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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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예전과 같지 않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예전과 같지 않을 경험들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건 삶이 흔들리는 커다란 충격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어떤 만남이거나 깨달음이거나 스치듯 지나갔던 경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 책의 인물들은 그런 순간을 겪는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그냥 스쳐지날 순간들에서 문득 든 생각들이 그렇게 통찰을 준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순간 느끼고 말아도 그만인 일일테니까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들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길지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삶의 진정한 비극은 우리 자신의 상처 때문에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볼 눈을 가리고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가까운 사이에서 주고받은 상처들은 더욱 사람을 단단하게 닫게 만든다. 믿었던 만큼 내 편이라고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만큼 나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받은 충격은 대단하다.

어머니가 어느 순간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하고 떠나버렸던 순간의 공포 그건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인정을 해버리는 자신을 말리고도 싶다. 내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그 가까운 타인- 엄마가 준 상실과 빈 자리때문이라는 것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미시시피 메리)

오랫동안 믿어왔고 의심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실체를 알게 된 순간의 충격은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지며 내가 봤던 것 믿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눈의 빛에 눈멀다)

서로 다른 길을 갔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기억하는 때 서로의 기억이 다르고 서로의 기억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느끼는 전율같은 것. 그것은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이해가 되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자기 스스로의 말랑말랑해진 감정선에 감동할지도 모른다. (동생)

전쟁의 경험으로 순수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동시에 그것을 갈망하는 남자는 낯설지만 따뜻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민박집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엄지치기 이론)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성장한 남매는 이제 안정되었다. 오빠는 부유한 사업가로 일에서 가정에서 성공했고 동생은 안정된 민박집을 운영하며 타인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지금은 안정된 그 남매가 가난한 시절 쓰레기통을 뒤지며 음식을 구걸하는 기억을 간직하고 지금의 부유함이 주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타인에 대한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일 수 있다. (도티의 민박집/ 선물)

내가 평생 믿어왔던 것 그것이 하늘의 계시였다고 믿었던 어떤 신념.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보았던 어떤 믿음이 어느 순간 깨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부정해야만 할까? 하지만 현명한 아내는 그걸 굳이 깨어야 할까라고 반문한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은 순간이지만 그걸 다시 되돌리는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일지 모르겠다. (계시)

아무도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깊은 곳에 상처를 숨기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만 그런것도 아닌데 다들 입을 닫고 있으니 알 수 없고 내 상처에 침잠할 수밖에. 나의 이웃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에게도 고통과 상처가 깊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살아갈 일이 괜찮아질 수도 있겠다. 그건 누군가보다 비교우위를 갖는 속물적 마음일 수도 있지만 모두가 다르지 않다는 엉뚱한 연대감일 수도 있겠다 (풍차)

    

당신은 누구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왜 그랬을까요?

당신 속의 상처는 어떤 건가요? 

하나를 고르기는 참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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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상처는 남의 상처일 뿐이다.

타인의 아픔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지만 그냥 비슷한 모양새일뿐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 비슷하고 같아서 그게 그거 같아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에겐 자기의 아픔이 유일하고 강하고 독해서 다른 것은 비교할 수 없다. 상처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 우열을 따질 수도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의 상처에서 나와 비슷한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타인의 아픔에 대해 내가 알아갈 뿐이다.

힘들었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도무지 상상할 수 없지만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어쩌면 공감을 훈련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다양한 사람을 간접 경험하기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보다 낫지 않는 위안한다.

내가 몰라서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서 이해할 수 없어 무시하거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일은 없도록 ... 가능한한 요만큼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다.

 

 

어릴 적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손타지 않은 아이.. 라는 말이었다.

