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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체홉이 작품 속에서 제시한 해결책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 볼까 합니다. 사실 체홉은 백년 전의 작가여서, 그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하더라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별 도움이 안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체홉이 아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살펴볼까 합니다. 1938년에 태어나 1988년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레이몬드 카버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은 다양합니다. 그 수많은 수식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체홉 정신을 계승한 작가'라는 수식어입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을 읽어보면, 왜 이 수식어를 그에게 붙였는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소하고 소박한 것들이 보여주는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레이몬드 카버는 분명한 체홉 정신의 계승자입니다.
그러니 체홉이 제시했던 문제의식을 레이몬드 카버의 해결책으로 풀어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가 의사도 아니고, 앞으로 소개할 그의 해결책이 의사의 삶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요. 하지만 매너리즘과 매너리즘이 만들어 낸 비극을 해결하는 것은 보편적인 문제이고, 비단 의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라는 것이 의사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성당>(문학동네)에 실려 있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은 저희가 지금 하고 있는 논의에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도록 하죠.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보죠. 토요일 저녁 앤은 자신의 아이, 스코티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하고 전화번호를 남깁니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빵집주인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월요일 아침 스코티는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되고 중환자실에 입원합니다. 남편인 하워드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케이크를 찾아가라는 전화를 받습니다. 가벼운 뇌진탕으로 입원한 스코티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며칠 후 결국 사망합니다. 스코티가 사망한 날 빵집으로부터 케이크를 찾아가라는 전화를 다시 받은 앤과 하워드는 분노하며 빵집이 있는 쇼핑센터로 자정이 되기 얼마 전에찾아갑니다. 부부는 빵집장수에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여기서 부터가 재밌는데요. 자신의 잘못, 사실 아이가 죽은 줄 전혀 몰랐으니 꼭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죠, 을 깨달은 빵집 주인은 부부에게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계피 롤빵과 커피를 부부에게 대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겪은 인생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찾아온 회한과 무력감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고 햇살이 가게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작품 속에 나온 빵집 주인의 삶과, 안드레이 에피미치의 삶과, 그리고 대부분의 의사들의 삶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반복되는 일상, 회한과 무력감, 퉁명스러움과 무뚝뚝함. 이 작품 속의 빵집 주인도 분명히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소설의 첫장면에 나타난 빵집 주인에 대한 앤의 첫인상이 그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다르지만 그도 안드레이 에피미치처럼 위기를 겪었죠. 어쩌면 그가 앤과 하워드에게 자신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어디서 행패냐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도 사실 삶에 지쳐 있는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빵과 커피를 대접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이것이 체홉과 레이먼드 카버가 여느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사소하고 소박한, 하지만 최선의, 해결책의 의미가 살아있으면서 따뜻한 롤빵이 갖고 있는 훈훈한 감정과 검은 커피와 검은 초콜릿 케잌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검은 당밀빵의 검은 색이 담고 있는 애도의 의미가 조화롭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몬드 카버의 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과 매너리즘에 매몰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주변에게 관심을 가질 것, 그것이 백년의 시간을 두고 태어난 두명의 작가가 저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자 매너리즘에 대한 해결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