 아이만 합법적이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비정상 가족의 아이들도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데 그저 정상가족과 정상 출산만을 인정하고 다름을 배척하는 지금 누구든 행복할 수 없다.

 

3. 초대받지 않은 탄생 허락받지 않은 출산

대한민국은 평등과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민주주의 헌법을 채댁하였고 정부를 수립하였다.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다며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가족 제도는 예외다.

가족에 관해서는 평등보다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유독 가족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평등은 전통적인 가족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허용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가족제도를 동결시키는 절대적이 원리가 되왔다.

가족제도를 바꾸는 대신 혼혈아동과 그 어머니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장애부부는 임신이나 출산을 하지 않은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

어떤 가족에게 어떤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제도적인 뒷받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거나 제외시키는 방식을 택해 기존 정상가족을 유지해왔다. 물론 이유는 그럴 듯하다.

태어나는 자녀가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

차별받지 않기 위해 혼혈아동은 해외로 입양을 보내가 장애 부부는 강제 불임을 하도록 해 왔었다.

아이의 불행한 삶을 예측하면서도 아이를 갖거나 낳겠다는 것은 부모의 이기심이라고 비난해왔다.

오늘날도 건전하지 못한 자녀를 출산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질타는 계속된다. 누군가 사회가 원치 않은 아이를 출산할 때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출산을 결정한 그개인에게 잘못을 돌린다.

그렇게 혼혈아동에게 그랬듯이 아동을 사회적 차별과 불행한 인생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은 출산과 가족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회를 만든다. 여전히 우생학에 기반한 차별은 정상적이고 우수한 사람만이 출산하고 출생하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때떄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 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임을 기정사실화 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 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가담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는 사회가 변화를 도모하지 않겠다는 변명이다.

부모가 출산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아동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면 이미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을 것이 아니라 출생으로 등장하는 예측 불가능한 구성원을 위해 변화하며 고옹체를 형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임신과 출산은 국가적 수단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이다.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 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4, 역할은 성별에 따라 평등하게?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가능하려면

(남성이 가장으로서 나가서 돈을 벌고 여성은 전업주부로 집에서 자녀를 돌보는 것)

이는 꽤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 올려진 꿈이다.

사회가 성별분업을 지배적인 관념으로 채택하면 연쇄작용이 생긴다. 성별분업이 가능하려면 남성 한 사람의 노동으로 가족구성원 모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는 일자리를 남성에게 우선하여 준다. 이런 사회가 되면 여성은 마땅한 일자리를 갖기 어렵고 어쩔 수 없이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성별분업이 일종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결혼은 중요한 생존요건이 된다. 그것도 결혼한 상태가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 남성에게 부여된 과업도 만만치 않다. 남성은 가족 전체를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소득이 넉넉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기대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지다.

기대수명이 길어진 것

비혼 미혼의 비율 증가

남성이 받는 가족임금이 가족 모두가 생활할 수 잇을 만큼 받는 경우가 절반도 채 되지 않은 현실

능력있는 가장과 전업주부라는 역할은 가족문화의 귀족화를 추구한 결과이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가족모델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시장으로 평생 동일한 직어을 유지할 수 있는 퍼센테이지는 높지 않고 주변 노동으로 이동하여 노동이 불안정해질 경우 성별분업은 지속되지 못하고 아내의 취업이 증가한다.

 

일제 강점기 늘어난 여성의 교육은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자기성장이 아니라 자녀를 잘 키워야 하는 현모의 역할 때문이다. 국가에 필요한 적절한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여성이 교육을 받고 자녀를 잘 교육시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유신체제의 현모양처 교육은 충효의 정신을 강조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든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내용이다. 모든 사회 관계를 가족적 관계로 전환하여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는 개인을 길러내려는 의도였다.

현모양처란 여성의 교육기회를 여는 열쇠였지만 결국 여성의 역할을 집안으로 한정했다.

한국은 전통적인 성역할 이념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우호적인 국가

여성이 일도 하면서 가사 책임도 받아야 하는 이중부담을 지닌 경우 출생율을 낮을 수 밖에 없다.

 

5. 가족각본을 배우는 성교육

청소년의 성교육은 죄책감과 수치감을 심어줌으로 성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성이란 가족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교육한다.

사회는 결혼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사람이 태어나야 적법하다고 보는 제도를 통해 가부장제 가족질서를 구축했다. 또 승인된 가족질서에서 벗어난 출산과 출생에 낙인을 찍음으로 가족제도의 불합리함을 수정하는 대신 불행을 개인사로 돌렸다.

성교육은 성역할의 구분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만듦으로 가족각본이 유지되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가족이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명분아래 명예를 이유로 하는 폭력이 촉발된다고 설명한다.

남성 혈통을 따라 계승되는 가족체제가 있다.

한 가족이 다른 가족과 친족 관계를 형성하려면 결혼을 해야한다.

이때 여성은 좋은 조건의 집안과 친족을 형성하기 위한 거래에 사용되는 중요한 자본디다.