능력이 뛰어나서 도드라져서 남의 눈에 쉽게 띄는 스타일도 아니고 말썽을 부리거나 너무 손이 많이가는 처리곤한한 문제아도 아닌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묻혀가는 아이

조금 무심해도 알아서 자기 일을 잘 하고 도드라지지 않고 조금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보이는 그런 아이 나는 그런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고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간 아~ 할만큼 못나지도 않았고 예민하게 신경써야할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둔하지도 않은 그런 아이. 그냥 중간은 하는 그래서 좀 편하고 만만하고 쉽게 칭찬하고 잘 해주면 순종적인 채로 나이 드는 아이 뭐 그런 아이

사실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샘도 많았고 내가 가진 것과 타인이 가진 걸 비교하느라 혼자 속을 복달거렸고 실망하고 세상 막막하게 우울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나지 않았다. 내향적이라 말이 없고 뚱한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고집있어 보이는 면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똥고집을 부리고 몽니를 부리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형제중에서도 중간에 위치해서   언니 챙겨야 하니까 잠깐 저 집에 동생이 아직 어려서 잠깐 이쪽으로 여기저기 옮겨 놓아도 그냥 있는 둥 마는 둥 혼자 잘 놀고 말도 잘 듣고 밥도 찬투정 없이 잘 먹고 잘 자서 맡아주는 사람도 점차 무심해지는 그런 아이였다.

혼자 오래 외가집에 맡겨진 기억도 있고 명절에 이동할때 한차에 타기에 넘쳐서 혼자 다른 가족과 타고 간 기억도 있다. (언니는 커서 안되고 동생은 어려서 안된다는 적확한 이유가 있었고 나는 나이는 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성숙하지도 않아서 적당해야했다.)

그렇게 손이 가지 않은 아이는 그렇게 컸다.

물론 매년 매 순간 온순한 아이이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냥  내가 하고 말거나 참고 말거나 하는게 편했다.

힘들어 보이는 엄마에게 나까지 무게를 얹고 싶지 않았고 언니나 동생에게 샘내는 걸 들키는 일이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고 대낮 빈집에서 혼자 낮잠에서 깼을 때 햇살이 길게 들어오던 마루에 앉아서 혼자 쓸쓸했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감정을 말한 적이 없었다.

책가방도 내가 싸고 내 옷도 내 물건도 내가 챙겼고 누군가가 주는 내 몫에 대해서 주저하지도 않았다. 챙길건 챙기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그러니까 손이 안가는 아이이면서 동시에 어쩌면 정도 가지 않은 아이였을 수도 있다. 대단히 잘나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페끼치는 것도 싫고 뭔가 나누기보다 그냥 다 주고 마는게 더 편하다보니 깍쟁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아이일지라도 누군가 관심을 주면 참 좋았던 거같다.

다만 좋은 티를 이상하게 냈다는게 문제지만 틱틱거리는 거.. 뭐 그런걸로

 

부모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상식적이었고 책임은 강했다.

다만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던 거 같다. 상대가 원하는 걸 주기보다 내가 줘야 한다고 믿었던 것을 주었다. 그들이 주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원망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이를 먹어 보니 누군가를 공감하는 게 많이 서툴고 타인의 아픔에 마음이 저릴 만큼 이해가 가지만 어떻게 위로하고 곁에 있어줘야할지는 너무 어렵고 서툴렀다.

원만하게 잘 자랐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고 어떤 부분은 넘치게 가졌으나 어떤 부분은 지독하게 매말라서 언제든 바싹 바스라져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걸 모르고 나이를 먹었다.

사랑과 공감을 글로 배워서 머리로 익혔다.

감정이나 정서라는게 타고난 것보다 배우고  흉내내고 그렇게 계속 반복하고 연습해서 익히는 거란걸 몰랐다.

나는 내가 사람들을 열외시켰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냉정하게 그냥 내가 원하지 않아서 상대를 누락시켰다고 믿었다.

그냥 티나지 않게 조용히 예의있게

그런데 사실 나는 나를 누락시켰다.

나를 제외함으로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상처받을까봐 미움받을까봐 버림받을까봐 조용히 티안나게 한 구석에 자리 잡아서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맞춰주면서 이건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믿었고 그래도 힘든 관계에서는 내가 조용히 정리하고 제외시켰다 믿으면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투명해져갔다.

 

사실 나도 손이 많이 가는 아이고 싶었다.

저 녀석때문에 내가 못살아 하면서 엉덩이를 맞아가면서도 뭔가 관심을 받고 토닥임을 받고 싶었던 거다.

