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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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되어 있지만,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는 의학사적으로 는 파스퇴르와 코흐의 발견이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죠. 이성과 합리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곧 세상의 모든 병들을 치료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저희들의 눈으로 보면 19세기인들의 유토피아가 좀 위태로워 보이지만요. 하지만 안드레이 에피미치가 얘기하는 '자선병원'의 현실은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멀죠. 희곡 <갈매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론과 실제가 다른 것이고, 제가 앞서 얘기한 용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사실과 진실이 다른 거죠. 

이 소설은 두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가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실과 진실의 관계가 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 지를 보는 겁니다. 두번째는 안드레이 에피미치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체홉이 안드레이 에피미치, 지성과 정직을 사랑하고, 다른 이에게 명령하고 금지하고 주장하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부정축재를 하지도 못하는, 재산이 겨우 86루블밖에 남지 않은 무고하고 검소하고 청렴한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선병원 외부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의 '사실' 입니다. 1퍼센트에 불과한 개복수술 사망률, 파스퇴르와 코흐의 발견, 유전이론, 최면술, 정신의학, 통계위생학까지.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죠. '진실'은 자선병원 내부에서 볼 수 있죠. 병원은 20년전과 마찬가지로 절도와 다툼과 험담으로 가득하고 의사들은 노골적으로 엉터리 진료를 하고 있죠. 이게 바로 안드레이 에피미치를 둘러싸고 있는 사실과 진실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아침 여덟시에 일어나 옷을 입고 차를 마신다. 그리고 서재에 앉아 책을 읽거나 병원에 출근한다. 병원의 어둡고 좁은 복도에 진료를 기다리는 외래 환자를 본다.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병원의 환경이 환자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알고 있지만 개선을 위한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0년이상 계속되는 똑같은 질문과 일상이 지겨워졌기 때문입니다. 무해하지만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모피어스가 나타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반드미뜨리치죠. 불멸과 형이상학을 얘기하는 안드레이 에피미치에게 병원의 폭력과 삶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안드레이 에피미치에게 진실을 보는 빨간 알약을 먹으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피파니를 경험하게 되죠. 그 부분을 읽어보죠. 

어떻게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단 말인가. 그는 고통을 몰랐고, 또 고통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니끼따와 호보또프와 사무장과 보조의사를 죽이고 자살하고 싶었다.(125쪽)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20년 동안 몰랐던 사실을, 병원안의 진실을, 이반 드미뜨리치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드디어 모피어스를 통해서 빨간알약을 먹게 된 것이죠. 하지만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네오가 아니었습니다.니끼따의 폭력으로 그의 저항은 좌절됩니다. 그리고 결말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다음날 저녁 그는 뇌일혈로 사망합니다. 아마도 외상성 뇌출혈이었겠죠?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사망원인은 표면적으로는 뇌일혈이지만, 체홉이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안드레이 에피미치의 사망원인은 매너리즘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런 변화를 꿈꾸지 않은 것이 그의 사망원인이라는 거죠.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또는 의사라면 빠질 수 밖에 없는 매너리즘 때문에 죽어야 하다니, 작가가 좀 너무 하죠? 작가에 대한 비난은 제쳐두고, 그렇다면 해결책은 뭘까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왔는데요. 해답은 피해망상 환자인 이반 드미뜨리치가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이상학과, 과학이론들과, 불멸에 대한 고민과, 스토아 철학 속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곳에 있습니다.  

삶에 대한 갈망, 또는 주변에 대한 관심이죠. 병원 안의 진실을 외면하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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