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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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왜 읽으려고 했을까?

분명 알라딘 서재에서 누군가의 리뷰 혹은 페이퍼에서  알게 되어 일기로 했던 거 같은데 그게 누구의 어떤 글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너무 오래 장바구니에 담아두었고 구입하고서도 너무 오래 서가에 꽂아두기만 했다. 여름 꾸역꾸역 읽기에 안성맞춤이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이 책을 뽑아든게 일주일 전이었다.

이전 <읽는 인간> 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나이든 노 작가의 해탈한 문장들이 힘겨웠다. 음... 좋은 말이야, 좋은 말일거야, 게다가 사회에도 관심이 많은 작가이니  아픈 자녀를 돌봤던 아버지였으니.... 성찰적인(이라고 쓰고 재미없는이라고 해석하는) 소설을 쓴 작가니까... 모든 내용이 좋을거라고 생각하며  반에 반만 읽고 책을 덮었다.

 

그래도 소설은 에세이보다 읽기 쉬울거라고 나자신을  다독이면서 책을 펼친다,

난 의외로 이런 담담하고 지루하고 맥락없으면서 뭔가 계속 읽게 되는 소설이 좋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이어지더라도 계속 쉬지 않고 읽어가면서 단지 읽는다는 일이 알아낸다는 일이거나 이해한다는 일이 아니라 견뎌낸다거나 무언가를 참아내는 (불쾌한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음으로 읽어내는 일이 좋다.

이건 칭찬일까 비판일까?

 

소설은 농담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농담의 의미를 찾아간다,

좋은 대학을 갔지만 장래가 막막한 학과에 진학한 주인공을 걱정하는 척 하는 친척들에게 어머니가 일갈을 놓는다.

 

   "취직이 안되면 저 아이는 소설가가 될걸요!

    소설 재료는 붉은 가죽 트렁크에 한가득 들어있거든요"

그렇게 맥락없는 어머니의 일갈은 아들이 소설가가 됨으로 현실이 되었고 농담은 이제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붉은 가죽 트렁크"에 기대를 건  소설가 아들은 일생의 마지막 역작 익사 소설을 쓰기 위해 고향으로 어머니의 '붉은 가죽 트렁크"를 만나러 오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시작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부터가 소설일지 한계가 모호하게 이야기는 전개된다,

작중 화자인 소설가 코기토는 인생 마지막 역작으로 쓰려던 익사 소설을 통해 자신의 기억속에 있던 아버지를 완성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누이는 코기토가 소환하려는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하고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있던  붉은 가죽 트렁크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어린 기억속에 남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사실이었을까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코기토는 스스로 혼란에 빠지고 쓰지 못한 익사 소설로 의기소침해진다, 더구나 거대 현기증까지 생기면서 이제 마지막 소설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고향 산속집에서 만난 극단 혈거인의 젊은이들 특히 우나이코와의 만남으로 다시 고향에 대해 기억에 대해 그리고 우나이코에 대해 새롭게 경험하고 받아들인다,

 

코기토의 기억속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을까 악한 사람이었을까?

패전을 에감하며 새로운 저항을 도모하던 장교들과 함께 하던 아버지 

밤마다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무언가를 꾸미던 아버지의  알 수 없는 모습

그리고 비내리는 밤 혼자 붉은 가죽 트렁크를 들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아버지

그리고 눈앞에서 뒤집혀진 배와  죽어버린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죽음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코기토

그 순간 아버지 곁에 있던 주인공의 환상의 짝 코기의 모습 '

그건 꿈이었을까 현실이었을까

과연 코기토가 쓰고 싶어했던 익사소설속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었을까 아니면 아버지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몸마저 말을 듣지 않게 되면서 코기토는 마음이 예민해진다,

쓸 수 없는 작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아들 히카리에게  "넌 바보다"라고 두번이나 말해버린 일 역시 그런 감정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언급하기는 커녕 내색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히카리에게 놀리거나 뭐라고 하면 달려가 따져주는 든든한 울타리였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자기에게 바보라고 해버리자 히카리는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함께 음악을 나누지도 않고 말을 나누지도 않는다.

나중에 수술을 하게되는 코기토의 아내의 부탁으로  히가리의 말들을 모은 작은 책속의 히카리의 말들은 어눌하지만 진실되고 아름답다.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이고 어딘가 경직되고 딱딱하지만 그 문장과 단어속의 진심만은 그대로 전달된다. 그런 아들에게 막말을 하고 관계를 단절당한 아버지

그 아버지와  물속에 익사하면서 단절되어간 죽은 아버지 둘은 다른 듯 닮았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아무행동도 하지 못하고 나이 먹어서도 알지도 못한 그 어린 소년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스스로에게 바보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속에는 소설가 코기토의 이야기와 함께 연극 혈거인들의 이야기도 함께 등장한다.

혈거인의 중심인물이며 늘 코기토와 연결되는 우나이코의 이야기도 또다른 중심이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연극을  추구하는 혈거인 단원들 중에도 가장 독특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우나이코는 우연하게도 "개를 던지다"라는  해프닝같은 공연을 시도하고 큰 호응을 얻는다.

이어 코키토의 여동생 아사의 도움을 받아 지역 전설을 영화화 했던 예전의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을 바탕으로 연극화 하고 그 내용안에 "개를 던지다"라는 형식을 넣음으로써  반란에 실패하고 배반한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던 그 어머니의 이야기와 함께 어린시절 자기를 성폭력했던 큰 아버지를 고발하려는 이야기를 준비한다, 그건 개인적인 복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에 의한 강간과 국가에 의한 살인이라는 사소하고 이름없는 개인의 문제가 결국은 사회적인 문제와 중첩된다는 것을 인식한  우나이코와 아사의 결의가 여런 사람에게 전해지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반박하며 준비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다.