뛰어나서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긴 했지만 그건 너무 먼 길이라 그냥 손이 많이 가고 조금 어딘가 어설프고 어리석어서  자꾸 지켜봐야하고 걱정해야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같다.

그렇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 같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매사에 주고받는 게 딱 떨어지는 그런 거 말고

그래서 돌아서면 잊히는 거 말고

 

이제 나를 사랑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하기로 괜찮다고 등을 쓰다듬어주기로 하고 적어도 내가 누군가에게 갈증나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책이란 어쩌면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한 모양이다.

심리치유서를 참 많이 읽으면서도 늘 머리로 받아들였다.

이런 케이스 저런 케이스를 정리하면서 딱딱 맞게 서랍을 정해 넣어두었는데

지금 이순간 어쩌면 이렇게 무언가를 흔드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지금 이순간 내가 조금 말랑말랑해져서 어떤 위로를 원하는 딱 그런 순간이었고

그 때 이 책이 내게 온 모양이다.

때로는 이렇게 기막힌 핀트가 존재하기도 한다. 사람사는 일이 꽤 따뜻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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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n의 세계 - 30대 한국 여성이 몸으로 겪는 언스펙터클 분투기
박문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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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득거리면 보다가 정색하고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다.

간혹 문장이 꼬여서 내가 이해를 못하나 싶기도 하지만 상관없다.

나의 몸에서 시작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세상에 까지 확장된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게 되면 나와 다르지 않을 타인을 인정한다.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나와 너는 우리가 되고 우리들이 세상을 이루는 거다.

웃고 심각해지며 그런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내가 3n시절에 이렇게 생각이 깨어있었다면 지금 삶은 달라졌을까?

꼭 반삭을 하거나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나의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그땐 이런 삶을 몰랐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매력적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나랑은 다른.. 전혀 상관없는 뭐 그런거?

머리는 찰랑찰랑 길어야 하고 옷은 남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고 불쾌하지 않게 조금은 있어보이게 입어야 하고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상황이 닥치더라도 조신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했고 무엇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싶었다. 그래서 뭐 그쪽 방향으로 치열하게 한눈을 감고 살았다면 어쩌면 지금  당당한 속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그렇게 높고 화려한 곳을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속물적인 내가 싫고 뭔가 정의롭고 옳은 일에 대한 환상도 함께 품고 있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와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3n의 나이에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었고 아이가 있다는 것은 세상에 지켜야 할 무언가가 생겨버린 일이고 이젠 나만을 위해 마이웨이를 달리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남들이 알려주기도 전에 지레 내가 먼저 단언하고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신중하고 실수를 줄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오래 고믾고 가능하면 아닌 쪽으로 생각을 돌려가며 어떤 도전도  단 1퍼센트의 위험만 보일라 치면 아예 귀를 막고 발을 돌렸다. 안전제일 가능한 안전하고 편안한 쪽으로...

준비없는 도전은 무모하고

이론없는 반박은 치기어린 저항이라고 생각했고

일단 저질러 보고 생각한다는 건  다시 태어나도 내 사전엔 없는 말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2n의 시절에 나는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세상의 박자에 맞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을 마련해야하고 집 평수를 늘여야 하고 아이에게 맞는 사교육을 고르고 시키고 조금은 내 아이로 인해 내 어깨가 펴질 수 있는 상상

내 남편의 지위나 나의 집 크기로 내 어께가 더 비대해지는 상상 그렇게 나는 없이 속물적인 마인드가 더 컸으면서 동시에 이런 저런 것들이 정의롭지 않다고 말로만 비판할 줄 알았고 세상은 내가 아는 것이상 크다고 번번히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커다란 세상의 일부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3n 4n을 보내고 지금 5n이 되면서 조금씩 인간이 변하고 있다.

아주 굽벵이 기어가는 속도만큼...

 

그리고 내가 지금 알게 되고 생각한 것들을 책에서 발견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생각들....

 

 

성폭력에 대해 내 말을 들어주는 동행 반응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말을 편하게 되풀이 할 수 있게 된 거라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 발설하지 못하는 갑갑함보다 발설하고 난 후 휘몰아치는 몰이해가 훨씬 더 두려웠다.