이 거래에서 순결은 여성이 결혼 가능하다는 가치를 담보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자본으로 중요하게 기능한다. 만일 여성이 순결을 잃거나 처신을 잘하지 않으면 결혼 거래에서 불리해진다. 여성의 성에 따라 가족 전체의 번영과 쇠락이 좌우되는 것이다.

온 가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일에 관여하기로 한다.

여성은 조신하고 순결해야한다는 엄숙한 성규범이 가족안에서 만들어진다.

남성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보호자 역할을 맡는다.

진실이 아니어도 소문이 나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을 수 있고 반대로 진실이어도 소문을 막을 수 있다면 폭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어지기도 한다.

 

6, 가족 각본은 불평등하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존을 맡기에 가족이란 단위는 불안정하다.

경제적 단위로서 가족은 규모가 작아서 가족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가족 구성원 전체는 쉽게 휘텅댄다.

성별분업이념으로 설계된 사회라면 남성 갱계부양자의 존재여부나 상황에 따라 여러사람의 생계가 흔들린다. 국가가 이런 취약한 구조를 만들어놓고 가족끼리 서로 부양하라는 의무를 부여해 자력 생존을 유거하는 건 처음부터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은 복지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사람에게 기초적인 수준의 생활을 지원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운영하면서도 국가는 가족의 부양의무를 우선해왔다. 가족부양 우선의 원칙으로 하여 우선적으로 부양의무자로 정해진 가족의 보호를 받고 부양의무자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을 때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사회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하는 과제를 떠안은 것과 같다. 가족이 있어도 없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가족의 실패가 사회보장의 전제조건이 되면서 사회복지제도는 마치 가족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낙오된 세계인 것처럼 만들어졌다.

있는 자가 가족제도를 통해 계층을 세습하는 동안 없는 자는 가족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결혼으로 가족이 된다는 건 그 당사자들 사이에 권리와 위무가 생긴다는 뜻이다. 동거하며 서로를 부양하고 협조해야 한다 서로를 대신해 공동생활에 관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생긴 채무에 대한 책임도 공동으로 진다. 결혼 중 협력해 모은 재산은 명의와 상관없이 공동재산이 되어 둘이 헤어질 때 나누어야 하며 이때 가사노동을 분담한 기여도 인정된다. 서로에게 수술동의 연명의료 중단 결정 등 의료적인 결정을 내리는 보호자 역할도 하고 배우자로서 사회보장급여를 받고 상대방이 사망하면 유족으로서 장례를 치른다.

동성결혼 또는 동거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정서적 돌돔의 공동체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들도 공동생활을 보호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돌봄의 공동체를 국가와 사회가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혈족 안에서 사람의 순서를 매기고 부양의 의무를 부가해 생존을 담보해온 지금까지의 가족은 사람을 타고난 운명에 순응케하며 권위적인 통제에 의지해 체제를 유지한 경직된 질서였다.

 

7 각본없는 가족.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성별에 따라 세밀하게 구조화된 체계이다.

모든 사람을 남과 여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고 성별에 따라 달리 기대되는 역할이 있음을 대전제로 한다. 남녀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법적으로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하는 일련의 가족 각본을 충실히 따르기를 기대하고 때때로 압박한다.

 

가족관계로서 신분을 증명한다는 말은 나라는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면서 내 정보를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개인이 자기자신으로 존재하지 않고 가족안에서 존재하는 가족관계등록제로 되어 있다. ) 상세증명서를 통해 과거 정보가 불필요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정보를 가린다 해도 서류에 가족관계가 드러나는 이상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상황들이 포착된다면 차별을 피할 수 없다.

(가족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상황을 모두 기록하고 노출시킨다.)

 

 

환자 또한 전체 법질서 안에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엽다아야 하고 국가는 성전환자의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여야 한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것은 그의 가족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는 부 또는 모의 성전환이라는 사실의 발생에 따라 부모의 권리왕 mlan가 실현되는 모습이 그에 맞게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따름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부모자녀 관계와 가족질서 또한 법질서 내에서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성전환자가 이혼하여 혼인 중에 있지 않다거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 정정이 이루어진다 하고 이러한 점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도 여전히 그의 부 또는 모로서 그에 따른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며 이를 할 수 있다

 

건강가족의 의미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

가족 구성원의 욕구가 충족되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족

 

가족각본은 이분법적 성열할 관념에 기초한 가족 질서를 유지하면서 성평등에 실현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현모양처 만들기를 목적으로한 여성교육)

가족과 사회가 별개의 질서가 가능한 분리된 세계가 아니다. 성별 구분을 바탕으로 설계된 가족제도는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 현실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가족각본은 가족제도가 만드는 계층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지금의 가족제도는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없는 자는 가족생활을 유지하기도 새로운 가족을 꿈꾸기도 힘들다.

가족각본은 아동에게 가장 불평등하고 가혹한 사회를 만든다.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들여다 보면 가족형태 가족 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인 경우가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면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다.

어느 가족에게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 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화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도 어렵다면 아기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가족각본은 여전히 필요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