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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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재우고 좀 늦은 시간에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참 동안 하얀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다가 겨우 생각난 한 마디는 이거였다. 첫인상부터!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금방 떠올랐던 것은, 스밀라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발음할 때 느껴지는 금세 깨질 것 같은 느낌의 사랑 이야기였다. 아마도 이 상상 속 이야기의 주인공 스밀라는 눈같이 청순하고 얼음처럼 쉽게 부서질 것 같이 생긴 인물이리라.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끝날 것이다. “스밀라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끝없이 펼쳐진 하얀 눈을 이불 삼아 긴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雪)이 그녀의 감긴 눈꺼풀 위로 조용히 쌓이기 시작했다.” 제목으로 시작된 상상은 엉뚱한 결말을 맺고 있었다. 째깍, 째깍. 시계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렸다.

  내가 처음 본 것은 눈 위에 쓰러져 있는 스밀라가 아니라 이사야라는 아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스밀라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눈(雪)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스밀라의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 생각보다 키가 작다. 아마도 그녀가 덴마크인과 이누이트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지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고 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잠시 동안의 정적. 그녀가 내 쪽으로 휙 몸을 돌릴 때 오른팔에 끼고 있는 ‘유클리드 원론’이 툭 하고 떨어진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게 된다. 까무잡잡한 피부, 까만 눈동자, 꽉 다문 입술. 상상 속 이야기의 연약한 여주인공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제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요. 그녀가 웃고 있다. 의외다. 스밀라가 대답한다.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들 중에는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적어도 이만한 스밀라를 기대할 걸요. 그녀가 까치발을 디디며 팔을 쭉 뻗어서 손바닥을 머리 위로 갖다 댄다. 예전에 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들은 덩치들이 컸잖아요. 그래서 스밀라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과 같은 역할? 내가 혼자 중얼거린다. 이 말을 그녀가 들었나보다. 이야기를 이루는 큰 골격만 놓고 보면 이 소설은 하드보일드 풍의 추리소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챈들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냉소적인 탐정 말로나 르 카레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우직한 스파이 리머스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타입의 인물들이죠. 스밀라는 자신이 작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맞장구를 친다. 맞아요. 하드보일드의 주인공이 되기엔 제가 너무 아담한 편이죠. ‘아담한’이란 말을 강조하며 그녀가 또 한 번 웃는다. 하, 드, 보, 일, 드. 나는 이 단어를 천천히 웅얼거린다. 그녀는 떨어뜨렸던 ‘유클리드 원론’을 줍고 있다. 눈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하얀 감방에서 사는 이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은 별로 없어요. 그녀가 ‘유클리드 원론’에 묻은 눈을 손바닥으로 탁탁탁 털며 남아 있는 물기를 소매로 스윽 닦는다. 제가 선택한 답은 이 안에 있죠. 전 하얀 감방 안에서 수와 논리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상상하죠. 그 세계 속에선 차별도, 범죄도, 탐욕도 없어요. 그래서 전 그 세계를 사랑해요. 그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것이니까요. 

  주위가 점점 환해지면서 그녀의 얼굴 위로 무엇인가 살며시 떨어진다. 눈이 온다. 카니크예요. 고운 가루 같은 눈이요. 어린 아이처럼 눈을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스밀라가 비밀스럽게 소곤거린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에요. 죽은 이사야도, 죽인 자를 쫓는 저도 사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아니죠. 물론 앞으로 전 도시를 떠나 바다와 거대한 얼음이 있는 곳으로 갈 거예요. 거기서 이 불쌍한 아이를 죽인 이들을 찾아내겠죠. 살인과 음모, 돈과 탐욕이 이 아이의 죽음과 얽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소설을 아무리 집중해서 읽었어도 책을 덮고 나면 그런 건 생각나지 않아요. 머릿속에 남는 건 하얀 눈뿐이죠. 그게 바로 카니크예요. 스밀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한기가 심하게 느껴진다. 카니크 한 움큼이 내 옷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째깍, 째깍. 어디선가 시계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약간 열려져 있던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어왔다. 하얀 컴퓨터 화면만이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쩐지 좀 이상하긴 했다. 무뚝뚝할 것만 같았던 스밀라가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다니. 꿈이었다. 끝없이 내릴 것 같은 카니크와 스밀라의 까만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꿈에 나타났던 단어들을 곱씹어 본다. 유클리드 원론, 스밀라, 하드보일드, 카니크. 이 작품은 이런 단어들로 이루어져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걸 퍼즐 맞추듯이 끼워 맞추기 시작하면 진짜 추리소설로 읽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꿈속의 스밀라가 했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눈(雪), 카니크를 읽으라는 것이다. 부디, 당신은 카니크가 흩날리는 진짜(?) 꿈을 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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