 

내가 겪은 폭력이 흔한 불행이면 안되듯 아이들이 이 범죄를 피한 게 행운이면 안된다. 어린이는 (아니 모든 이는) 보호받는 동시에 개별 주체로서 존엄을 지켜가는 일이 사회의 의무여야 한다.

 

성이 여성이 아동을 따라하고 아동이 성인 여성 흉내를 내는 이곳에서 민감해지기를 단념하면 비참한 사고가 발생한다.

 

폭력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보태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어릴적 당했던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것이 나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는 게 안도감을 준다는 사실이 조금 늦게 슬펐던 기억이 난다. 꼭 이런 거지같은 걸 함께 나누고 공감해야하다니...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할 수 없다는 게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쨍쨍한 날도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설교는 늘 따라다닌다. 부끄러운 건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주면서도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단세포같은 것들이지  예상도 못한 채 벼락맞는 내가 아니니까. 알지만 당당해지기 아직은 어려운 일,,, 적어도 아이들은 그런 경험을 함께 공유하며 안도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늘 바란다.

 

울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국을 몇 술 떴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울고 나면 개운했던 기억들 멋적었던 기억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싶은 감정들이 있다.

운다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해결되는 것도 없지만 그래도 꺼이꺼이 울어야 할 순간이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다 늘 먹던 김밥으로 손을 뻗은 아이는 젤리만 포기한 것이 아니다. 호기심 성공일지 실패일지 걸어보는 작은 내기 또래문화 알아갈 수 있던 자신의 취향과 기호 안전이란 귀중하지만 작은 유희와 상실까지 지우는 안전의 기반은 부실한 것 아닐까

김밥을 택한 아이앞으로 너무 늦지 않게 쓸데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찾아들면 좋겠다.

생활과 유리딘 다만 밫나고 덧없는 것들이 그에게 우연하게 필연하게 가닿는 날이 있길 바란다.

 

가성비라는 말이. 현명한 소비를 뜻하기도 하지만  적은 금액으로 가장 최선을 얻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많은 것들을 뜻하기도 한다. 단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결국 아는 맛, 무난한 색 어디든 어울려서 어디든 이상한 취향을 고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취향도 단순하고 개성도 없고 경험도 적은 그런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실패해도 그만인 작은 내기들. 후히밖에 안 남을 선택들이 주는 풍성함이 있는데

그건 실패만도 아니다. 잘못만도 아니데.. 자꾸 선택의 범위는 줄어든다. 그리고 슬프지만 점점 익숙해진다.

 

종이 속 친구를 만나면서부터 내가 이로운 날에도 완전히 혼자는 아닐 수 있었다 사람대신 책을 친구 삼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 괴괴한 학창 시절을 보낼 확율이 높아지긴 하지만 고독이 어쩌면 충만과 비슷한 뜻이란 걸 체감하는 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슬픔과 새로운 기쁨을 마무리하는 순간은 사실 멋지기도 하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건 친구를 못사귀어서라는 걸 나이먹고 알았다. 친구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나는 외톨이였을 겍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건 늘 어렵고 두렵다. 예상밖의 인복을 만나 여태 사회관계망에서 함께 살고 있다 내가 그렇게 책으로 빠진 건 엄마의 견해처럼 잘난 척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두렵고 겁나고 사람들이 너무 잘나 보여 숨을 곳을 찾았던 것이다.

지금 아이가 핸드폰속으로 아이돌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도 너무 두렵기때문이다.

왕따를 당했을 때 그래서 학교가 두렵고 무서워서 그만두고 싶었을때

그래도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고 학교는 가야하지 않냐고.. 그깐 년들때문에 니가 니 삶을 포기할거냐고 속도 모를 옳지만 재수없는 말만 할때  아이를 위로해준건 그 아이의 오빠들이고 그 오빠들의 노래였고 퍼포먼스였고 오빠들의 팬들과 의 소통이었고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들여다 보는 그들의 불특성 대중을 향한 위안과 위로였다. 그것만으로 아이는 살아갈 힘을 얻었고 그리고 아직도 내 곁에 있다.