 

여러가지 다양한 이야기 어쩌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제각각의 문제들이 한 장소에서 부딪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동의하고 반대하고 무시하는 과정에서 다시 새롭게 변형되고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처음에 말했듯이 어쩌면 맥락없이  부질없고 애쓰기만 하다가 끝날지 모른다는 막연함이 소설 내내 관통하는데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냥 어찌 되는지 끝까지 흘러 갈 수 밖에 없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거냐?  그래서 너의 상처가 어떻게 되어갔다는 것이냐? 다 자라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아들과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결국 아내나 여동생이 아니면 게다가 자기가족과는 상관이 없던 우나이코나 릿짱이 아니면 무엇하나 제대로 해닐 수 없는  주인공이나 남자인물들은 데체 어디까지 꾸역꾸역 미룰것인지... 그 모든 것이 기대감보다 도데체 어찌 되어갈려고 이러나 싶은 기분으로 책을 끝까지 읽게 한다.

그래서 실망했냐고?

글쎄...

 

그냥 많은 기억들이 상념들이 책의 내용과 함께 혹은 상관없이 휙휙 지나갔다.

주인공이 예전 어린 소년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꿈꾸던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자꾸 주인공이 어린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낮설었다.

이제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어버린 남자가 자신의 소년시절을 생각하고 그 때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일이 머리로는 받아들여지는데 마음으로는 영 어색했다

내 부모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였을거라는 막연하고 어이없는 믿음같은 것과 맥락이 닿아있어서일까?  책속에 많이 등장하진 않지만 히카리의 아버지로서의 주인공이 더 당연하고 맞춤처럼 받아들여졌다. 내용은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소설가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이지만 나는 주변으로 등장하는 (그러기엔 후반에는 바중이 커졌지만)  장애가 있는 아들의 아버지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이 반이상 닫힌 딸의 아버지 그리고 모든 걸 견뎌내며 이해하는 어떤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주인공이 더 쉽게 와 닿았다.

그건 내가 내 아버지를 처음부터 아버지로 만났던 게 이유일게다.

누구나 자기 부모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부모라는 존재로 만나질 않나?

그 이전을 알지 못하고 함께 공유하지 못했고 게다가 시공간조차 함꼐 나누지 못한 그 이전의 시간을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계속 주인공과 내 아버지를 겹쳐가며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좋은 아버지였나? 책임감있게 가족을 지탱했다는 면에서는 그릭 자기 일에 책임을 다했다는 것에는 좋은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이 좋은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고 좋은 남편이 아닐수도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도데체 뭐지? 그냥 나를 중심으로 그가 좋았는가 나빴는가로밖에 나는 판단할 수 없는게 아닌가? 백명을 인터뷰해서 그중에 51명이상이 좋아요를 누르면 자동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한때 미워한 적도 있고 짠 한 적도 있고 존경스러운 적도 있고 귀찮은 적도 있고 절실하게 필요했던 적도 있었던 복합적인  대상인 내 아버지를 생각한다.

 때가 되면  당연하게 묘사를 다니고  나중에 흉가로 변할지라도 재실을 지어 조상을 기렸던 우리 아버지의 당신 아버지에 대한 추모와 기행동은 익사소설에 집착은 코기토 못지 않은 집념이다. 그리고 한번도 당신 자식에게 바보라고 하진 않았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실망할 줄 알았고 그 내색하지 않음이 들키지 않을리라고 과신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통속적이고 적당히 속물스럽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체념해갔었다.

그냥 코기토가 쓰고 싶은 아버지를 보면서 그리고 아들 히카리를 대하는 아버지 코기토를 보면서 나는 나의 아버지를 겹쳐볼 뿐이다.

에세이나 인터뷰를 보아도 겐지씨는 소설가 혹은 예술가라기 보다 깐깐한 학자같고 그냥 히카리씨의 아버지이기만 할 거 같고  사회에 대한 저항정신이나 꼿꼿한 신념이 있다고 하지만 이젠 나이 먹고 조금 꼬장꼬장하고  한물 간 구석 애물단지같아 보였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허구적인 이야기를 읽는다기보다는

그가 들려주는 살아온 이야기들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뒤섞인채 듣고 있는 묘한 느낌이었고 그가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아 보여서 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코기토는 결국 그가 쓰고자 하는 익사소설을 쓰지 못했다.

내가 본 그는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평생의 과제를 늘 등에 매달고 견디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그의 등에 메달린 무게는 그가 죽기 전에는 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고 옳은 사람임을 알고 있지만 끝내 그 앞에서 그렇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일테고

돌아서서 아쉬워하고 미안해하고 고마워하지만 그 앞에서는 왠지 말이 나오질 않거나

한두마디만 하다보면 괜한 반발심만 생기고 말게 되는

그러다 다시 돌아서서 후회하게 되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재미없게 읽은 이 책때문인지

그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졌다.

또 꾸역꾸역 견디며 읽게 될 테지만 그 과정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음.. 사실 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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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7-08-24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희망님 잊지않고 리뷰 써주셨네요 ^^ 저랑 비슷한 감상이셔서 ㅎ. 님도 그러셨네요. 그닥 재미없는데 책을 내려놓을수없는 ㅎㅎ 신기한 책 맞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