나만 몰랐다. 그게 꼭 책이 아니어도 괜찮았고  빠순이가 되는 거든 핸드폰에 빠져 너튜브를 보고 댓글을 다는 행위들이라도 좋았다. 그래서 아이는 아직 내 곁에 있다.

가끔 나는 잘 잊어먹고 속물이고 부모가 아닌 학부모여서 아이의 학습태도를 나무라고 화를 내지만  그래도 아이는 저만의 위안이 있어 세상이 살만하다고 믿고 있는 중이다.

 

글이나 말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전부 보여주지 않는다.

말만 잘 하고 선동만 잘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더라도 .. 말만으로 글만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비록 프로필 사진을 보고 심한 배신감에 무릎이 꺽였지만....

그의 글과 그림은 참 위안이 된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젊었을 적에 알았더라면...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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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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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고 예민하게 구는 일이 거추장스럽거나 시비를 거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 소외되고 상처받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것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 페미니즘은 모두가 잘 살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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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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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쓰기에 독자의 읽기가 더해져 비로소 완성된다. 고 나는 믿는다.

특히나 에세이라면 작가의 경험과  그 경험에 덧대고 각색되고 빠지고 선택된 기억들과 그때의 감정들에 읽는 독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가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독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내게 참 좋은 독서경험을 가져다 주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작품이라는 건 다른 기준이겠지만

내게로 와서 내 기억과 경험을 꺼집어내주고 그때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게 해서 부끄럽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그냥 덮어버리거나 되새길 시간을 준다는 것

그래서 비로소 나는 한권의 읽기를 마쳤다.

 

 

#1.  이외로 별거 아니라고 여겨지는 무언가가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갑자기 내리는 눈발이거나 우연히 버스에서 마주친 아이의 순진한 눈동자거나

     유치하고 허무한 몸개그의 한 부분에서

     그렇게 방심한 순간 터지는 감탄이나 웃음같은것이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도 살아보는게 낫겠다는 마음

     아직은 버틸하지 않나하는 근거없는 자신감

    그렇게 사소한 무언가에서 위안은 느닷없이 온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2.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부모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후회하는 그 지점에서 아직은 내가 책임져야할

     어린 생 명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주저앉고 싶을 때 결국 아이도 내몸에서

     나왔지만     나와 다른 낯선 타인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그 무력감과 도망치고 싶은

    책임감의 무게가 다시 나를 살게 했다. 좋은 어른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어른이 되지 않게 하는 건 그만큼 감당하고 버텨가는 무게때문이었다.

 

#3. 놓친 성공대신 패배가 이룰 성취를 기약하라.

     와닿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는 문장이지만 때론 그런걸 바랄 때가 있다.

     철저하게 실패해도 괜찮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갖게 해달라고

     성공하진 못해도 적어도 그 실패는 온전한 내것이므로 사랑하고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에게 말하곤 했다. 똥폼잡으면서.

 

#4.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 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나는 너를 모른다"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는 말이 참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너를 잘 안다고 오만하게 불쑥 침범하는 것보다 모른다는

    마음으로 몸을 낮추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그를 존중하는 쪽이 낫다.

    어떤 마음이든 맥락과 관계속에서는 다 이유가 있고 그럴 만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비판할 수도 있고 제재할 수도 있고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도 있는 거다.

    우리는 그 마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걸 내가 아닌 타인이라면 가족이든 친구든 오래된   

    동료이든 안다고 설칠게 아니라 모른다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 건  딱 한 명 내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아는 척하지 말자

    하지만 상대가 외롭고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만큼만 곁에 있자.

 

#5  염려하고 망설이고 현실과 타협하면서는 아무것도 이뤄지는 일은 없다.

     무모하게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일  그것이 앞으로 한 발 내딛고 나가게 한다.

    다만 그 무모한 도전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폭력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

    일단은 저질러 보고 한 발 들어가보면 적어도 아~ 이거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라도 갖게 된

    다.

     그리고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보기전엔 누구말도 믿지 못하는 인간유형이기도 하다.

 

#6. 밭에 들인 노고는 내것이지만 아이에게 들인 노고는 얼마든 내것이 아니다.

     밭에서 내가 싦은 열매가 나지만  아이는 저홀로 심은 꿈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안자라 열매도 없고 잘못 자란 열매도 없다.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밭을 향한 것이지 열매를 향해서는 안될 것이다. 밭만 가꾸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

    그런데 말입니다.

    자꾸 본전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나의 속물성인거 같더군요,

    그동안 들어간 학원비와 사교육비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고  꼭 엄마에게까지 아이의 성적과

    학원에서의 자세를 시시콜콜하게 적어보내는 그  정성이 그냥 나의 인내심을 시험할 뿐입니다

    나는 바담풍 하지만 너는 바람풍 하라고 하는 모순적인 지적질이 여전하고

    손대고 코풀고 싶은 속물적 욕심에 나는 우아하게 있어도 아이는 영특해서 내  자랑거리가 되

    었으면 하는 간절한 개꿈도 포기가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필요합니다.

    속물적인 욕심이 목젖까지 차올랐을 때  상투적일지라도 이런 문장들이 필요합니다.

 

#7.  집은 세상의 끝.

     여기서 다시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

     어디든 언제든 다시 떠나고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품을 숨겨진 안식

    처로 집이 기억되길  그래서 나는 여기서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게 되길

     이제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가  날개를 달고 훨 훨  날아가길 희망합니다.

    설령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원망하지 말기를

    필요할 때만 돌아와 저 좋은 것만 취하고 다시 가버리더라도 언제든 무심해지기를

   지금 나의 기도 제목이기도 한 것.

 

#8.  가족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만들어져야 하고 노력해야 유지된다.

     선천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과 시간과 추억이 공유될 때 비로소 굴러가고 유지되

     지만 지극히 불완전하고 불안전하다. 누구나 가족이 되지만 아무나 가족이 되지 않는다.

     가끔 제대로 유지되고 화목하다싶은 가족을 들여다 보면 누군가 한사람이 동동거리며 희생하

     고 참아내고 견뎌내는 것 위에서 우아하게 떠있는게 보인다.

     그 한사람이 지쳐 쓰러지는 순간 그 가족은 그대로 무너질탠데 안에서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

    가족은 사회의 작은 단위라고 그래고 동시에 개인적인  영역이라며 함부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또 일방적으로 들이댈수있는 평균값도 가진다. 참 폭력적이다.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영역이라며 모른 척하면서 가족이 유지되는 건 사회적인

     부분이라며 원하는 것을 취한다.

     가족은 개인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고 안식처이기도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파괴되어도 할 수 없는 순간도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같은 모양새의 가족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고 조금 외롭게 홀로 있어도 괜찮아

     야 한다. 가족이 가장 단단하고 중요한게 아니라 어쩌면 사회보장이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9. 행복은 되풀이 되지 않는데 불행은 반복하는 습성이 있다.

     꼭 안좋은 일은 손잡고 함께 오더라

     암만 생각해도 불행은 무슨 조직을 갖춘 모양이다.

 

그냥 감상적인 글일거야.

제목을 딱 보면 감이 오잖아.... 라고 오만했다.

뭐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앗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가진 진심이 페이지 마다 가득해서 그냥 감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뜬금없이 마음이 울컥해서 오랫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내것과 닮아 있어서 괜히 버럭했다가 무안해졌다.

같은 유년을 보내지 않았고 기억이 다 다르지만 어쩌면 그 순간 순간의 불쑥거리는 감정들이 다 알거 같아서  괜히 끄덕이다가 이것도 오지랍이고 오만이지 싶어 혼자 얼굴이 붉어지다가

내가 나이를 먹었나 에세이를 읽고 센티해지네.. 하며 센 척하다가  마지막 장을 덮는다.

 

이 책의 완성은 작가의 문장과 나의 기억과 감정이 버무려진 그것이다.

참 괜찮은 눈이 내리지 않는 지금 이겨울

난 눈을 참 싫어하지만 한 번 쯤은 푸짐하게 내려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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